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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전쟁 잔혹사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입시전쟁 잔혹사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 352쪽 / 13,000원



매관매직과 과거제의 타락



권문세가 자손의 족집게 과외


오늘날의 수능시험처럼 시험의 출세도구화와 사교육 문제는 이미 조선조 초기부터 극성을 부렸다. 『세종실록』은 세종 12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과거시험에 나올만한 글이다 싶으면 다 베껴서 차고 다니며" 극성스럽게 외우지만, "열심히 글을 읽는 사람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도리어 멸시를 받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과거시험 지향적 풍토로 인해 권문세가의 자손들은 사설 학당이나 개인과외를 통해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이는 요즘 성행하는 '족집게 과외'의 원조인 셈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자 또한 극심한 서울 편중 현상을 보였다. 이원명의 연구에 따르면, 1789년 정조 시대에 서울 인구(18만 9,153명)는 전국 인구(740만 3,606명)의 2.55%에 불과했지만, 서울 출신이 문과 급제자의 43%를 차지했다.

'족집게 과외'뿐만 아니라 '치맛바람'의 기원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어머니들의 권력은 아들을 '큰 사람'으로 만들 때에 획득될 수 있었다. 이때 어머니가 누린 권력은 남성 권력에 의존하는 '기생 권력'이었다. M. 울프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이고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조혜정은 이와 관련, "남편의 가정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 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해간다. 자궁 가족 내에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며느리가 포함되며 남편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들을 출세시키는 것을 존재 근거로 삼는 자궁 가족의 기본 구조는 2000년대에까지도 그대로 살아남아 어머니는 입시전쟁에 참전하는 자녀의 감독관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출세(出世)라는 개념의 탄생

조선 민중이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은 일본이 1911년부터 시작한 '토지조사사업' 때부터였다. 토지조사사업은 그동안 불법이었던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조선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고향을 등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은 농민들에게 서류와 더불어 글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글과 어려운 개념을 잘 몰라 억울하게 당한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없어진 상황에서 교육구국운동은 개인과 가문의 번영을 위한 각개약진(各個躍進) 운동으로 변질되었으며, 일제는 이 점을 노려 조선인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친일화 공작을 추진했다. 세속적 성공을 뜻하는 출세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친일파 지식인이 적극 육성되던 1920년대 중반부터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 대한 교육을 억누르고 식민지 지배의 효율화를 노려 1924년 5월 총독부령으로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을 설립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요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이 많이 쓰는 '여보'라는 말에서 나온 이 말은 '조센징'보다 좀 더 풍자적이고 무시하는 뉘앙스를 갖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은 '요보'의 굴레를 뛰어넘을 수 있는 특별한 위치를 점했다. 광복 이전까지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으며, 35년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810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출세의 등용문인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경성제대는 조선인들 사이에 출세 경쟁을 유발하는 효과를 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사상적 검증까지 거쳐 그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간 조선인은 출세의 '보증수표'를 거머쥔 셈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후에도 각 부문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교육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교육출세'의 확산이었다. 해방 전 일본인들의 몫이었던 고급 일자리는 해방과 함께 조선인들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친일파건 뭐건 따지지 않고 학벌 중심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교육이 출세의 지름길'임을 드라마틱하게 확인한 대사건이었다. 학력과 학벌은 면죄부로서의 기능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오욱환은 "해방 후에도 친일 경력 한국인 지배집단이 여전히 특혜를 받는 현상을 지켜봄으로써, 한국인들은 학력이 면죄부 역할까지 하는 또 하나의 위력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도망 다니던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친일 부일 인사들은 자녀들에게 높은 학력을 성취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경제적 특권을 후손들에게 대물림하였다.

1950년대 상아탑은 우골탑



이승만 시대의 관존민비(官尊民卑)


해방 후에도 조선시대의 관존민비는 여전했다. 관(官)으로의 진입은 곧 출세를 의미했다.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고시에 합격해야만 했다. 1949년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고등고시령' 및 '보통고시령'이 제정 및 공포되었다. 1950년 1월16일 제1회 고등고시가 실시된 이래로 고시 합격은 대학생들의 꿈이 되었고 대학은 권력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1950년대는 관존민비가 최악의 형태로 노정된 시대였다는 점도 교육열을 부추겼다. 어린 학생들은 대통령과 각부 장관 등 주요 관료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워야만 했다. 이런 이상한 교육관행으로 강화된 관존민비 풍토는 공직사회밑바닥까지 파급되었고, 그로 인해 공직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띠게 되었다.

6 25 전쟁 중에도 3부제, 4부제 수업까지 해가면서, 한 학급에 100명 이상 수용하는 것도 불사해가면서도 교육은 계속 이루어졌다. 서울의 대학들은 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도 문을 열었다. 1951년 2월18일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이 연기되는 조치가 취해지자 징집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생 수가 무서운 속도로 늘어났다. 또한 1950년대 내내 대학은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했기 때문에 온갖 부정이 난무했다.

