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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상형문자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공간의 상형문자

김석철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 232쪽 / 18,000원



1장. 한국의 공간 루(樓)와 정(亭)



한국 전통 건축의 원형공간, 루와 정


루와 정은 한국 전통 건축의 원형공간이자 한국 문명의 모습이 깃든 공간이다. 루와 정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이 없는 이 세상과 저세상이 만나는 공간이다. 루와 정은 한국인의 자연을 보는 마음, 세상을 보는 눈이 만든 집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루와 정이 있으나 한국의 루와 정과는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 루는 도성의 일부이고, 정자는 정원의 부분인데 비해 한국의 루와 정은 별도의 공간이다. 자연과 집 사이에 문과 창이 있어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문이고 자연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창이다. 문과 창은 자연과 집 사이의 닫힘과 열림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루와 정은 지붕과 기둥 사이 모두가 문이고 창인 집이다. 루(樓)는 지나는 곳이고 정(亭)은 머무는 곳이다. 한국의 루와 정을 아는 일은 한국 문화를 아는 길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일본, 한국 문화의 같음과 다름을 아는 길이며 전통과 현대의 간극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범영루_ 경주 불국사 자하문

한국 건축의 원류는 삼국시대에 있다. 삼국시대에 한국 건축이 완성된 후 더 이상 발전이 없었다. 불국사 이후 그만한 것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케 한 것이 정치적 삼국통일이라면 백제와 고구려의 미학을 신라가 받아들인 것이 문화적 삼국통일이다. 한국 전통 건축 연구를 백제 건축에서 시작하여 고구려 건축까지 확대하려 한 나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건축이 불국사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은 만들었으나 불국사는 완성되지 못하자 국가가 나서서 2000여 칸에 이르는 80여 동의 대건축군을 30여 년 동안 완성하였다. 절이 별처럼 가득하고 탑이 기러기 떼같이 이어지던 서라벌 최대의 절인 불국사는 왕궁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던 도시형 가람이었다.

불국사의 정수는 석축기단과 자하문, 범영루에 있다. 범영루의 원래 이름은 수미범종각이다. 불국세계로 가는 자하문 옆에 범영루가 있다. 범영루는 하늘과 땅의 조화를 그림자로 나타내어 이 세상이 저세상의 그림자임을 상징하는 루인데, 범영루가 비치던 구품연지가 없어져 그림자가 없는 무영루가 되었다. 석축기단과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범영루는 하나의 건축군이다. 청운교, 백운교를 오르면 어느 순간 자하문과 범영루가 움직이듯 다가선다. 자하문, 범영루,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루는 동적균제는 눈에 보이는 조화를 넘어선 경지로 아무리 좋은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그 아름다움의 원형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

안양루 & 덕회루_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

고려시대에 완성된 무량수전과 극락전은 천년 반복해온 한국 전통 건축의 전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 앞에는 조선시대에 지은 안양루와 덕회루가 있다. 사찰에서 대웅전과 루가 이처럼 마주한 예는 불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국사의 대웅전 앞에 범영루가 있듯이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가 있고 극락전 앞에 덕회루가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외부공간의 완성도는 대단하나 내부공간의 건축적 완성도는 높지 않고 봉정사 극락전은 외부공간보다 내부공간이 뛰어나다.

안양루는 무량수전과 짝을 이루고 덕회루는 극락전과 짝을 이루면서 각각의 루가 되어 있다. 안양루가 무량수전의 외부를 향하는 문이고 덕회루는 극락전의 내부를 향하는 문으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루와 정의 세계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곳이 창이고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문인데 안양루와 덕회루는 무량수전과 극락전의 문이고 창인 공간이다. 무량수전은 안양루가 있어서 봉황산을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고 극락전은 덕회루를 통해서 인공의 세계를 자연의 세계로 만들고 있다.

