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9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9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 368쪽 / 14,000원
1930년대의 여성문화1920년대 도시 고학력층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1930년대에 이르러 숙성되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갔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에 이루어진 세대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영미는 "1930년대 후반이 되면 1910년대 후반에 태어나 3·1운동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일본식 신교육을 받으며 자란 전형적인 식민지 세대가 스무 살이 되니, 이들이 느끼는 나라 빼앗긴 서러움은 그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강도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탈, 봉기, 억압 같은 말보다 카페, 유성기, 단성사 같은 말이 훨씬 익숙했을 것이다"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 세대교체가 가져온 것은 문화충돌이었다. 구세대는 여전히 조선 말기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귀족과 부자의 2세들은 대부분 일본 유학 등을 포함하여 근대화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중간 계층에 속하는 집안의 재능 있고 야망 있는 젊은이들도 그런 교육의 행렬에 가담했다. 이것이 '워너비(wannabe, 추종자)'들로 확산되면서 전 사회적인 '문화충돌'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 현상의 일면을 1930년대 연애문화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연애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1930년대까지도 조선 사회는 연애에 대해 여전히 당혹스러워했다.《신동아》(1935. 5)의 '연애·결혼·이혼 문제 좌담회'에서는 "연애는 조선 사람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수입한 말"로 "일본에서도 사용된 것은 30년 내외"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좌담회에 참석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인은 "맹목적 연애야말로 진정한 연애"라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효석은 《여성》(1936)에 쓴 글 '사랑하는 까닭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사랑 앞에 목숨이란 다 무엇하자는 것일까. 희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격이 일찍이 사랑의 감동을 넘은 때가 있었던가. 나는 사랑 때문이라면 이 몸이 타서 금시에 재가 되어버린다 하여도 겁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원하고자 하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태우소서. 깨뜨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것일까." 한편에서 연애지상주의가 외쳐지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연애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일에 앞장섰다. 이석훈은 《신동아》(1932. 12)에 쓴 '신연애론'에서 "우리가 총역량을 (혁명에) 집중하여야 할 때에 어찌 헛되이 그릇된 연애에다 귀중한 에네르기를 소모할 것이냐! 우리들은 용기 있게 하고 가치 있게 하고 (혁명적) 투쟁과 생존의 무기로써의 연애! 오직 그 연애가 절대로 필요한 것뿐이다"고 주장했다.
연애파와 계급파만 있었던 건 아니다. 실속파, 정사파(情死派), 도피파, 동성애파, 육체파도 있었다. 실속파는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주류를 형성했다. 의사가 신랑감 1순위인 건 193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1934. 7. 11) 만문만화(漫文漫畵)는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장가보내는데, 재산 조사부터 하고 의사가 아니면 시집 안 간다는 것 등, 이것이 뒤틀어진 조선의 표정이다"고 했다. 정사파는 연애의 극단으로서 죽음으로 연애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당시 쥐약은 음독자살의 주요 수단이었다. 도피파는 자살 대신 도피를 택한 이들이었고 동성애파는 19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동성애파에 대해서 전봉관은 "당시 여학생 사이에 만연된 동성연애는 요즘 생각하는 동성애의 성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시절의 동성연애는 상대에 대한 깊은 동정(同情)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교제를 가로막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동정(童貞)이니 순결이니 하는 말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남성은 '가볍게' 연애를 걸었지만 여성은 '심각하게' 연애를 생각해야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사랑을 구걸하다가도 일단 구애에 성공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게 한국 남성이었다. 그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남성에 끌리더라도, 남성을 믿지 못해 동성을 사랑하게 되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결국 여학생이 동성에게 끌렸던 것은 남성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육체파는 육체적 향락을 우선시했다. 육체파는 해수욕장에서 '몸'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1930년대의 잡지에서 해수욕장은 이국적인 장소이자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소개되었다. 결혼은 안 되지만 연애는 가능한 곳이었다. 특히 여성의 반나체 구경이 희소가치를 누렸다고나 할까?《별건곤》(1932. 7)에서 이동원은 "육체미 100%의 여성 해수욕객이 수영복을 입고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면서 슬슬 앞으로 지나가면 현기증이 났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의지가 약하거나 수양이 부족하였다간 순사한테 잡혀갈 행동을 할 정도였다나.