당시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계급투쟁이자 권력투쟁이었기 때문에 온갖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다. 1957년 서울시 교육 위원회는 이류, 삼류 고등학교에는 지원학생이 없어 교실이 비는데도 불구하고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 세칭 '1류' 학교엔 학급증설을 허용했다. 특권층과 영합해 동일계 중학교 졸업생을 전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특권층은 청탁 등의 수단으로 자기 자식들을 일류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교육정책은 철저히 '1류' 위주로 돌아갔다. 미국 교육 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도 일류 대학이었다. 외국 원조는 1957년 서울대 예산의 50%에 육박하기까지 했다. 기독교 재단이며 미국통이 많은 연세대와 이화여대도 원조자금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1945년대에서 1960년대에 초등학교 학생 수는 136만 6,024명에서 359만 9,627명으로 2.6배 증가했고, 중학생 수는 5만 343명에서 52만 8,614명으로 11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고등학생 수는 8만 4,363명에서 26만 3,563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출세는 학력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절반 이상이 취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들어가려면 일류 대학을 나와야 했다. 논밭과 소를 판 돈으로 대학을 다닌 농부의 자식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은 극소수였고 다수는 고등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농부들의 주머니를 터는 대학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상아탑에 빗대어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960년대 '치맛바람'과 KS마크 병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개발의 모델은 '자궁 가족'의 경쟁의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벤필드가 남부 이탈리아를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라는 개념은 사회적인 가치는 결핍되어 있는 반면 가족 간의 결속을 조장하는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데, 그게 바로 6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한 가치였다. 자식의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 전쟁의 지휘권은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자식을 일류 학교에 보내는 것은 훈육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일종의 '정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치맛바람'이다.

일류 대학은 일류 고등학교 출신들이 거의 독식했기 때문에 경쟁은 중학교 입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5대 공립(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이니, 5대 사립(중앙, 양정, 배재, 휘문, 보성)이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국민학교 과외수업도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1976년 10월 부산에서 일어난 과외공부 어린이 피살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다. 국민학교 5학년생이 밤 10시경 과외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피살당하자 '과외공부 광풍(狂風)'에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일부 교사와 교장들이 과외공부 그만하겠다는 결의대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경기중고등학교와 같은 최정상의 학교에 들어간 극소수의 승자는 큰 영예를 누릴 수 있었지만 대다수는 패자(敗者)가 되었고 사람에 따라서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KS(경기고-서울대)마크 병'이라는 게 생겨났다.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어린 국민학생들이 벌이는 치열한 전쟁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결단이 마침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내려졌다. 그것은 바로 1968년 7월15일에 발표돼, 1969년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중학교 무시험 추첨배정제였다. 1969년 2월5일 서울의 어린이들은 은행알을 넣은 수동식 추첨기를 뺑뺑 돌려 학교를 배정받았다. 그래서 이들을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다.

1970년대 고등학교 평준화 조치

1969년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중학교 무시험 추첨배정제는 1970년에는 다른 대도시로,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고등학교 평준화정책이 추진되었다. 실업계 고교는 학교별로 경쟁 입학을 허용하되, 일반(인문)고등학교는 총인원을 선발하여 추첨 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평준화정책은 1974년 서울과 부산, 1975년에는 대구, 인천, 광주에서 시행되었다. 평준화정책에 대한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1975년 10월 한국사학재단연합 및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는 평준화 시책에 강력 반발했으며, 격렬한 찬반논의가 국회에까지 비화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한국교육개발원에 평가를 위촉하였고 결과는 긍정적인 것으로 나왔다. 고교평준화는 1979학년도에 대전,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춘천, 제주 등 7개 도청소재지로 확대되었다.

고교평준화 조치는 세칭 일류 명문고를 없애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70년대 후반부터는 거주 지역중심의 새로운 명문고들이 생겨났다. 1976년 3월 경기고의 강남 삼성동 이전을 시작으로 1978년 휘문고, 1980년 숙명여중고와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배재고, 창덕여고, 정신여고, 경기여고 등 여러 강북 명문고들이 정부의 강권에 따라 혹은 자발적으로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교육행정 관할구역상 8학군인 강남은 한국의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이라 할 '대학입시 전쟁'의 선봉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행복은 성적순이다



'해방 후 최대의 교육개혁'


