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김경임 지음 | 홍익출판사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김경임 지음
홍익출판사 / 2009년 3월 / 460쪽 / 25,000원
제1장 문화유산, 제왕들의 탐욕에 짓밟히다
함무라비법전 비문 - 세계 최초의 문화재 약탈로 기록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의 법 원칙은 용서와 관용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정서로 볼 때 잔인한 형벌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법 원칙은 더 큰 복수를 금지시키고 비슷한 보복을 허용한 점에서 절제 있고 온정 있는 법이기도 하다. 이 법 원칙이 처음 기록된 '함무라비법전(Code of Hammurbi)'은 원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모세의 십계명보다 3백여년 앞서 반포되었다. 282개조로 구성된 이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지금의 이라크)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공포했는데,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바빌론의 한 신전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 비문은 6백년 후인 기원전 1158년에 엘람 왕국(지금의 이란)에 약탈당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약탈 문화재로 기록되었다. 이 비석은 이란에 3천 년 동안 머물다가 1901년에 이란에서 유적을 발굴하고 있던 프랑스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어 곧바로 프랑스로 옮겨졌고, 오늘날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 최고 보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림과 문자로 이루어진 이 비문은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강력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된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백성들에게 법을 선포하는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고대 문명이 낳은 최고의 문화재임이 틀림없다. 신으로부터 법을 하사받는 함무라비 왕은 법을 통해서 신의 중개자가 되려는 겸손한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9%가 문명이던 당시 비록 백성들이 법전을 읽을 수는 없을지라도 신의 가호 아래 법을 선포하는 제왕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범죄와 악의 차가운 현실 세계에서 정의와 온정의 세계로 이끄는 효과를 낳았다.
함무라비 법전은 서문, 법조문, 맺는말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함무라비 왕이 신에게 행한 엄숙한 기도문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의 헌법 서문과 별 차이가 없다. 본문은 282개조의 법조문으로 민사, 형사, 경제, 행정, 가족, 의료 등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이는 4천 년 전 고대사회의 관례와 전통, 일반 국민의 생활상을 설명하는 다시 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맺는말은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함무라비 왕의 염원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염원은 이루어졌다. 기원전 175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을 이룬 함무라비의 이름은 군사적 제왕만이 아니라 법을 선포한 제왕으로 후대에 길이 남게 되었다.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신성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비문은 바빌론 민족의 대단한 성물이고 문화재였다. 그러나 6백년 후인 기원전 1158년 바빌로니아를 침략한 엘람 왕국의 왕 슈트르트 나훈테가 이 비석을 전리품으로 약탈해갔다. 400Km의 험악한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4톤에 달하는 이 비석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엘람 왕은 왜 비문을 파괴하지 않고 힘들여 끌고 갔을까? 그것은 신이나 왕이 그려진 비석이나 동상을 약탈하는 것은 적국의 신이나 왕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념비 약탈은 적국에게는 정복을 상징하고 본국 국민에게는 값비싼 전쟁에 대한 전승 기념 선물이 된다. 엘람 왕은 이 비문의 일부를 지우고 자신의 승전 사실을 새겨 넣었고, 그 뒤 함무라비법전 비문은 엘람 왕국의 전승 기념비가 되어 3천년 동안 신전에 전시되었다. 전시 약탈은 고대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끈질긴 관행이었다. 그것은 정복자의 절대적 권한이었고 무제한의 약탈이었다. 약탈물은 왕의 전쟁 수행 능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증명하기 때문에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다. 바빌로니아의 문화재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문명의 소유자이며 계승자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들이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해온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의 고대 문화재를 전시해 놓고 고대 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현실과 다를 것이 없다.
19세기 초의 유럽 제국은 서구 문화의 뿌리를 찾아 비유럽 지역을 샅샅이 뒤져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는 것이 대유행이었고 이러한 문화재 획득은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만큼 문화재 쟁탈전은 총칼에 의한 전쟁만큼이나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이었다. 이때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발견한 로제타석을 영국에 빼앗긴 치욕을 만회하고자 근동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고 1895년 페르시아에서 독점적 발굴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엘람 왕국이 약탈한 바빌로니아의 문화재들은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 모르강의 지휘 하에 엘람 왕국의 수도였던 수사에서 발굴되었다. 함무라비법전도 이때 세 토막으로 파손된 채 발굴되어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진 우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이란의 국립박물관에는 프랑스가 기증한 함무라비법전 비문의 복제품이 있다.