1920~1930년대의 자유연애 바람은 상당 부분 조혼의 결과이기도 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어렸을 때 한 결혼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들은 연애 또는 불륜을 통해 보상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연애는 기혼남들이 처녀를 농락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별건곤》(1930. 2)에는 익명의 한 여성 사회운동가가 그런 현실을 폭로하며 쓴 글이 실렸다. 그녀는 조선의 신문·잡지의 실세들과 기자, 웅변가, 외국에 갔다 온 사람, 인기 스포츠맨, 음악가, 문인 중에 대략 30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70퍼센트는 남의 집 처녀를 적게는 3~4인부터 많게는 10인까지 버려놓은 놈들이라고 폭로했다. 소위 명사라는 사람들이 철없고 단순한 어린 여성들을 흉한 수단으로 꼬여다가 질근질근 깨물어 단물을 빨아먹고는 가래침을 뱉듯이 길거리에다 탁 뱉어버리지만, 그들이 이런 행동은 일반 사회에서 공공연히 묵인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애열풍이 불었던 것은 연애야말로 일제 지배 체제하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이건 육체건 연애는 온전히 두 남녀만의 것이었고 연애에 가해지는 그 모든 굴레와 제약은 인습과 관련된 것이지 일제의 음모나 탄압의 결과는 아니었다.
1930년대의 대중문화1920년대부터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전 세계 모든 상영 영화의 5분의 4를 차지한 것이다. 1925년의 경우, 미국 영화는 영국 시장의 95퍼센트, 프랑스의 77퍼센트, 이탈리아의 66퍼센트를 장악했다. 이러한 추세는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조차 그 추세에서 열외는 아니었다. 왜 일제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압도적 우위를 허용했을까? 이와 관련 브라이언 이시즈 1926년에서 1936년 사이의 식민지 시대 조선의 영화산업을 논하면서 조선총독부가 할리우드 영화 6700편의 검열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고, 이들 대부분이 거의 아무런 수정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고 주장했다. 바꿔 말하면, 할리우드가 조선총독부의 재정에 크게 기여한 의도하지 않은 '일제 협력자'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흡은 쟁점은 일제가 "왜 정치선전을 위해 훨씬 효과적인 일본 극영화를 놔두고 굳이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을 허용했냐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할리우드 영화는 좀 더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양의 우월한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서양 국가처럼 행세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가 제기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가치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1938년의 기록에 따르면 연극과 영화를 보러 다니는 관객은 경성시내에만 하룻저녁에 1만 명가량이나 되었다. 특히 신여성들에게 서양 영화는 패션과 더불어 연애의 실감나는 교과서였기 때문에 그 어떤 불편을 무릅쓰고서라고 '향학열'을 불태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과거엔 영화에 키스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숙였다지만, 이젠 키스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1939년 안석영은 《조광》에 쓴 글에서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가 대중을 타락시키는 것을 '코카인'으로 비유하면서 "나는 이런 미국 영화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노춘은 《영화 연극》 제1호(1939)에 쓴 '영화와 여학생'이란 글에서 "영화가 대중의 생활에 파고든 침투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앞으로 더 하리라고 예측할 수가 있다"며 "우리는 영화에서 배우고 영화와 같이 사색하고 철학한다"고 했다.
《조광》(1937. 12)에 실린 한 영화비평은 영화야말로 가장 "값이 싸고 화려하고 재미있는 오락"이며 "세기의 총아"이자 "현대의 패왕"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오십 전 혹은 삼사십 전으로 세 시간 동안 어여쁜 여배우의 교태와 소름끼치는 자극과 노래와 음악과 춤을 실토록 맛보고 게다가 서양원판 예술을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까 예서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랬다. 무얼 더 바랄 것인가? 게다가 사교권까지 장악할 수 있는 보너스까지 주어진다는 데 말이다. 서양의 새로운 유행을 남보다 빨리 입수하고 활용해야만 앞서갈 수 있는 건 비단 이 시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더욱 강화돼 한국적 삶의 중요한 구성 요건이 되었다. 그것은 결코 '사대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아니 '근대성'이라고 하는 삶의 중요한 경쟁력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말이 나온 건 바로 이런 전투성 때문이 아닐까?
193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는 가요였다. 가요 전문가들에 의하면 1930년대는 대중가요의 전성시대였다.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대중가요를 뜨겁게 사랑했다. 1930년대 초 유성기 음반은 한 해 평균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장유정은 "…… 유성기의 등장이 지니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이른바 '고급의 것'에 대한 금기가 사라졌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며 "고전적 대 대중적, 고급예술 대 저급예술이라는 해묵은 범주 구분은 더는 유지될 수 없었고, 이른바 '고급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음악을 비롯한 대중문화를 무조건 백안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런 범주 구분의 약화와 더불어 문인들이 생계를 위해 대거 신문사에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지식인을 압박하는 식민지적 상황으로 인해 고급예술 진영의 인사들도 대거 대중가요 분야에 뛰어들었다.
