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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우크라이나

허승철 지음 | 뿌쉬낀하우스
나의 사랑 우크라이나

허승철 지음

뿌쉬낀하우스 / 2008년 12월 / 365쪽 / 18,000원



여행을 준비하며




우크라이나와의 인연 : 남녀 관계에서도 먼저 첫인상에 호감이 가야 연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듯이, 첫 만남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면 이렇게 급속히 연애감정이 생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 나라가 크고 학문적 중요성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관심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의 개인적, 학문적 관심이 감성적 느낌에 근거해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슬라브 문화의 발상지이고,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미국, 유럽, 러시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소련 시대 중공업 중심지로 성장했고, 핵무기를 180기나 보유하고 있던 곳이다. 광활한 국토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엄청난 농업 생산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인구가 1억4천만이고,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4천6백만이다. 중앙아시아 전체 인구가 6천2백만 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내수 시장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한 나라에서 팔리는 우리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는 중앙아시아 전체를 합친 매출량보다 크다. 문학과 예술 등 문화 수준도 매우 높다. 인구 350만인 수도 키예프에 주말이면 약 200개의 공연이 열린다. 대사관 앞 오페라극장에는 아이다, 투란도트, 백조의 호수 등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공연이 한 달에 20여 편 올라온다.

또 이 나라에는 3만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지만, 1만에서 2만 명 정도의 고려인이 국적을 얻지 못한 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어 우리 민간단체와 NGO가 할 일도 많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외모도 뛰어나고, 당장 돈은 없어도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큰 신랑감이나 마찬가지니 배필을 찾는 여자의 입장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대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들 몰리는 데는 너나없이 정신없이 뛰어가고, 관심 없는 곳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우크라이나 전문가는 국내에 아직 단 한 명도 없고, 대통령 통역을 할 사람도 없다. 지역학은 한참 인기가 올라간 다음에 시작하면 늦고, 10년 정도 앞을 내다보고 미리 공부를 해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한 번 젊음을 걸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인연을 추적하려면 어떻게 나의 공부가 우크라이나까지 연결되었나를 먼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당시 실험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부제를 택한 고려대에서는 신입생들에게 완전한 전공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는데, 주위 친구들 대부분은 2학년에 올라가면서 영문학 전공을 선택했다. 나는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간다는 생각 하나로 교양 러시아어 수업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노어노문학 전공을 선택했다. 내 기억으로는 190명 어문학부학생 중 약 130여 명이 영문학으로 몰렸고, 노문과를 택한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재학 중 노어노문학 분야 국비유학생 선발 공고가 났고, 두 명 뽑는 시험에 다행히 붙어서 1983년 브라운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브라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로 박사과정 때 전학을 하였지만, 내가 원하는 주제로 박사 논문 쓰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2년 뒤 다시 브라운대학으로 돌아와 나머지 과정을 이수하고 슬라브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130여 소수민족의 언어동화과정을 통계적 기법을 이용해 분석한 것이었는데, 이 논문에 우크라이나인과 소련인 거주 고려인들의 언어동화과정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8년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교 러시아연구소(현 Davis Center for Russian Studies)의 연구 Fellowship 자리에 큰 기대를 않고 지원을 했는데, 운 좋게 선발이 되었다. 지원할 때 연구계획서를 내기는 했지만, 연구소 생활 자체가 완전한 자유라서 96개나 된다는 하버드대학의 여러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도 마음대로 읽었고, 하버드 스퀘어 뒷골목의 카페에 앉아 사색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 진행중이어서 수많은 러시아 석학들이 와서 연일 특강이나 간담회를 했다. 하루 서너 차례 진행되는 발표에 가서 앉아 있기만 해도 배우는 것이 참으로 많았다. 러시아연구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미국의 우크라이나계 이민들이 기금을 모아서 세운 우크라이나연구소(Harvard Ukrainian Research Institute, HURI)가 있었다. 규모는 러시아연구소보다 훨씬 작고 학술 행사도 적었는데, 저명한 우크라이나 역사학자인 오멜리안 프리착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내서 프리착 교수의 우크라이나 역사 수업을 청강했다. 슬라브어학과에서는 조지 그라보비치 교수가 우크라이나 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이 수업은 듣지 못하고 대신 우크라이나어 수업을 들었다. 1988년 이 두 수업을 듣고 우크라이나연구소의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첫 접촉이 된 셈이다.