그렇다면 함무라비 법전은 누구의 문화재인가? 바빌로니아의 후예인 이라크의 문화재인가? 엘람 왕국의 후예인 이란의 것인가? 아니면 프랑스의 것인가? 1980년 프랑스 수상 레이몽 바레가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비윤리적 약탈을 문제삼으면서 함무라비법전 비문의 반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로서는 이란에서 합법적으로 발굴해온 비문을 내놓으라는 이라크의 요구가 가당치 않게 들렸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는 그것을 창조한 민족의 소유이거나 최초로 발견된 영토의 국가에 소속된다. 과거에는 약탈에 의해 외국의 문화재를 합법적으로 획득하는 게 국제사회의 관행이었지만 이러한 전시 문화재 약탈 관행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폐지되었고 약탈 문화재는 반드시 반환해야 한다는 국제 관행이 성립되었다. 그렇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진행된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에 그들이 비유럽 지역에서 약탈해 간 문화재는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비유럽 지역에서 가져간 문화재는 약탈한 게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폐허에서, 불타는 전쟁에서의 파괴나 현지인들의 무지로부터 문화재를 구출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들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외국의 문화재는 합법적으로 구매하거나 발굴하여 자기 나라의 문화재로 만들 수 있는데, 함무라비법전 비문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발굴 계약이 아무리 불평등한 협정이었다 해도 그것이 시대의 관행이었고, 소유권이 합법적으로 넘어갔다는 주장이다. 프랑스로서는 함무라비법전이 이란과의 협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발굴한 취득물이기 때문에 이라크에 내어 줄 이유가 없다. 함무라비법전 비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현대의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가 이를 요구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제2장 문화유산, 박물관의 탐욕에 울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 약탈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영국 여왕의 왕관에 장식되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한때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였다. '빛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다이아몬드는 원래는 793캐럿으로, 백색의 작은 달걀만한 크기였다. 전 세계 인구를 이틀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한 가치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인도에서 세공을 잘못하는 바람에 793캐럿이 186캐럿으로 줄어들었고, 1852년에는 영국 왕실이 다시 세공을 하여 오늘날의 105캐럿이 되었다. 모든 유명한 보석이 대개 그렇듯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에도 전설과 저주의 역사가 뒤엉켜 있다. "이것을 소유한 자는 세상을 얻을 것이나, 또한 모든 불행을 맛 볼 것이다. 오직 신이나 여성만이 해를 입지 않고 소유할 수 있다." 전설 그대로 이 보석을 소유한 자들은 예외 없이 왕들이었고, 거의 예외 없이 암살, 정변, 근친 살해, 유배, 배신, 복수 등 온갖 잔혹함으로 얼룩진 액운을 맞았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인 펀자브 지역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인도, 페르시아, 아랍, 터키, 아프간 민족의 교차로였다. 184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두 차례의 전쟁 끝에 펀자브를 정복하고,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던 펀자브 왕실의 보물을 약탈했다. 그곳엔 수천 년 동안 쌓인 막대한 보석과 보물이 있었고,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이었다. 당시 체결된 영국과 펀자브 사이의 평화조약에서 이 다이아몬드를 영국 여왕에 양도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때 인도 총독 달루지는 펀자브의 마지막 왕인 달리프싱을 런던으로 보냈다. 다이아몬드를 영국 여왕에게 직접 진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851년에, 14세의 어린 왕은 런던에서 32세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코이누르를 바쳤고, 펀자브 왕의 수모를 통해 약탈의 영광은 더욱 커졌다.
보석에 얽힌 저주의 전설 탓에 빅토리아 여왕이 보석을 반환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여왕은 지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여왕은 액운을 피하기 위해 코이누르를 다시 세공했고, 소유권이 왕위 계승자의 부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이후 코이누르는 186캐럿에서 105캐럿으로 세공되고, 대관식에 왕비가 쓰는 왕관 꼭대기에 장식되었다. 처음 이 보석을 박은 왕관을 쓴 사람은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때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 왕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7년 조지 6세의 대관식 때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왕비가 썼다. 2002년, 엘리자베스 왕비가 죽자 코이누르가 박힌 왕관은 관 위에 놓여졌다. 현재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다른 왕실 보물들과 함께 런던타워에 있는 보물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크기로도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복잡한 약탈의 역사로도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나라를 보면 인도 - 무굴 제국 - 페르시아 - 아프가니스탄 - 펀자브(파키스탄) - 영국이다. 최초의 발견은 인도로, 이미 5천 년 전의 산스크리트에도 '샤만타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1304년 인도 말와 왕국의 소유였다는 게 최초의 기록으로 나온다. 그 후 1526년, 터키인 바부르가 델리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이 보석을 손에 넣었다. 17세기에 타지마할을 세운 황제로 유명한 샤자한이 이 보석을 자신의 왕관에 박아 넣었고, 그때부터 보석은 2백 년간 무굴 제국에 머물러 있었다. 1739년, 페르시아 왕 나디르 샤가 델리를 점령하고 이 보석을 손에 넣었다. 그는 다이아몬드에서 쏟아지는 빛이 거대한 산과 같다고 경탄하며 '코이누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7년 동안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나디르 샤는 암살당했다.
