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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사(朝鮮武史)

최형국 지음 | 인물과사상사
조선무사(朝鮮武史)

최형국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9년 4월 / 330쪽 / 12,000원



1장. 무인과 백성, 조선을 지키다



천시받은 조선의 무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는 '무'를 천시하고 '문'을 숭상한 이른바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세상이며, 이러한 시대에 '무인'혹은 '무사(武士)'라는 계급이나 직종은 천시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전통 무예를 수련한다거나 그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 대해 이상한 편견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무(武)가 천덕꾸러기이고, 무인(武人)들은 대접받지 못한 군상들이었을까?

500년 조선 역사에서 양반(兩班)은 늘 권력의 중심이었으며, 그 지위와 권력은 과거를 통해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물론 과거 이외에 선조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한 천거나 문음, 취재 등 다양한 권력 진출 통로가 있었지만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양반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혹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는 말로, 바로 조선이라는 국가권력 체제가 문반과 무반이라는 양대 산맥을 중심으로 한 관료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전기에는 이론 시험인 강서와 실기인 마상무예 등이 있어서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무과 자체를 볼 엄두를 못 냈다. 무과를 보려면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며, 마상무예에 필요한 말을 길러야 하고, 틈나는 대로 실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꿈도 못 꾸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는 병력이 부족해 성적이 저조하더라도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군역으로 복무 중인 사람들까지 시험을 보았고 어김없이 그들에게도 과거 합격자의 칭호가 내려졌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전사자가 많이 발생해 시급히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야 할 때는 천인을 비롯한 하층민까지도 무과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이후 숙종(肅宗, 1661~1720)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만과(萬科)'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을 정도로 1만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무과에 합격시키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1552~1608)는 다급한 마음에 명나라의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비롯한 무예 실기 내용을 얻고자 수치심도 참아가며 명나라 장수들에게 아부했고, 이후 조선의 무인들이 직접 훈련할 수 있도록 『무예제보(武藝諸譜)』라는 무예서를 편찬하도록 명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뒤인 숙종 때에도 조선통신사 연행에 신분을 숨긴 무인들을 같이 보내 일본의 검술을 배워오도록 해서 직접 시험하기까지 했다. 정조가 세손이던 1759년(영조 35) 『무예신보(武藝新譜)』가 완성되었고, 1790년(정조 14)에는 정조가 직접 서문을 내린 조선 무예서의 결정판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는 지상 무예 열여덟 가지, 마상무예 여섯 가지로 조선의 '국기(國技)'로 평가할 만큼 의미 있는 무예이다.

이처럼 조선의 국왕들까지 무인이나 무예에 대해 결코 폄하하거나 비천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문과 무는 새의 양 날개나 수레의 두 바퀴 같아서 무의 역사는 곧 국가의 역사와 함께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 흐름은 어찌 보면 문의 역사, 혹은 문인들의 역사로 조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나 무인을 몰라서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무와 무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어 그들이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당당한 주체로 자리 매김 된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더욱 강건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조선은 늘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만은 아니었다.

전통시대 최고의 통신망, 봉수

지금의 정보 전달 속도는 빛의 속도라 할 정도로 빠르다. 인터넷, 인공위성 등 정보를 전달하는 다양한 수단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는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을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통신수단이 없던 옛날에는 어떤 방법으로 전쟁 등의 위급한 상황을 신속하게 알렸을까? 이럴 때 사용한 것이 바로 '봉수(烽燧)'이다. 봉수는 산꼭대기에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밤에는 봉(烽, 횃불)으로, 낮에는 수(燧, 연기)로 변방을 비롯해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 곳에서 중앙과 각 지방의 군영에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군사통신 체제이다. 그래서 횃불만을 말하는 봉화(烽火)보다는 횃불과 연기를 모두 포함하는 봉수(烽燧)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물론 봉수 이외에도 말을 이용한 파발(擺撥)이 있었다. 그러나 파발은 그 유지비용이 많이 들고 양반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회적 물의도 일으켰다. 이에 반해 봉수는 오직 군사용으로만 사용했으며, 그 전달 속도 또한 그리 느린 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봉수는 삼국시대 이래 변방의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는 기록상 기원전 1050년에 세워진 중국 주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삼국시대에 봉수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531,) 때에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던 고려가 봉수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들에 대처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고려의 봉수제도는 조선으로 이어졌는데,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지금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봉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의 기본적인 기틀을 확립하려고 애쓴 세종(世宗, 1397~1450)에 이르러 거화법(擧火法)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봉수 체제가 수립되었다. 당시 새롭게 정비된 내용을 보면, 평시에는 한 개,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개(再擧), 적이 해안 가까이 밀고 들어오면 세 개(三擧), 우리 전투선과 교전하면 네 개(四擧), 마지막으로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다섯 개(五擧)의 순으로 고려보다 좀더 세밀하게 봉수가 올려졌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핵심 봉수대인 직봉(직선봉수, 直線烽燧)과 보조 봉수인 간봉(간선봉수, 間線烽燧)으로 구성됐으며 전국에 다섯 개의 봉수로를 두었다. 최종 도착지인 남산에서는 봉수가 올라오는 방향과 상태를 분별해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고 임금에게 변방의 상황을 알렸다. 특히 밤중에 봉수가 여러 개 올라오면, 병조에서는 그 즉시 숙직하는 승정원 관리에게 보고하고 잠든 임금을 깨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만큼 봉수는 국가 위급 사태를 알리는 최고의 통신 체계였다. 전국에 설치된 봉수대는 많은 경우 703개나 되어 웬만큼 높은 산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 봉수대 가운데 제주도에만 63개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군사신호 체제였던 봉수도 분명히 한계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와 안개였다. 보통 봉수대의 불은 화력이 좋은 이리 똥이 최고이나 구하기 어려워 쇠똥이나 말똥을 이용했다. 그러나 악천후가 계속되면 봉수는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었다. 큰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면 불을 피울 수 없었고, 안개가 잔뜩 낄 때면 연기든 불이든 아예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봉수군에게 이런 날은 죽음의 날이다. 왜냐하면 봉수가 무용지물이 되면, 그 임무를 봉수군이 직접 했다. '오직 믿는 것은 두 발뿐'이라는 마라토너처럼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렸다. 이것을 치고(馳告)라고 하는데, 요즘의 산악 마라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두 봉수대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고 구름이 조금 끼었을 때는 포를 쏘아 신호를 알리는 신포(信砲) 또는 나팔을 부는 천아성(天鵝聲)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2장. 조선의 병사들