경회루_ 서울 경복궁

조선시대의 혼돈과 정쟁은 정도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세력과 태종의 야심을 실현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정도전의 신권정치가 태종의 왕권정치로 바뀌면서 경복궁에서 크게 바뀐 곳이 경회루다.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은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경회루를 짓게 하였다. 박자청은 연못을 남북 113m, 동서 128m로 키워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비취게 하고 연못 안에 용을 조각한 48개의 돌기둥을 만들어 그 위에 동양 최대의 루를 세웠다. 경복궁과 경회루를 연결하는 세 다리는 해와 달과 별의 삼광을, 경회루의 바깥 사각기둥과 원형 안 기둥은 하늘과 땅을 상징한다. 세 겹의 경회루 내부공간은 천지인(天地人)을 뜻하며 8기둥은 8괘를, 12칸은 1년 12달을, 16개 기둥과 기둥마다 있는 네 짝 문은 64괘를 상징한다.

경회루는 한국 문명 특유의 에너지를 보여준 건축이다. 경회루 주변을 걸으면 북악산과 인왕산이 따라 움직인다. 사람을 따라 자연이 의식의 흐름처럼 움직이는 건축공간을 형성한다. 자연과 인간과 건축의 만남이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공간 형상을 이어가는 정경을 알 수 있어야 건축의 정수를 아는 것이다. 경회루는 역사도시 서울의 축도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에서 보는 인왕산 북악산과 경회루에서 보는 인왕산 북악산은 다른 세계다. 바깥이 안을 만들고 안이 바깥을 자기 것으로 하는 희한한 전경을 경회루에서 볼 수 있다. 위대한 건축은 상징체계를 갖고 있다. 건축의 상징체계는 수사학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다.

경회루는 돌기둥 위에 세운 목가구의 집이다. 석조 하부구조와 목조 상부구조의 이중구조로 경회루를 상상하면 경회루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함께 비취게 만들어진 방지(方地)와 돌기둥과 목가구의 상부구조를 하늘과 바람과 물의 흐름과 함께 보아야 경회루에 담고자 한 박자청의 뜻을 알 수 있다. 경회루를 중건하는 데에는 박자청이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중국을 앞선 무엇이 이루어질 때는 뛰어난 인간이 있을 때이다. 경회루는 한글과 거북선을 만든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부용정 & 애련정_ 서울 창덕궁

창덕궁은 안에서 밖이 보이고 밖에서 안이 보이는 궁궐이다. 그런 창덕궁 후원에서 빛나는 보석 같은 건축이 애련정과 부용정이다. 부용정은 정면 3칸, 측면 4칸인 십자형 평면의 겹처마 팔작지붕 정자이다. 부용지에 두 발을 담고 있는 형상으로, 왕의 공간이기 때문에 누마루를 두었다. 부용정보다 앞서 지은 애련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인 최소 건축이다. 겹처마 사모지붕인 간결하고 격식 있는 집이다.

애련정 안에 앉으면 네 기둥 사이 낙양창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볼 수 있다하여 널리 알려졌다. 안에 들어가 앉아 보지 않으면 부용정과 애련정의 멋을 알 수 없다. 정자는 안에서 밖을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용정과 애련정에 앉으면 밖의 풍경이 다가온다. 눈이 아니라 몸으로 아침과 저녁, 봄과 여름이 다른 세상인 것을 부용정과 애련정은 알게 한다. 루와 정은 자연의 추상세계로 열린 창이다. 부용정과 애련정에서 볼 수 있는 창덕궁 후원의 추상세계를 알지 못하면 한국의 지식인이 아니다.

만대루_ 경북 안동 병산서원

조선시대에 기록된 서원이 885개 소에 이를 만큼 서원은 전국 도처에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오늘날의 고시원이다. 그중에 병산서원은 많은 학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병산서원을 뭇 사람이 찾는 까닭은 병산서원이 이룬 일에 있지 않고 만대루의 건축적 성취에 있다. 만대루는 높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집이다. 하늘 높이 나는 새는 날개로 날지 않고 바람 사이 하늘을 난다. 잡새는 날개로 날지만 먼 하늘을 가르는 새는 바람 사이를 난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바람 사이를 나는 새와 같은 집이다.