보석은 그의 경호원이었던 아메드 칸이 탈취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 이 보석을 가지고 카불로 가서 사도자이 왕조를 세우고는 코이누르를 왕조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코이누르는 80여 년간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렀다. 1830년, 피비린내 나는 정변 끝에 아프가니스탄 왕조가 무너지고, 왕은 코이누르와 함께 펀자브로 피신했다. 그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펀자브 왕 란지트싱이 코이누르를 손에 넣었고, 얼마 안 있어 그가 죽자 5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은 막내아들 달리프싱에게 상속되었다. 그는 코이누르를 소유했던 마지막 인도인이었다. 코이누르는 1849년 영국에 약탈당할 때까지 펀자브에 19년간 머물렀다.
1947년에 오랜 식민지 생활을 벗고 독립한 인도는 영국에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요청했다. 원래 인도 왕국의 소유였으며, 마지막 영국에 약탈당할 때도 인도왕국의 소유였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펀자브는 1947년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지만, 그 직전까지는 인도에 속해 있었다. 1976년에는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가 영국 총리 앞으로 코이누르의 반환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다. 보석의 마지막 소유자가 펀자브 왕이며, 전쟁을 통해 약탈한 것이라는 게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그때, 이란 언론들도 들고일어나 코이누르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코이누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페르시아 왕 나디르 샤였기 때문이다.
또한 2000년 11월 7일 BBC뉴스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반환을 영국에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다른 어떤 나라에도 반환하지 않겠다고 확인해 주었다. 영국의 입장은, 법적 소유권이 영국 왕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약탈물이 아니라 펀자브 왕으로부터 정식으로 기증을 받았다는 게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였다. 그러나 펀자브를 정복한 후, 항복 조약에 이 보석의 양도를 규정한 점에 비추어 영국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나폴레옹도 항복 조약에 수많은 문화재를 양도할 것을 규정했지만 이렇게 양도된 예술품은 모두 약탈물로 간주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반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코이누르의 역사가 너무도 복잡한 것은 영국에 유리하다. 반환대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돌려주려 해도 돌려줄 수가 없다. 더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앙숙으로 그들은 절대 상대 나라에 코이누르를 넘겨주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 어느 쪽에도 반환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코이누르는 영국 왕실의 보물로 150년 이상 존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영국 왕실과 주권을 상징하는 최고의 문화재가 되었다. 따라서 코이누르의 반환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보편적인 시각이다.
제3장 걸작 예술품, 전리품으로 흩어지다
트로이 유물 - 전설의 문화유산, 누구의 소유인가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트로이 왕자를 따라 도망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였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8세기의 눈먼 시인이 쓴 이 서사시는 단순히 먼 옛날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뿐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에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됨으로써, 트로이가 전설 속의 왕국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그리스 역사는 수백 년 더 올라가게 되었다.
트로이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 출신으로 크리미아 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큰돈을 벌게 되자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전설상의 왕국 트로이 발굴에 나섰다. 그때가 1871년으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우선 그는 러시아 부인과 이혼하고, 호메로스에 통달한 17세의 그리스 처녀와 재혼했다. 그 뒤, 슐리만은 《일리아스》에 묘사된 전투 지역을 세밀히 연구했다. 그 결과 다다넬스 해협 남쪽 끝에 있는 히사를리크(현재 터키의 카나칼 지역) 언덕을 지목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이 언덕에는 청동기 시대에서 로마 제국 시대에 이르는, 즉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후 600년에 걸쳐 많은 시대의 유적지가 층층이 묻혀 있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직감에 의존하여 트로이 유적지라고 생각되는 층을 두 차례 발굴했다. 여기서 쏟아진 유물은 바로 트로이 왕국이 실재한 도시임을 생생히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슐리만의 트로이 유적지 발굴 소식은 유럽 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트로이 왕국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전설상의 조상을 찾아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슐리만은 일약 유럽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슐리만은 발굴 과정에서 금관, 금귀고리, 금가락지, 금단추 등 9천여 점 이상의 금붙이가 들어 있는 은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는 이것이 트로이 전쟁에서 프리아모스 왕이 약탈을 피해 숨겨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그는 이것들에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보물들 중 보석 장신구는 '헬레네의 보석'이라고 이름 붙였다. 트로이 전쟁의 여주인공 헬레네가 실제로 착용했다고 여겨서 붙인 것인데, 그야말로 멋대로 해석하고 멋대로 붙인 명칭에 불과했다. 그는 발굴 유물로 치장한 아내의 사진을 '헬레네의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발표해서 고대 그리스 유물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유럽 박물관들의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뒤늦게 언론을 통해 보물 발굴과 밀반출 사실을 알게 된 터키 정부가 슐리만을 고소하자, 슐리만은 프리아모스의 보물 중 절반을 터키에 넘겼고 오늘날 터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반은 1880년부터 슐리만의 조국인 독일의 베를린 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졌다. 종전 후 동베를린을 점령했던 소련군이 실어간 것으로 추측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