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8: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8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 374쪽 / 14,000원
만주사변과 만주국 탄생1930년대에 접어들자 전 세계적 불황과 실업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파시즘 발호(跋扈)의 토양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며 파시즘의 광기를 발산했다.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먼저 만주사변의 전주곡이 된 '만보산 사건'을 살펴보자. 1931년 5월 하순부터 만주 창춘(長春) 근교의 만보산 삼성보(三姓堡)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일어났다. 6월 초순 중국 경찰이 개입하여 조선 농민을 몰아내자, 일본의 영사경찰은 조선 농민들이 법적으로 일본 신민이라며 이 분규에 개입했고, 조선 농민들은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공사를 강행했다. 몇 차례 충돌 끝에 7월 1일 중국 농민 200여 명이 조선인들이 만든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중국 농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행히 인명피해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이 사건을 악용하여 문제가 커졌다. 관동군은 창춘 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많은 조선인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보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의 음모대로 조선 내에서 화교에게 보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맞서 중국 내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보복사태가 일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이 사건이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중국 당국이 박해하고 내쫓으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조선·중국 민족의 대립과 충돌을 격화시키고자 했다.
일제의 음모는 일관되고 집요했다. 1931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이 유발한 국내 사태로 중국인이 100여 명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소상히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은 만주와 중국에서 다시 박해를 받게 됐으며, 일본 관동군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시작했다. 9월 18일 밤 일본군은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교외의 유조호(柳條湖) 부근에서 남만주 철도의 일부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만주사변(9·18 사변)'의 서막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1932년 3월 1일 '마지막 황제'인 푸이(薄儀, 1906~1967)를 앞세워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1906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다.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는 일본의 중국 침략 첨병이었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만주'의 중요 산업을 지배하고, 철도 인접 지역에 '부속지'라는 이름의 '영토'를 가진 이 회사는, 명칭은 주식회사였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식민지 국가였다"고 했다.
한국인에게 만주국은 어떤 의미였는가? 윤휘탁은 "만주국은 당시 수많은 조선인에게 '기회와 고난의 무대'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조선인을 형식적으로만 '(일본인 다음의) 2등 공민'으로 취급했다. …… 조선인의 지위를 중국인보다 위에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만주의 조선인 가운데는 도박·아편·밀매·매춘·밀수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여건은 중국인보다 열악했다. 중국인들도 '일본의 앞잡이'라는 경멸적 의미를 담아 조선인을 '2등 공민'이라 불렀다. 만주국은 뒷날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시킨 공간이기도 했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쪽 지도자들과 박정희, 정일권, 최규하 등 남쪽 지도자들은 모두 일제가 지배한 만주국의 질서에 저항 또는 적응하면서 성장했다."
폭탄의거와 투기 광풍일제가 만보산 사건을 조작해 한·중 양 국민을 갈등관계로 몰아간데다, 뒤이은 만주사변으로 인해 중국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31년 말에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이라는 특무조직이자 의열투쟁단체를 조직했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단장인 백범 김구(1976~1949)에게 전권을 위임하였던 바, 한인애국단은 사실상 김구의 개인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당원은 이봉창(1900~1932)으로 제1호 의열투쟁은 이봉창 의거였다.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한 이봉창은 일본인으로 가장해 일본 도쿄로 향했다. 그는 일왕(日王)이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1932.1.8)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날 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봉창은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던졌다. 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폭발해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쓰러뜨렸지만, 일왕에겐 미치지 못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은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이봉창 의거는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한·중 민족 간의 반목감정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의 제2호 당원은 윤봉길(1908~1932)로 윤봉길 의거는 제2호 의열투쟁이었다. 이봉창 의거에 중국 신문들이 일제히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것에 격분한 상하이 주둔 일본 해군은 만주침공을 주도한 육군에게 밀린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이 보도를 트집 잡고 또 일본승려 피살 사건을 조작해 상하이 침공에 나섰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은 10만 병력과 비행대로 상하이를 공격했다. 중국군은 만 1개월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항전했으나 패전하여 일본군에 상하이를 점령당하고 외곽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하여 중국과의 협상을 끌어냈다. 이에 일본군은 천장절(天長節, 일왕 생일. 4월 29일)에 맞춰 승전 기념잔치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일제의 승전 기념잔치에 폭탄을 던지기 위해 이틀 전(4월 27일)에 홍커우공원을 답사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윤봉길이다. 공원 답사 뒤 윤봉길은 "남기고 싶은 글이 있으면 전해달라"는 김구의 요청을 받고 즉석에서 연필로 수첩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
1932년 4월 29일 11시 반쯤 윤봉길은 식장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해군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를 절명시켰다. 또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제3함대 사령관),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제9사단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된 뒤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당했다. 이봉창, 윤봉길 양대 '폭탄 의거'는 모든 면에 걸쳐 엄청난 충격이었다. 김희곤은 "독립운동계에는 격정을,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에게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애정을, 일본에게는 충격을 각각 안겨주었다"고 했다.
