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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답하다

김영수 지음 | 알마
난세에 답하다

김영수 지음

알마 / 2008년 12월 / 440쪽 / 19,800원



제1부 사기의 탄생




사마천의 고향은 하양(오늘날의 섬서성 한성시)에서도 고문원촌으로 '용문龍門'이라고 불렸다. 용문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황하가 흘러내려오다 5분의 3이 끝나는 지점이다. 물살이 세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렵지만 급류 오르기에 성공하면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해서 용문이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태사령(정부의 문서를 보관하거나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던 아버지 사마담을 따라 황제 무제의 명으로 19세가 되던 해 장안으로 이주했다. 역사가가 되고 싶었던 사마담은 아들에게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길러주기 위해 사마천이 20세 되던 해에 여행을 권유했다. 2, 3년에 걸친 여행은 사마천에게 『사기』 저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28세에 녹봉 300석을 받는 낭중이 되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 후 36세 무렵, 사마천은 산동성 태산에서 열리는 봉선제(가장 큰 행사로 황제의 절대 권력을 봉-하늘, 선-땅을 통해 천하에 과시함)에 참가하기 위해 가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는다. 사마담이 봉선제에 참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학자들과 방사들이 절차를 두고 싸우는 통에 한무제가 마음 맞는 방사들 몇 명만 데리고 가자 화병으로 눕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잃고 38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태사령에 올라 42세 때에는 한 해가 10월부터 시작되는 전욱력 頊曆의 개정을 맡아 1월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태초력을 완성했다. 사마천은 49세의 나이로 자신의 남성을 자르는 궁형을 자청하게 된다. 그 사건의 발단은 한나라의 라이벌인 흉노였다. 한무제는 흉노와의 대외관계를 대흉노 정책으로 정하고 흉노정벌에 나섰다. 무인 집안 이릉 장군이 5,000결사대를 이끌고 나가다 장수들의 알력으로 적진에 고립되고 말았다. 한나라 조정은 이릉을 성토하게 되었다. 이때 사마천은 이릉을 두둔하고 변호했다. 그리고 군 최고 사령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는데 한무제의 애첩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 장군이 바로 최고 사령관이었다. 이로 인해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혔다. 당시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는 속전이 있었고 다른 방법은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궁형이었다. 사마천은 큰 돈이 없었기에 궁형을 택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는 50세에 풀려나 황제 옆을 따라다니는 중서령(비서실장)직을 맡았다. 42세 이후 본격적으로 『사기』 편찬에 들어간 후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했다.

제2부 와신상담의 변주곡 오월춘추



《사기》에도 역사의 드라마틱한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그 대표 격이 와신상담이다. 이것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와 월나라 왕 구천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구천에게 패했다. 합려는 부상을 당해 아들 부차를 불러 아비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가시가 많은 섶에 누워 자며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다. 부차가 와신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구천은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월나라의 수도 회계마저 포위되고 결국 회계산에서 농성하다 항복하고 만다. 구천과 신하 범려는 3년 동안 부차의 종이 되고 구천의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었다. 또한 구천은 중국의 4대 미녀 가운데 한 명인 서시마저 부차에게 바쳤다. 그리고 부차가 서시에게 빠져 있는 틈을 타 월나라가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고는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월나라로 돌아왔다. 그 후 구천은 침상 곁에 쓸개를 매달아놓고 항상 쓸개를 핥으면서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구천의 상담은 20년에 걸친 철저한 재기의 몸부림으로 승화되어 결국 또 하나의 역전 드라마를 연출한다. 오나라 부차가 제나르를 공격하는 등 온통 중원의 대권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틈을 타 오나라를 항복시켰고 부차는 오자성에게 면목이 없다며 자신의 얼굴을 천으로 덮게 한 다음 자살한다. 그와 함께 오나라도 멸망했다.

오나라가 망한 기원 470년을 기점으로 춘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다. 춘추시대의 오패에 대해 알아보자. 춘추오패의 첫 번째 주자는 제나라 환공桓公이다. 제나라 환공 때 유명한 인물로는 관중과 포숙이 있다. <관안管晏 열전>에 나오는 관포지교의 주인공들이다. 두 번째 주자는 진晉 나라 문공文公이다.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秦나라와 다른 나라이다. 세 번째 주자는 바로 진秦나라 목공穆公이다. 네 번째는 초나라 장왕이고 다섯 번째는 오월춘추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오나라 왕 합려였다.