조선 병사의 하루


일상에서 '하루'라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물론 유구한 역사에서도 하루라는 시간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의 관심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뛰어난 인물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먼저 생각하고 아울러 거북선을 비롯해 해상 전투에서의 통쾌한 승리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는 아주 먼 과거에 벌어진 일을 단편적인 조각들로 이어 붙여야 하기에 중요한 일이나 사건 혹은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청난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그날도 '하루'라는 시간에서 탄생한 것은 확실하다. 과거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기억 또한 '하루'라는 시간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전에는 놓쳤던 많은 것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름나고 뛰어난 장수가 아닌 이름 없는 병사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역사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조선시대 병사들도 지금의 군대처럼 다양한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요즘 군대에서 사용하는 기상나팔이 조선시대에도 기상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팔은 조선시대에도 나팔(喇叭)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으며 쇠로 만든 피리라서 철적(鐵笛)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군사용어로 두호(頭號)라고 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가 진영에 길게 울리면 병사들은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무기와 보급품 등을 챙겨 곧바로 밥 지을 준비를 했다. 이때 보통 화병(火兵)이라는 요즘의 취사병과 비슷한 병사가 밥을 지었다. 그러나 밥 지을 물을 길어 오고 땔감을 하는 것은 모든 병사가 함께했다. 이후 두 번째 나팔 소리인 이호(二號)가 울리면 병사들은 밥을 먹고 무기를 비롯한 장비를 챙겨 막사를 나섰다. 자신이 진형(陣形)에서 책임진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해야만 했다. 이렇게 진형을 펼치면 꼼짝없이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쉴 틈 없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반복해야만 했다.

예상보다 진법 훈련이 빨리 끝나거나 행군 준비로 바쁠 땐 병사들이 직접 비상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보급이 끊어질 때를 대비해서 병사들은 각자 며칠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을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특히 적에게 포위되거나 부대와 격리되는 상황이 전쟁 때에는 자주 발생해서 비상식량 만들기는 하나의 훈련 형태로 진행했다. 일반 식량보다 갑절은 힘들게 만든 비상식량은 그 사용에도 철저한 규율이 있었는데, 적에게 포위되는 등 매우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먹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시로 이 비상식량을 점검하는 일이 하나의 불시 비상점검 훈련으로 잡히기도 했는데, 만약 이 비상식량을 휴대하지 않았거나 먹어버렸을 때는 자신의 무기를 잃은 죄와 똑같은 죄를 물었다. 이렇게 비상식량 만들기에 정신을 팔다 보면 어느덧 점심때가 다가오고 여느 때처럼 식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진영을 뒤덮게 된다. 그렇게 오전 한나절이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고달픈 병사의 하루는 여전하다. 오후 훈련은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를 입고 무기를 사용하는 훈련으로 일종의 완전군장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훈련장에서는 의도적으로 군장을 비롯한 무기를 더 무거운 것을 사용해 병사들의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이는 사람의 혈기(血氣)라는 것이 쓸면 쓸수록 견고해지고 쓰지 않으면 약해지는 것이라,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몸을 고달프게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훈련법은 오늘의 군대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법 훈련이라는 것이 쉼 없이 뛰고 달리는 것이었기에 한차례 소나기 같은 공격 훈련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소리가 퍼지곤 했다. 특히 기병과 동시에 훈련하는 경우에는 기병의 말을 뒤쫓아 가며 전 속력으로 달려가고 다시 되돌아와야 했기에 더없이 힘들었다. 그렇게 넓디넓은 훈련장 이곳저곳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리면 해는 어느덧 기울어져 서산에 걸리는 저녁이 되곤 했다. 이후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화병들이 밥 지을 준비를 하는데, 행군 중에는 적이 물에 독을 풀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대비했다. 예를 들면, 개울이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 때에는 먼저 진중에서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나 어린 가축으로 하여금 그 물을 먼저 먹어보게 해 탈이 없음을 확인하고 병사들의 밥을 짓는 것이었다. 이렇게 화병들이 밥을 지으면 나머지 병사들은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임시 거처를 만든다.