투기·금광의 광풍(狂風)도 짚어보자. 1932년 3월 1일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의 건립을 선포한 이후, 조선에는 만주 이민 열풍이 휘몰아쳤다. 1932년 60만 정도였던 만주 거주 조선인 인구는 1942년 150만을 돌파했다. 10년 동안 2400만 인구 중 100만이 빠져나갔으니 가히 '엑소더스(exodus, 대탈출)'라 불릴 만했다. 만주 붐과 함께 투기·금광의 광풍(狂風)도 휘몰아쳤다. 부동산, 금광, 미두(米豆), 주식, 정어리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투기 중 가장 드라마틱한 건 단연 금광 투기였다. 『신동아』(1932. 10)에 따르면 " …… 누런 금덩어리를 찾는 사람의 안광(眼光)은 전 조선의 산야를 녹일 듯이 번쩍거리고 있다. 따라서 산야에는 광맥을 찾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광객(狂客)의 발길이 안 이른 곳이 거의 없게 된 터이다"고 했다.
왜 갑자기 금 광풍이 불었던 것일까? 그건 금값이 올랐기 때문이고 금값이 오른 것은 1930년 1월 일제가 13년간 이탈했던 금본위제로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돈을 풀고, 금 채굴을 장려하기 위해 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금은 고가에 매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봉관은 "1930년대 초 한반도에 불어닥친 골드러시는 정교하게 기획된 정책의 산물이었다"고 했다. 전봉관은 당시의 투기 광풍에 대해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돈'에 비길 만큼 강렬한 욕망인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했다. …… 거세당한 권력의 빈자리를 파고든 게 돈을 향한 열망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들은 자본주의의 '돈맛'을 본 첫 세대였다. 돈 욕심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알 턱이 없었다. 투기를 억제할 제도도 구비되지 않은 시대였다"고 했다. 식민지 시대 사람들은 권력을 얻을 수 없었기에 그들의 욕망이 더더욱 돈으로 쏠렸다는 분석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늘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가해자가 가한 제약조건을 외면한 채 피해자의 행태만 분석한다면 이른바 '피해자 탓하기(blaming-the-victim)'라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될 수 있다.
모더니즘 문학과 조선학운동 1933년 8월 15일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여 다독다작(多讀多作)을 목적으로' 결성된 '구인회'는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중심회원이 되면서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역할을 수행했다. 카프 문인들이 문학의 실천성을 주장하는 행태에 대응해 구인회는 예술성을 중시하는 문학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구인회 멤버인 이상(1910~1937)은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烏瞰圖)'라는 시(詩) 연작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무슨 개수작이냐'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쳤다. 30회 연재 예정이었으나 15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떤 시였기에 그랬던 걸까? 제1호만 감상해보자.
오감도
십삼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일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이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삼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중략)
정과리는 "그의 시는 독자들이 그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할 빈 용기와 같은 것으로 제시되었다. 어느 시보다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인이 거기에 있었고, 그 뜻을 전혀 모르면서도 누구나 한 두 번 행은 외울 수 있는 시가 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 이 시의 힘은 바로 이렇게 해석의 행진을 멈추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검게 덧칠된 듯 알 수 없는 현대의 삶 속으로 불안과 호기심에 이끌려 참여케 된다. 그리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독자의 '구성적 참여'를 통해서 완성된다"고 했다. 김민수는 "이상은 문자라는 '모노(mono) 미디어'에 갇혀버린 시인으로만 한정지을 수 없는 화가이자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편집 및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로서 이른바 다중매체의 감각세계를 그려낸 한국 최초의 '멀티미디어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상은 '오감도'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에 분노했다. 박헌호는 이상의 분노는 '미적인 영역에서 선구자로서의 의식 때문'이라며, 이상을 비롯한 구인회 작가들은 '미적 영역에서 근대성을 추구했던 셈'이라고 평가했다.