제3부 천하를 통일한 진제국의 비밀



진시황의 무덤에서 나온 병마용갱이 있다. 줄여서 진용秦俑이라고도 부른다. 흙으로 빚어 만든 진나라 인형이란 뜻으로 주로 병사와 말이 나왔다. 현재 구덩이가 세 개 발견되었으며(1호-보병, 2호-기병과 보병, 3호갱-사령부) 지금까지 약 8,000구의 병사가 출토되었다. 병사들 손에 들려있는 무기 등 유물은 약 10만점에 달한다. 제왕들은 즉위하자마자 무덤을 조성했다. 진시황릉도 마찬가지이다. 13세에 즉위하여 49세에 세상을 떠난 진시황은 37년 동안 공사를 한 셈이다. 전국에서 이송되어 온 인부와 죄수 70만 명을 동원해 여산驪山자락에 우물 세 개 정도의 깊이로 파고 무덤을 조성했다. 진시황의 작은 아들 호해는 제왕이 죽으면 모시던 비빈이나 궁녀 가운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으나 모두 순장(생매장)했고 무덤을 만드는 데 동원된 장인과 기술자들 모두를 무덤 안에 둔 채 밖에서 봉쇄하여 나오지 못하게 했다. 진시황릉 한 변의 길이는 약 500미터 정도로 추정된다. 지하 궁전의 길이는 동서 260미터, 남북 160미터, 우물 세 개의 깊이는 약 30미터로 추정된다.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한 후 기원전 221년 38세 때에 천하를 통일했다. 전국 7국의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했다. 수레바퀴의 지름과 바퀴 사이의 축도 규격화했다. 수도 함양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치도馳道'를 닦았다. 44세에 불로장생약 추구가 심해졌다. 그는 대제국을 다스리는데 늘 고민을 했고 여러 차례의 암살 기도 사건들로 극도의 신경과민에 시달렸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상태에 예민해져 불사약과 특별한 처방을 갈구했다. 진시황은 장생불사 약을 구하기 위해 다섯 번째 순행에 나섰다가 귀환하는 길에 쓰러져 죽었다.

제4부 세상을 꿰뚫는 《사기》의 통찰력



비운의 영웅 항우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고사성어를 들라고 하면 흔히 패왕별희나 사면초가를 떠올릴 것이다. <항우본기>를 보면 진秦나라를 무너뜨린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이 기원전 203년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5년간에 걸친 패권 전쟁을 일단 멈추었다. 자신을 보좌하던 최고의 참모 범중을 잃는 등 전세를 역전당한 항우의 휴전제의를 유방이 받아들였다. 항우는 자신이 정한 도읍인 팽성을 향해 철수 길에 올랐다. 유방도 서쪽의 한중으로 철수하려던 차였다. 하지만 장량과 진평 등은 유방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에 유방은 항우를 추격하여 해하에서 한신이 지휘하는 한나라 대군에게 항우가 포위당했다. 항우의 초나라 진영은 중과부적에 군량미마저 바닥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한밤중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 노랫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앞을 다투어 도망쳤다. 장량의 심리전이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항우도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정복한 줄 알았다. 항우의 연인 우희는 항우의 보검을 뽑아 자결했고 항우는 800여 기병을 이끌고 준마 추騶를 몰아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강동으로 건너갈 수 있는 오강烏江에서 권토중래를 권유하는 부로들의 요청을 뒤로한 채 스스로 자결했다. 기원전 220년, 그의 나이 31세였다. 유머리스트를 위한 헌사 <골계 열전>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사람은 동방삭東方朔이다. 동방삭은 나뭇조각이나 대나무 조각에 쓴 글을 수레에 실어 한무제에게 올렸다. 이런 수레를 공거公車라고 하며 수레에 실린 상소문 따위를 공거서公車書라고 한다. 이 때문에 공거라는 관청이 따로 생겨 백성이나 신하의 상소문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동방삭은 무려 수레 세 대 분량의 글을 한무제에게 올렸다. 한무제는 동방삭을 발탁하여 요직을 맡아 바쁘면 자신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을까봐 승진시키지 않고 늘 곁에 두었다. 동방삭은 한무제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서운했지만 무제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모셨다.

제5부 살아남는 자와 사라지는 자



사마천은 이 시대의 생존방식을 개혁이라는 커다란 명제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요컨대 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살아남았고 개혁에 실패한 나라는 사라졌는데 개혁을 행동으로 옮긴 지도자는 춘추오패나 전국칠웅으로 존중받았고 그러지 못한 군주는 오명을 남겼다. 당시 개혁의 요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국강병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왜 개혁을 요구했는가.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매우 강렬하고도 급작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제후국은 서로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사士라는 계층이다. 통계에 따르면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800여개 나라였다. 주나라에는 천자가 있고, 천자의 아들이나 공신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제후로 삼았다. 이를 분봉이라 하며, 이런 분봉시스템을 봉건제도라고 부른다. 주 왕실 천자의 아들이 분봉 받으면, 후侯가 된다. 그런 후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제후諸侯이다. 제후의 다음세대에도 다시 분봉이 이루어지는데, 기본 원칙은 큰 아들이 제사를 비롯한 가장 핵심이 되는 의례와 권위를 가지는 대종 곧 적장자嫡長子 우선이었다. 분봉이 이어질수록 주나라의 혈연관계는 흐려졌다. 주 왕실에 대한 제후의 충성심이나 책임감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대종이 힘이 없으니 대종에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제후국은 결국 독립한 나라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 무려 1,800여 개의 제후국이 춘추전국시대 초기로 들어오면 제후국은 24개만 남는다. 다 망한 것이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삼키고 합병한 것이다.