하버드대학에서 약 반 년간 소련 방문을 준비한 후, 1990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언어학연구소와 상트 페테르부르그대학(당시 레닌그라드대학) 초청으로 주미 러시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러시아로 들어갔다. 가족을 서울에 데려다 놓고 6월 초 대한항공을 타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미국에서 7년을 보내고 바로 소련으로 온 나는 전공학자로서 양대 초강국을 직접 눈으로 보며 비교하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 진행으로 상점이 텅텅 비고 사회가 혼란스러웠지만, 사람들의 심성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깊이가 있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새로운 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에 일어난 다양한 변화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격변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통과하며 살아온 일반 사람들과 나눈 많은 대화가 후에 외교관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또한 학문적 열정이 크고 감수성이 예민하던 젊은 시절에 소련의 변화와 체제 붕괴를 보면서 한국과 미국, 소련 체제와 사회 질서, 국민성, 지도자의 역할 등에 대해 자주 비교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큰 사건이 나면 이런 상황을 미국 사람들이나 러시아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 나갈까 하는 상상도 많이 해 보았다. 내 사고 방식과 정서에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국과 슬라브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한다.

특임공관장 지원과 임용 :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정부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개방형 임용 제도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공관장 자리에도 민간 전문가나 타 부처 전문 인력을 발탁할 계획이라는 얘기가 언론에 종종 흘러나왔지만 어떤 방식으로 충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KOTRA의 기연서 본부장이 칠레 대사로 발령이 되고, 상해 총영사에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 씨가 임명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12월 초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최대 30%까지 외부 인물로 공관장을 임용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다시 나왔다. 나는 어떻게 되는 사정인지 알아나 보자는 생각에, 미국에서 같이 공부한 정부 인사를 오랜만에 연락해서 만났다. 점심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 조심스럽게 최근에 우크라이나 연구에 집중하며 인맥을 만들어 왔는데 공관장 임용에 지원을 할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면담 후 며칠이 지나자 혹시 필요할 수도 있으니 이력서를 작성해서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력서를 제출한 뒤 두 명의 전직 주한 대사에게 나에 대한 평가들을 담은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했다. 사실 나는 정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이 지냈고, 그 흔한 위원회 활동 한번 하지 않았다. 후에 대사로 임용된 후에 나의 임명 배경에 대해 여러 얘기가 오간 것으로 들었는데, 개방형 대사 제도를 실시하면서 순수하게 지역 전문가를 시험적으로 발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력서를 제출한 지 거의 1년이나 다 되도록 가타부타 아무 소식이 없어 초조하기도 했지만, 나를 추천한 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자질과 전문성에 대해 검토할 시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약 한 달간 인사 검증을 통과하며 검증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운 것을 깨달았다. 공관장 임용 대상자가 치러야 하는 영어시험이 있어서, 시험 이틀 전에 통보를 받아 겨우 하루 준비를 하고 서울대 어학원에 가서 시험을 봤다. 말하기, 듣기, 작문 등 전 분야에 걸쳐 꽤 난이도가 높은 시험이었는데, 작문과 논술에는 대학시험지 다섯 장 분량을 손이 아프도록 써서 냈다. 다행히 영어 시험은 무난한 점수로 통과하였다. 후에 7명의 특임공관장 대상자가 시험을 봐서 4명이 떨어진 경우도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시험이었다. 2006년 12월 21일 언론 엠바고를 전제로 공관장 임용 대상자가 발표되었다. 교수 출신으로서는 콜롬비아 대사로 내정된 전북대 송기도 교수와 나 둘이었다. 나머지 특임공관장들은 청와대, 국정홍보처 등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로 부처 간 인사교류 성격의 일환으로 발령이 났다.