모더니즘과는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있었다. 식민지 통치가 20년을 넘어서고 총독부의 끈질긴 동화정책이 조금씩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던 1930년대에 들어서는 우선 흔들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이 눈앞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 시기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부쩍 우리 고유문화, 특히 언어와 역사, 민속 등에 대한 열기가 높아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33년 후반부터 '조선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은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특수성에 주목했다. 안재홍의 경우 조선학을 "조선의 고유한 것, 조선 문화의 특색, 조선의 독특한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한마디로 "조선 역사를 기초로하여 연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세계문화에 조선색을 짜 넣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현실에서 '조선을 알자'고 외친 조선학운동은 어쩌면 정신이 이미 반 이상은 일제에게 넘어간 당대의 상황에 대한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농촌운동과 언론의 시련1930년 당시 농촌이 당면한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는 높은 문맹률이었다. 1930년 국세 조사 자료에 나타난 문맹률은 77.7퍼센트(남자 63.9퍼센트, 여자 92.0퍼센트)였다. 이러한 높은 문맹률은 일본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요보'니 '센징(鮮人)'이니 하고 더없이 방자하게 행동하게 한 동기 중의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의 농촌운동은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농민획득경쟁이 본격화되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민족주의자들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의 한 예는 <동아일보>에서 네 차례에 걸쳐(1931~1934년까지)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을 벌인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운동(Vnarod, '민중 속으로'라는 러시아 말)'이다. 정진석은 "일제치하에서 언론이 전개한 국어운동은 민족의 독립역량 배양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두고 추진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일제는 비슷한 시기에 농촌진흥운동(1932.7~1940.12)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1932년 7월 제6대 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가 "조선지배의 성패를 걸고 총력을 기울여 전개한 관제(官製) 농민운동"이었다. 당시 일제는 아시아 대륙으로의 팽창을 위해 조선을 '대륙전진병참기지'로 만들면서 조선을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급속히 변모시켰다. 그 와중에서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1930년, 전 소작농의 75퍼센트가 빚을 지고 있었다. 이자는 연 15~35퍼센트였다. 1926년 3만 4000여 명이던 화전민은 1931년 4만 1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렇게 되자 일제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일제는 농민들의 혁명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농촌진흥회라는 관제기구를 설립해 관제 농민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3.5퍼센트에 불과한 지주가 60퍼센트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농민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농촌 몰락의 원인을 조선 농민의 게으름, 음주, 흡연, 도박 등 '나쁜 민족성'에 있다는 기만적 논리를 전개했다. 일종의 '피해자 탓하기 운동'인 셈이었다. 1933년부터는 농촌진흥운동을 본격화하면서, 1개 면마다 30~40호를 기준으로 1개 지도부락을 선정하여 농가별 현황조사를 하고 계획서를 작성·실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개개 농가를 장악하려고 했다. 가장 죽어나는 건 소작인들이었다. 김유정은 당시 지주와 소작인의 계층적 갈등을 그린 작품들을 집필했다. 그는 '봄봄(1935)', '동백꽃(1936)' 등을 통해 농촌 피폐의 궁극적 원인을 식민지농업정책의 구체적 형태인 조선 농민의 소작농화가 빚어낸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했다. 1937년 화전민은 7만 6000명으로 증가했다. 일제는 이들을 산림보호정책으로 내쫓아, 이들은 도시의 토막민(일제시대, 도시 인구의 15퍼센트를 차지한 궁민 중의 궁민. 땅을 파고 자리조각을 덮고 살았다)이 되거나 만주 등으로 해외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언론의 시련기도 찾아왔다. 1936년 8월에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은 민족적 울분의 표현이었지만,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이후 신문들의 활동을 더욱 위축시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1912~2002)의 마라톤 우승 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건 8월 10일이었다. 김화성은 손기정의 우승을 ' …… 일제식민지였던 조선땅을 한달 내내 기쁨의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손기정의 기록은 올림픽에서 마라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최초로 2시간 30분 벽을 깬 2시간 29분 19초(함께 출전한 남승룡은 2시간 31분 42초, 3위)였다. 총독부 당국은 손기정의 우승에 바짝 긴장했다. 총독부는 손기정 선수 우승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반일감정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축하회를 금지하고, 기념체육관 설립 발기나 각종 연설회도 금지했다. 또 여러 차례 신문사 사장이나 편집국장을 불러다가 손기정 선수 보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