만대루가 있어 우리가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날개를 만든 위대한 목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대루가 날갯짓 없이도 고공을 날게 한,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가 어떻게 그 일을 이루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타고남이 있어야 한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하회마을에 와서 낙동강을 따라 만대루에 이르면 하회마을과 병산이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만대루는 병산서원보다 십리 밖 하회마을과 가깝다. 그것이 바로 바람 사이를 나는 대붕의 경지다. 위대한 목수는 잘난 선비들처럼 작당하지 않는다. 그런 목수들의 작품을 찾아나서야 전통 건축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루와 정



악록서원_ 중국 후난성 후난대학


악록서원은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서원으로, 유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서원이 자리한 악록산은 불교와 도교의 명산이었다. 악록서원은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로, 주자(朱子)가 강의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성지로 생각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존 건축물은 명나라, 청나라 때 지은 것으로 강학, 장서, 제사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악록서원은 대량의 비문을 보존하고 있는데 주희의 충효염절비, 송나라 진종의 친필 악록서원비 등이 유명하다. 악록서원은 송(宋), 원(元), 명(明), 청(淸)대 이후 1926년에 후난대학이 되었다. 악록서원은 창립 당시에는 5칸 강당과 52칸의 재(齋, 기숙사)로 시작하였으며 학생수가 많을 때는 천 명을 넘었다.

악록서원 입구에는 이곳 출신인 당나라 명필 구양순의 글씨를 집자한 천년학부(千年學府)라는 편한이 있다. 악록서원은 끊임없는 자기변신을 통해 역사적 역할을 하였는데 중국의 근대화와 세계화를 이룬 중국번, 양계초, 마오쩌둥이 악록서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악록서원 후문에 자리한 애만정은 8개 기둥에 겹처마와 녹색 유약을 바른 기와를 얹은 중국 4대 정자 중 하나로 꼽히지만 4개 기둥 1칸 정자인 창덕궁 애련정만 못하다. 중국의 위대한 공간은 우리를 압도하지만 한국 공간의 미학만 한 것을 중국 건축은 이루지 못하였다. 악록서원 어디에도 만대루만 한 곳은 없고 중국 4대 정자 중 하나인 애만정은 애련정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은 위대한 나라지만 한국은 별난 나라다. 한국이 세계에 나설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있다. 가쓰라리큐_ 일본 교토

교토는 일본의 역사와 지리와 인문이 함축된 곳이다. 현대화된 교토의 역사구역에는 천년의 시간이 함축된 일본 건축과 자연의 정수가 남아 있다. 자연 그대로는 자연이 아니다. 도시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도시문명을 이해하면 역사와 지리와 인문을 알 수 있다. 예술은 한 인간의 예술 형식이지만 도시는 수많은 인간이 함께 이루어 온 예술 형식이다. 교토는 그런 도시다.

교토 남서쪽에 위치한 가쓰라리큐는 가쓰라 강 서쪽 제방에 자리 잡고 있다. 13.8에이커에 달하는 땅에 가쓰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연못과 수로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가쓰라리큐는 일본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서양 건축가들도 '내 외부공간의 상호관입'이라는 공간형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가쓰라리큐에는 자연과 건축 사이의 끊임없는 교감이 사계절의 아침과 낮과 저녁의 서로 다른 공간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가쓰라리큐의 정수는 월파루와 송금정이다. 떠오르는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연못에 세워진 월파루는 연못의 북동과 남동각을 따라 배치된 일본 정원의 미적 요소를 한번에 볼 수 있는 루이다. 송금정은 북측과 서측이 열려 있는 구조로, 저녁노을과 어울리는 가쓰라리큐의 정원 건축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현대의 루와 정



바르셀로나 엑스포_ 독일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을 인정받은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는 1929년에 개최된 바르셀로나 엑스포 독일관 설계자로 선정되었다. 독일관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해체하여 독일로 반송돼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미스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되었다. 바르셀로나의 독일관은 역사 건축이 이루지 못한 인류의 이상을 현대 건축의 문법으로 이룬 선언적 작품이다.