외교라는 낯선 땅으로



고려인 문제 :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들은 구소련 지역에서 가장 힘든 삶을 살고 있다. 70여 년 전의 고려인 강제이주가 역사적 사실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려인들의 삶을 아직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곳이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의 실태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6년 1월 5일 '추적 60분'을 통해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37년 스탈린이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원래 고려인이 없었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중 일부가 1950년대부터 유학, 군복무, 직장 이동 등으로 우크라이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상적인 경로로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독립 후 우크라이나 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약 1만에서 2만 명에 이르는 무국적, 타국적 고려인들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거주민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농촌 지역은 기후가 좋고 농업 여건이 뛰어나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소련 시대부터 거주허가를 받지 않고 가족들을 데려와서 그대로 정착하였다. 소련 해체 후 원거주 공화국 별로 국적이 부여되고 패스포드가 나왔는데,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들은 우크라이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로 계속 생활을 한 경우가 많았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은 정상적인 생활의 기본 조건인 법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생활하는 고려인들은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는 것은 물론, 경찰 단속과 추방의 공포 속에 살고 있다. 대부분 남부 지방에서 소작 형태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불법체류 신분으로 인해 농산물의 유통, 판매 등에서 큰 경제적 손실도 감수해야 한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고달프고 힘든 유랑민 신세가 자식들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2세들은 우크라이나 국적을 취득할 수 없어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부모처럼 농촌 지역을 떠돌며 소작농 생활을 하거나, 러시아 등지로 흘러들어가 하층노동자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2세들의 운명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삶은 난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 고려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세 가지이다. 먼저 영주권 획득이나 국적 취득을 통해 기본적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일, 다음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일, 셋째로 2세들이 사회적 상향이동이 가능하도록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국적 취득 문제는 3년에서 5년 정도의 기간 안에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유센코 대통령이 고려인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센코 정권 임기인 2009년 말까지는 가시적 성과를 내거나, 최소한 국적 취득을 용이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경제적 기반 확립을 위해서는 농업 부문에 한국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여, 생산·유통 인프라를 닦아놓아야 하는데, 이 사업은 5년에서 10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국적 취득이 이루어질 때까지 단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고려인들이 경찰 단속에 쫓기거나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불량배들에게 시달리는 일을 막는 것과 의료·교육 등 최소한 사회 보장은 받을 수 있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기반 확립과 관련하여 대사관에서는 농업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회에서 지원해준 이 사업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대사관에서는 국적위원회 운영 등 국적 취득 사업에 집중하고, 농업 사업은 본부에서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대사관이 직접 나서서 농업기술교육장을 건설(첫 해의 농업 사업은 농업기술교육장 건립과 농업 연수 프로그램 실시였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원래 본부의 계획은 이 사업을 외부 기관에 위탁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내가 검토해보니 낭비 요소가 너무 많았다. 예를 들어 교육을 담당할 농업전문가 인건비가 나의 외교부 본봉의 3배 정도인 매월 1,300만원씩이나 잡혀 있는 식이었다. 예산 지원을 받으면 주인 없는 돈으로 생각하고, 회계절차만 잘 맞춘 채로 나눠 갖기 식으로 집행하고 낭비하는 관행은 하루빨리 시정해야 한다. 국적 취득을 못해 시골에서 숨어살며 고난을 겪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국회에서 특별히 배정해준 예산을 도저히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대사관에서는 국적위원회 운영을 주관하는 데도 인력이 모자라는 상황인데, 농업교육장을 건립하기 위해 모든 인허가와 건축 계약을 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원래 공무원은 나중에 책잡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게 공직 생활을 하는 방법이다. 사전 예산 계획이 내려온 것을 집행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예상치 못한 비용을 감당해 가면서 직접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인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2008년 감사원 특별 감사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영사가 시말서에 해당하는 사유서를 두 장이나 썼다고 하지만, 내가 당시 내린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대사관이 엄청난 고생을 한 덕분에 건자재, 건축비, 인건비 등 모든 면에서 예산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대사관이 농업교육장 건립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지방 행정기관의 관리들과 업무적 스킨십을 통해 얻은 친분으로 민간 농업 투자의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나는 고려인 사업을 설명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위해서는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기회가 되어서 좋고, 한국 투자가들은 좋은 농업 여건에서 사업 이익을 창출해서 좋고, 고려인들은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해 경제 기반을 마련해서 좋은 3자 윈윈의 모델을 만들자고 역설하고 다녔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세계7위의 농업생산국이지만 고부가 농산물과 가공 식품은 오히려 유럽에서 수입해서 소비하고 있다. 독립 이후 농업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인프라도 망가져 농촌이 급속도로 피폐해져가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농촌에는 젊은 노동력이 남아 있지 않아 경작권을 받고도 농사를 못 짓는 땅이 수두룩하고, 영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고려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지역도 농촌의 피폐와 농업 투자 자본의 고갈로 경제 여건이 아주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부터 농업 투자가 들어오고 첨단 농법이 도입되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밑거름이 된다. 처음에는 불법체류 고려인들을 사회적 부담으로 여기던 남부 지역 지도자들이 지난 1∼2년 사이 한국의 농업 투자에 관심을 갖고 적극 나서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국의 농업 투자를 유치하는 데 필요하다면 오히려 고려인들에게 국적을 부여해가면서 자기 지역에 유치하려고 노력할 준비도 되어 있다. 고려인들의 입장에서는 육체노동에 의지한 전통적인 농사법보다 시설 농업 등을 통해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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