그러나 훈련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행군에 돌입하면 꼼짝없이 며칠은 밤낮으로 걷고 또 걷는 고행의 훈련이 이어졌다. 행군 훈련은 인시(寅時, 새벽 3시)에 아침밥을 먹고 묘시(卯時, 새벽 5시)에 출발해, 오시(午時, 낮 12시)에 점심밥을 먹고 미시(未時, 오후 2시)에 마치며, 하루에 30리(약 12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미시에 행군을 마치는 것이 천시(天時)를 어기지 않는 것이라고 해 장수들은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훈련을 서둘러 마쳤다. 하루 30리를 행군하는 것은 적을 만나더라도 병사들이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싸울 수 있는 체력적 한계를 고려한 것으로 이 행군 거리를 지켰다.

이렇듯 조선 병사의 하루를 조용히 살펴보면,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 아니 반만년 우리의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세계에서 단일 왕조로 500년의 전통성을 이어온 국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그 긴 세월 동안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병사들의 일상은 곧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비단 이러한 병사의 문제는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에도 핵심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쉼 없는 훈련과 훈련을 통해 세상 어느 조직보다도 굳세고 단단한 조직이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그 군대를 이루는 병사 한 명의 하루는 곧 기나긴 역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백성의 눈물이 담긴 갑옷

전쟁의 역사는 보통 무기의 역사와 동일시된다. 그만큼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기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갑옷으로 대표되는 방어 수단이다. 특히 군사조직이라는 특수성으로 갑옷은 전투 상황에서 계급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낼 수 있었기에 방어적 속성뿐만 아니라 신분을 상징하는 의물(儀物)로도 발전하게 된다. 외형만으로도 충분히 적의 심리를 교란하고 위축시킬 수 있었던 갑옷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면서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장식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특수 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시대에는 수십 종이 넘는 갑옷이 사용되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철갑(鐵甲)이다. 철갑은 작은 쇳조각, 이른바 철찰(鐵札)을 가죽끈으로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가장 방호력이 뛰어난 갑옷으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철갑은 철찰을 이어 주는 가죽끈이 쉽게 마모되면서 잘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전투를 한번 치르고 나면 갑옷에 철찰을 다시 꿰매야 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철갑 다음으로 많이 입었던 갑옷은 피갑(皮甲)인데, 이는 짐승의 가죽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피갑은 철갑보다 방호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무게가 훨씬 가벼워 활동하기 편해서 보병들이 즐겨 입었다. 피갑에는 사슴, 노루, 소, 말, 돼지 등 다양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사슴가죽인 녹피(鹿皮)는 증기로 찌고 오랜 세월 잘 묵혀 여러 겹을 겹치면 철갑보다 방호력이 더 좋아 귀한 재료로 인정받았다. 문제는 가죽을 겹으로 댄 탓에 땀 배출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피갑을 주로 입었던 보병들은 전투 내내 땀에 젖은 갑옷을 입은 채 무기를 휘둘러야 했다.

철갑, 피갑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 갑옷으로는 종이로 만든 지갑(紙甲)이 있다. 지갑은 철갑이나 피갑과 거의 같게 갑찰 부분을 종이로 만드는데, 종이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방호력이 결정되었다. 지갑은 한지 수십 겹을 송진이나 아교 등 자연 접착제로 붙이고 옻칠을 더해 땀이나 비에 노출되더라도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특히 지갑은 철갑이나 피갑에 비해 많이 저렴하고 만드는 방법 또한 쉬워 가난한 병사들이 즐겨 만들어 입었다. 결정적으로 지갑은 철갑이나 피갑에 비해 방호력이 현격하게 떨어져 실전보다 훈련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비단으로 만든 단갑(緞甲)을 비롯해 무명으로 만든 삼승갑(三升甲), 목면갑(木綿甲) 등 다양한 재료로 갑옷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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