20세기 건축을 이끌어 온 세 명의 위대한 천재가 있었다. 아테네 헌장을 만들고 역사시대 건축을 부정한 현대 건축의 길을 연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민주시대의 유기적 건축을 선언하고 이를 실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와 현대 건축의 이상인 절제의 미학을 건축 공간으로 이룬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그들이다. 바르셀로나 독일관은 미스가 현대 건축의 이상을 세계 건축사에 선보인 집이다. 미스는 대리석 기단 위에 엷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여덟 개의 강철기둥과 대리석과 유리벽 사이에 움직임의 공간이 원형의 공간이 되는 민주 공간의 미학을 극도로 절제된 공간형식으로 실현하였다. 역사 건축이 이루지 못한 '최소의 것으로 최대의 것'을 표현하는, 이 위대한 작품이 75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바르셀로나 엑스포 독일관은 한국 건축의 루와 정의 정신이 현대 건축의 어휘로 절묘하게 실현된 것이다. 주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루이며 잠시 세상 바깥을 바라보는 정자와 같은 집이다. 서양 건축은 벽으로 이루어진 건축이고 동양 건축은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축이다. 서양 건축에 있어서 지붕은 벽과 대응되는 요소가 아니라 종속요소다. 파사드인 정면은 벽으로만 구성된다. 동양에서는 지붕을 만드는 일이 집짓기의 기본이다. 기단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든 후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과 문을 달고 지붕 위에 기와를 얹는 것이 집 짓는 일이다. 바르셀로나 엑스포 독일관은 동양 건축 같은 서양 건축이다. 이곳을 보면서 한국의 루와 정을 현대 건축으로 만들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대사관_ 서울

프랑스 대사관은 해방 20년 되던 해에 세워졌다. 1960년대 외국공관 설계를 한국인에게 맡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4 19혁명을 보고 프랑스 정부는 한국인에게 설계를 맡겼다. 르 코르뷔지에를 사사하고 돌아온 김중업은 한국 문명을 상징할 건축을 의뢰받았을 때 그가 주목한 것이 한국의 루와 정이었다. 불국사 자하문, 창덕궁 애련정이 그가 발견한 한국 건축 원형의 모습이었다. 불국사 자하문과 창덕궁 애련정은 중국의 아류가 아닌 한국 문명 고유의 비례를 가진 건축이다.

김중업은 루와 정의 정수를 콘크리트의 추상격자와 지붕으로 시도한다. 사방탁자 같은 절제된 콘크리트 결구 위에 자하문과 애련정의 비례로 추상화된 지붕을 만들었다. 프랑스 대사관 지붕에는 내부공간이 없다. 실은 옥상옥이다. 철근 콘크리트의 입체격자 위에 가외의 지붕을 덧씌운 것이다. 내부공간과는 상관없는 지붕이다. 대사관 지붕은 비를 막는 지붕이 아니라 대사관저와 대사관과 사무동의 옥외공간을 연결하는 지붕이다. 대사관 지붕 아래 대사관저와 대사관을 배처럼 생긴 브리지로 연결하고 대사관과 사무동은 지그재그의 격자 난간으로 연결하였다. 이만큼 아름다운 외부공간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에서도 예를 찾기 어렵다. 프랑스 대사관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벗어나 물상의 세계를 초극한 한국의 루와 정이다. 어느 날 서소문을 지나다가 대사관 지붕이 추악한 모습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헐어버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건축을 흉하게 다시 고쳐 짓는 일이 더 큰 파괴다. 목수가 만든 병산서원은 남았으나 건축가가 만든 프랑스 대사관은 사라졌다.

2장. 유럽 중세도시



역사가 숨 쉬는 천년도시, 유럽 중세도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세상은 천년을 더 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남긴 문명과 문화는 남는다. 생명은 유전인자의 세계이고 문명과 문화는 기억장치의 세계다. 유전인자와 기억장치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 천년의 하드웨어인 유럽 중세도시가 그런 것을 알게 한다. 유럽에는 도처에 중세도시가 남아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 문명의 부활이 아니라 고대 문명이 중세 문명으로 진화한 것이다. 동양도시에는 르네상스가 없었다. 유럽 중세도시의 본격적인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냥 보면서 알고, 느끼는 일도 사실의 핵심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무함마드(Muhammad) 언행록에 있는 '죽으면 슬피 울던 자식들도 그대를 떠나지만 평생에 이룬 선행과 업적은 그대를 따라 영원한 세계로 간다'는 말이 요즘 자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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