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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프로이트,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

김덕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9년 2월 / 428쪽 / 14,000원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는 누구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와 어머니 아말리에 프로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1936년 9월 23일 영국 런던에서 여든 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는 1865년 빈에 위치한 레오폴트스태터 김나지움에 입학해 1873년 졸업했다. 프로이트는 지식욕이 강하고 근면한 학생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공부로 보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언어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즉 그는 라틴어와 헬라어를 마스터했고,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없이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를 공부했다. 학교의 종교 과목은 그에게 히브리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프로이트는 10년 동안 영어로 된 책만 읽은 적이 있을 정도로 특히 영어를 좋아했다. 그는 1873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김나지움 졸업시험이자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아비투어(Abitur)를 통과하고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1882년 4월의 어느 날 저녁 그의 부모 집에서 독일 함부르크에서 온 스물한 살의 젊고 아름다운 마르타 베르나이스(Martha Bernays, 1861~1951)를 만났다. 원래 프로이트는 대학교수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도 약혼녀의 집안도 모두 가난했다. 그리하여 그는 학자의 꿈을 포기하고 개업의가 되기로 결심했다. 1886년 4월 빈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을 한 프로이트는 그해 9월 13일 약혼녀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했다. 프로이트 부부는 전형적인 시민계층의 부부로서 평생 서로에게 충실했으며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그들은 일부일처제에 충실했다. 프로이트의 가족 중에는 막내인 안나(Anna Freud, 1895~1982)가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뒷날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되어 대를 이었다. 이처럼 딸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이룬 경우는 당시로써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는 1885년 6월 빈 대학에서 신경병리학 분야의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그해 9월에는 사강사(私講師, Privatdozent)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구강암으로 혹독한 고통을 당했다. 그는 16년 동안 무려 서른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프로이트가 구강암에 걸린 중요한 원인은 흡연이었다. 프로이트 자신도 그 엄청난 고통이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 대가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38년 3월 나치가 빈을 점령하면서 그해 6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치 정권은 이미 1933년 프로이트의 저작을 불태웠으며, 그의 여동생 네 명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유럽에 광풍처럼 몰아친 반유대주의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지 얼마 안 되는 1939년 2월 구강암이 재발했으며 더 이상 수술이 불가능했다. 이에 프로이트는 안락사를 결심했다. 1939년 9월 22일 의사는 프로이트에게 둘이 합의한 대로 다량의 아편을 주었다. 그 다음날인 9월 23일 밤 프로이트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정신분석학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깊은 인문학적 소양 - 그리스신화와 셰익스피어

정신분석학은 원래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의학의 영역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정신분석학은 이미 그 창시자에서부터 끊임없이 인간의 정신적 세계와 삶, 사회 그리고 문화를 좀더 광범위하고 심층적이며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그 자신의 출생지인 의학이라는 좁은 분야와 학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매우 다양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그리고 문화과학에 응용되어 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dipuskomplex)는 바로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외에도 자기애를 표현하는 개념인 나르시시즘도 역시 그리스신화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의 저술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10년 출간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기 기억』에서였다. 그는 거기에서 이 개념에 입각해 동성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이렇게 도입된 나르시시즘 개념은 자기애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일반화되면서 정신분석학적 이론과 실천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스신화가 프로이트의 지적 세계가 발전하는 데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해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구성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즉 그리스신화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과학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성사적 의미는 또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Hamlet)』에도 동일하게 부여할 수 있으며 또한 부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보편성을 부여함에 있어서, 그가 김나지움 시절부터 획득한 그리스신화와 셰익스피어 문학 등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일정한 기여를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서구의 정신적 유산에서 확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를 비서구적 문화를 포함하는 인류 문화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오스트리아 사회를 넘어선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서구 문화를 넘어서 다른 문화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특수적이다. 비서구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도 서구 문화의 신화와 문학에서처럼 반드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특수적 보편성을 띠는 개념이지, 보편적 보편성을 띠는 개념은 결코 아니다. 보편적 보편성을 띠는 개념은 콤플렉스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콤플렉스의 한 특수한 유형이다.