레코드 산업의 마케팅 전략도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가수의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을 적극 모집하고 스카우트하는 건 기본이 되었다. 가수선발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고복수(1922~1972)는 4개월간의 맹훈련 끝에 1934년 6월 '타향살이'(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을 내놓았다. 대히트였다. 축음기 보급률이 30만 대를 넘어서던 시점에 단시일에 레코드가 5만 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박찬호는 "조선의 가요 황금기는 이 '타향살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고 했다. 이 노래는 국내보다는 중국 만주 지방으로 간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이 불려졌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여보니 /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
이동순에 따르면 "이 노래만 부르면 가는 곳마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비록 눈물을 한바탕 쏟아낼지라도 만주로 옮겨간 우리 동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달래고, 삶의 고통을 이겨 가는 일에 위로가 되었다. 대개 창가풍의 노래로 세 박자로 엮어진 소절을 느릿느릿 구성지게 풀어가는 고복수의 노래는 저녁나절 일정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라디오 소리로 들을 때 가슴속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슬픔 따위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고 했다. 고복수는 가는 곳마다 울음바다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여성 팬들을 거의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기생들은 고복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가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고복수가 여관에 들면 여성 팬들의 전화공세로 전화통에 불이 났고, 고복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손수건에 혈서로 사랑 애(愛)자를 써 보낸 팬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슬픈 가요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만요(漫謠), 오늘날의 '코믹송'도 꽤 인기를 끌었다. 1938년 2월 김정구는 '눈물 젖은 두만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서방 연서'(김진문 작사, 박시춘 작곡)라는 만요를 내놓았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어 /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 명월하고 살아서 왕서방 죽어도 괜찮다 …….
김정구는 이가 빠진 중국인 분장을 하고 바보 같은 제스처로 세태를 풍자함으로써 최고 인기가수로 솟아올랐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의 대표곡이자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지만, 당시 흥행에 성공한 건 '왕서방 연서'였다. 어린이들도 "띵호와 띵호와" 하고 떠들며 부를 정도로 대박이었다.
한국인들이 노래를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유전자 탓인 것 같다. 개화기 선교사로 조선에 왔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한국인들은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어린이들까지도 길에서 늘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김광해가 1925년에서 1945년 사이에 유행했던 가요 437곡을 내용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울다'라는 동사는 전체 437곡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213개의 노래에, '눈물, 사랑'이라는 명사는 3분의 1에 가까운 노래들에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의 소비문화1930년대 들어 '소비문화의 전시장'인 백화점의 유행선도 기능은 더욱 강해졌다. <경성일보> (1930. 2. 16)는 "1930년의 경성은 실로 백화점 시대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저절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백화점들을 지원했다. 총독부는 특히 백화점업계의 선두 주자인 미쓰코시에게 '일본문화의 보급'이라는 역할을 기대했다. 1932년 백화점을 관찰하고 쓴 이상의 시(詩)엔 '마르세이유의 봄을 떠난 코티의 향수를 맞는 동양의 가을'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백화점은 고급스러운 동시에 이국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별천지처럼 여겨졌다.
조선 상인들은 그렇게 '첨단'을 달리는 백화점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백화점의 압도적 우세가 분명해진 가운데 경쟁은 일본 백화점과 조선 백화점 사이의 경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고물장사로 큰돈을 번 최남은 서울 기독교청년회관 옆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을 짓고 동아부인상회를 동아백화점으로 개명하였다. 바로 옆의 화신상회는 박흥식(1903~1994)이 인수해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하고 1932년 5월 화신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하였다.(1937년 11월에는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르네상스식 새 건물을 지었다.) 박흥식은 지물업으로 돈을 벌었는데 그의 사업의 전기(轉機)가 된 것은 6·10 만세운동이었다. 민족감정이 한껏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그간 일본 도매상에서 사던 신문용지를 박흥식의 선일지물로 바꿔서 사면서 이후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 사이의 경쟁은 치열했다. 그러나 동화백화점은 선진적인데다 대담한 상행위를 선보였던 박흥식의 공세에 밀려 화신백화점에 흡수 합병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