고교평준화는 1980학년도에 성남, 원주, 천안, 군산, 이리, 목포, 안동, 진주 등 8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평준화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지만 학교교육 외면과 과외 열기 심화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과외비 지출로 인한 가정경제 압박이 심해 70년대 말부터 '과외망국론'이 등장했으며, 어린이 정신질환이 늘고 있다는 보고까지 나왔다. 1979년 12 12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집권한 신군부는 민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시도도 병행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긴 했지만 과외 금지 및 대학의 졸업정원제를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7 30 교육개혁안'도 그런 취지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교육학자나 교육평론가들은 7 30교육조치를 '교육쿠데타' 혹은 '교육 테러'라고 혹평했지만, 과외비 부담으로 고통 받는 가정이 많아 과외폐지 조치는 국민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었다. 당시 문교부 관련 교육연구기관에 의해 발표된 과외경비 내역에 의하면, 개인 및 집단과외 비용으로 연간 2조 1,000억 원이 지출되었고, 학원비로는 1조 1,000억 원이 지출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정부예산의 6%를 차지하는 금액이었고, 교육예산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80년 8월7일부터 과외 단속 지침이 시행되었는데, 개인 및 집단 과외 금지와 학교 보충수업 폐지가 주요 내용이었다. 불법 과외에 대한 응징은 단호했다. 과외 받은 사실이 적발된 재학생은 정학 혹은 퇴학조치를 받았으며, 그 학부모를 직장에서 면직시키는 한편 가르친 대학생을 구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같은 가혹한 조치도 과외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대학입시는 '계급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 내내 단속을 피해 과외를 하는 '몰래바이트'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몰래하는 '도둑 과외', 시간과 장소를 바꾸는가 하면 자정부터 새벽까지 하는 과외도 성행해 '올빼미 과외'라는 말도 나왔다.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오가며 하는 '고속도로 과외', 산장 등 으슥한 곳에서 하는 '합숙 과외', 과외 선생이 학생의 형이나 오빠를 가장한 '입주 과외' 등 다양한 유형이 등장했다.

입시학원의 대호황

1989년 2월 정부는 대학생들의 비영리과외를 전면 허용하고 중 고교 재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문교부의 대학생 과외 허용 조치의 목적은 명시적으로는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 조달 기회 제공"이었지만, 묵시적으로는 "대학생들의 현실 불만 해소책"이었다.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은 학생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명문대 재학생은 1주일에 두 시간씩 한 두 차례 과외 교습을 하고 매달 20만~50만 원의 보수를 받은 반면, 비명문대 재학생은 10만~20만원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과외자리도 얻기 어려웠다.

과외허용 조치로 과외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입시학원들은 80년대 내내 누려보지 못한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학원가에서 떠돌던 이야기에 의하면 인기강사라면 일 년에 몇 억을 벌었고, 다른 학원에서 모셔갈 때는 몇 천만 원의 선금까지 안겨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준입시학원들도 생겨났다. 그 대표격이 '속셈학원'이었는데 이들은 과외 수요의 증대와 함께 교습비 부담이 적은 '서민형 과외'를 겨냥했다. 이에 비해 강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생긴 고시학원이나 외국어학원들은 준입시학원이기는 했지만 과외 수업료가 속셈학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강남의 8학군 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1989년 5월에 발표된 제1차 서울시교위가 상정한 고등학교 학군조정 방안은 8학군 문제가 "사회 계층 간의 갈등과 교육의 불균형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으며 "8학군에 대한 교육적 프리미엄이 사회적 위화감과 부동산투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8학군 육성회비 비리도 심각했는데, 강남의 교사들은 학급당 많게는 400만 원씩 걷히는 막대한 찬조금을 '교육현장의 지하경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중산층은 '계급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어떤 비리와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감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90년대 남을 제치고 이겨야 산다

한국의 대학 경쟁을 가리켜 흔히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사적 표현 이상의 것이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심지어 친구조차 사귀지 말고 공부하라고 주문했다. 1990년대는 바야흐로 과외묘기대행진의 시대였다. 1991년 강남에선 이른바 '족집게 과외', '찍기 과외'가 기승을 부렸으며, 1992년에는 '입시 군대'라는 것도 나왔다. 고교 1,2년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군대식 입시학원에 입주해 숙식을 하면서 엄격한 규율 속에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사회 각 분야 엘리트 집단이 세칭 일류 대학 출신자들에 의해 거의 독점돼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은 '허영과 자기과시욕' 이상의 것이었다. 연세대 발전위원회가 경영컨설팅사인 매킨지에 의뢰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92년 매출액 상위 40대 기업의 임원중 서울대 출신이 493명(41.9%)으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 124명(10.7%), 고려대 120명(10.2%) 등이었다. 언론은 이런 현상에 대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조차 일류대 출신들에 의해 장악돼 '학벌주의의 총본산'으로 드러났다. 1988~1991년 신입기자 가운데 서울대 출신은 『조선일보』의 경우 75.8%였으며, 『동아일보』는 51.2%였다. 명문대학 이외의 대학 출신자 비율은 『동아일보』는 9.3%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선일보』의 경우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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