자연과학과 철학에 눈뜨다 - 다윈과 괴테 그리고 철학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그는 의학 공부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정신의학이 어느 정도 그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다. 그의 관심사는 실천 의학이나 치료술이 아니라 신경계통에 대한 경험적 실험적 연구에 있었다. 더불어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철학과 자연과학 생리학 동물학 화학 물리학 식물학 광물학 진화론 등 을 공부했다. 그런데 이들 과목은 전공을 위한 필수가 아니었다. 즉 프로이트가 철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한 것은 순수한 지적 관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다윈의 진화론은 지성사의 일대 혁명으로 엄청난 파쟁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트는 대학에서도 지속적으로 다윈에 대해 공부했다. 프로이트는 나중에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소에서 신경계통에 대해 연구하면서 진화론적 기본 전제 고등동물은 하등동물의 지속적인 발전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므로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를 적용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구축한 기본 원리들은 그가 의과대학생 시절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소에서 6년 동안 연구하면서 획득한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그 기본 원리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대신 그것의 모든 해부학적 토대를 포기하고 그것들을 정신적 과정에 적용함으로써 브뤼케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자신의 독특한 지적 세계인 정신분석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물리학적 생리학에 의해 과학으로부터 추방된 '목적' '의도' 및 '목표'등의 정신적 개념을 다시 과학에 도입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동시에 이들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물리학적 생리학의 기본 원리들과 결합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 현상이 생리학적 현상이나 물리학적 현상과 같이 자연과학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인간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 - 19세기를 넘어선 19세기 사상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성장기는 이른바 '창시자들의 시대(Gr nderjahre)'였다. 사회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진화론의 찰스 다윈,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이자 노벨상을 창시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 X선을 발견해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빌헬름 뢴트겐(Wilhelm K. R ntgem, 1845~1923),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적합한 기업을 개척한 알프레드 크룹, 아우구스트 티센, 로버트 보쉬, 에른스트 베르너 지멘스 등이 대표적인 창시자들이다. 이들에 의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었고,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과학이 창시되었으며, 또한 새로운 산업과 기술이 발전했다. 뒷날 프로이트 자신도 이들과 더불어 현대 세계의 창시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즉 그는 그 당시까지 거의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던 무의식의 영역을 심층적으로 탐험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세계를 밝혀내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산업화, 아니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아니 말 그대로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또한 산업혁명은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었고 인간의 규율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의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모든 삶의 영역에서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기계론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아무튼 산업화와 더불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된 기계화는 당시의 과학자, 예술가 및 철학자들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그는 인간의 정신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공장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비유했다. 결국 프로이트는 기계론적 용어와 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용어 주지하다시피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기계의 제작과 작동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에 힘입어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심리학을 구축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산업화는 규율사회의 도래를 초래했다. 규율사회의 이념은 단지 공장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즉 개인들은 노동과 생산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사적 삶의 영역에서 육체적 또는 감정적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행위할 것이 요구되었다. 자기통제와 자기규율이 윤리적 의무이자 이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가족과 학교 등 사회화 기관은 개인들에게 이러한 규율사회의 이념을 교육했다. 이 모든 것은 사업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양성하고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성윤리 또한 규율사회의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러한 규율사회적 성윤리에 의해 억압된 환자들을 치료하는 임상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지배에의 의지, 즉 자기지배에의 의지가 인간의 삶을 점점 더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관통했다. 말하자면 자기통제와 자기지배는 19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 된 셈이다. 프로이트 역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자기통제와 자기지배의 의지와 이상을 추구했다. 20세기 초반까지 자기규율과 사회적 압력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자기통제의 이상은 점점 더 높아졌다. 산업화, 아니 산업혁명과 더불어 경제적 번영과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도래했다. 즉 인류는 엄청난 진보를 체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진보의 이념과 낙관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 아니 산업혁명과 더불어 발전한 산업자본주의는 인간을 반드시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와 더불어 자본과 노동의 대립 등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이 인간을 반드시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갈파했다. 즉 비록 경제적 물질적 삶은 그 이전보다 풍요로울지 몰라도 규율사회는 인간의 영혼을 점점 더 억압하게 된다는 사실을 통찰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 자본주의적 규율사회를 그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바는 규율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이트는 새로운 문화의 발전을 부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이 발전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물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과 사회의 조화를 그리고 쾌락과 노동의 조화를 추구했다. 프로이트는 이를 위해 인간 영혼의 심층을 탐험하고 인간의 영혼을 결정하고 억압하는 개인적 사회적 기제를 밝혀낼 수 있는 과학적 틀과 방법 및 도구, 즉 정신분석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대(代)를 이은 정신분석학



"안나-안티고네" - 또 한 명의 프로이트, 안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역사에는 그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외에도 또 한 사람의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바로 안나 프로이트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1895년 12월 3일 빈에서 태어나 1982년 8월 8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안나 프로이트는 1905년 '코티지 리체움(Cottage Lyzeum)'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다. 그녀는 1915년부터 1920년까지 모교인 코티지 리체움에 딸린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안나 프로이트가 5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뒷날 정신분석학자로서의 그녀의 삶과 일로 연결된다. 그녀는 평생 아이들 문제와 씨름했다.

안나 프로이트는 교사로 재직중이던 1918년부터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교육분석(Lehranalyse)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0년부터는 아예 교사직을 사임하고 정신분석학에 전념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전문적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1923년 정신분석의로 개업했다. 장소는 빈 베르크가쎄 19번지, 그러니까 그녀가 태어나서 자라고, 그녀의 아버지가 개업의로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집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안나 프로이트가 독립적인 정신분석가로 활동을 시작한 바로 그 해에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강암에 걸렸다. 암으로 고통받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는 유일한 간호인이었다. 안나 프로이트는 단순히 간호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역할을 해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건강상 공식석상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안나 프로이트는 학회에서 그를 대리하거나 그의 글을 대신 발표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3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가 수여하는 괴테 상(Goethepreis)을 수상하게 되었다.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에 합병되면서 나치가 빈을 점령했다. 곧바로 유대인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프로이트 가족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침내 6월 4일 부인 마르타, 막내딸 안나와 함께 런던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39년 9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유품을 관리했고, 그의 제자들과 공동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총서(Sigmund Freud Gesammelte Werke)'를 편집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듯 젊은 20대 시절부터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인 자신의 삶과 학문에 헌신한 막내딸을 안티고네(Antigone.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 오이디푸스는 그의 아버지인 라이오스(Laios)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어서 어머니 이오카스테(Iokaste)와 결혼했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는 2남 2녀가 태어났다. 안티고네는 그 맏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알고서는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렸다. 이때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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