개혁의 시대로 불리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위나라가 먼저 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주인공은 위魏나라 문후文候(재위 기원전 445-396년)였다. 문후의 이름은 위사魏斯로 전국 시대 최초의 개혁 군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빛나는 부분은 인재기용이었다. 그중 이회는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현재 남아있지는 않지만 중국 사상 최초로 성문법 법전인 《법경法經》을 남겼다. 그는 법에 의해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기조로 개혁 정치를 한 인물이다. 또한 땅을 최대한 활용해서 생산량을 정확하게 가늠하고 생산량에 맞추어 곡물 가격을 정했다. 생산과 물가를 동시에 고려한 경제 안정책이었다. 쌀 때 사들였다가 물가가 오를 때 팔아 농민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했다. 당시는 경제활동 가운데 농업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수매는 물가 안정책으로서 대단히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 한사람으로는 오기가 있다. 오기는 군사전문가이자 개혁 전문가였다. 제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노나라 임금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제나라 출신 아내까지 죽인 비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기는 위나라 출신으로 자신에게 모욕을 준 사람을 무려 30여명이나 죽이고 지명수배를 받자 노나라로 건너갔다. 그 뒤 위나라로 갔다가 마지막에 초나라로 갔다. 오기는 위나라로 건너오자 문후는 이회에게 오기에 대해 물었고 이회는 군사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추천했다. 오기는 위나라의 군사 분야를 맡아 호시탐탐 위나라를 노리던 진나라를 막았다. 오기가 위나라 군대를 맡아 치른 전투는 무려 일흔여섯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한 번도 폐하지 않고 예순네 번 이기고 열두 번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의 특징은 솔선수범이었다. 행군할 때면 병사들과 똑같이 짐을 졌고 잠을 잘 때도 먹을 때도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병사들도 오기를 존경하고 신뢰하게 되었고 그것이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힘이 되었다.

조趙나라 초기, 무령武靈왕(기원전 340-295년)이 실시한 개혁정책 특징 중 하나는 상하 위계질서와 세대 간 갈등을 조화시켰다는 점이다. 무령왕은 노련한 구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받아들였다. 개혁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옳은 길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실시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발 심리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서두르다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개혁을 추진하며 화해와 설득을 아울러 돌아봤던 무령왕의 개혁마인드는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제6부 통찰의 인간 경영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그린 이상적 인간관계란 어떤 것일까. 인간관계의 최고 경지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우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기》에서 우정을 다룬 이야기는 많다.《사기》에서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정을 대변하는 고사성어로 인정받는다. 죽음도 불사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 허물없이 막역한 '막역지교莫逆之交',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시절의 '포의지교布衣之交'도 유명하다. 가장 부족한 부분이 《삼국지》를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두고 한 말이 있다. '수어水魚之交'이다. 물과 물고기 같은 사이라는 뜻이다. 제갈량과 유비 사이는 이와 같은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면 우정의 최고 경지는 무엇일까. '지음知音'의 경지가 있다. 지금의 장강 중류 지방, 즉 호북성 지역에 위치한 초나라에 백아伯牙라는 고상한 귀족이 살고 있었다. 백아는 거문고를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백아가 숲 속 골짜기에서 혼자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백아는 바람소리, 물소리,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빗소리, 폭풍우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거문고로 연주했다. 그런데 그때 우연히 젊은 나무꾼이 지나가다 "음악소리가 고산유수로구나!" 하며 감탄했다. 연주분위기가 높은 산, 흐르는 물과 같다는 뜻이다. 격정적이었다가 어느새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고 유창해지는 연주의 전체 분위기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백아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첫 연주의 제목을 '고산', 두 번째 연주의 제목을 '유수'로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백아의 음악 세계를 단번에 알아본 젊은 나무꾼의 이름은 종자기鐘子期였다. 이후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지음'의 경지에서 서로 노니는 우정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백아가 벼슬을 받아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백아는 집보다 종자기를 먼저 찾았다. 그런데 종자기가 가난과 병으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아는 슬픔을 못 이겨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종자기를 애도했고 이후 다시는 거문고 연주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다'라는 뜻으로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전국시대 말 위魏나라 대량 출신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있다. 두 사람은 교육수준도 다르고 직업도 달랐지만 서로 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훗날 원수지간이 되었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혼란에 빠졌다. 장이와 진여는 바로 그 무렵 젊은 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후에도 지방의 명망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장이와 진여도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진시황은 두 사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법 밖에서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권세가를 혼내주는 유협遊俠을 위험인물로 규정하여 제거해나가는 통일 진제국 정책의 일환이었다. 유협들은 그 뒤 한나라 때데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두 사람은 진陣이라는 곳으로 도망쳐 성문 문지기로 숨어 살며 10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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