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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걷다

강제윤 지음 | 홍익출판사
섬을 걷다

강제윤 지음

홍익출판사 / 2009년 1월 / 252쪽 / 12,000원



서문_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


내륙을 떠돌며 살던 어느 해, 불현듯 섬으로 가고 싶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다. 한국은 '섬나라'다. 그 섬들 중 유인도는 500여 개. 10년 동안 사람 사는 모든 섬을 걸어갈 예정이다. 이제까지 100여 개의 섬을 걸었다. 나그네가 순례 길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스승은 인도나 티베트 고원, 히말라야 설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원이나 암자에만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잠수를 해서 잡아온 성게를 까던 팔순의 가파도 해녀, 자식들을 위해 학꽁치를 손질하던 거문도 할머니, 갯벌에서 망둥이를 잡던 비금도 할아버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생애의 스승이고 나침반이었다. 그분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어떤 명상가의 가르침이나 선사의 어록보다 더욱 감동적인 법문이었다.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고 듣고 또 들어도 지혜의 말씀은 줄지 않았다. 세계의 어느 길에서도 나는 이 나라 섬에서 만난 노인들보다 더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진다_ 거제 지심도



인생도 한번 가면 다시 못 오고…


부산 연안 여객 터미널에서 거제행 여객선에 오른다. 부산에서 거제에 이르는 길은 육로보다 해로가 가깝다. 부산에서는 거제의 고현, 옥포, 장승포로 이어지는 세 개의 항로가 있다. 소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여객들은 목적지에 따라 각기 다른 항로를 이용한다. 여객 중에 여행자는 드물다. 여객의 대부분은 거제도 조선소 직원들이거나 그 가족들이다. 조선소 관련 여객들은 차림새에서 여행자와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여객선 안에서의 행동으로도 구분된다. 여행자들은 들떠 있으나 그들은 차분하다. 여행자들이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그들은 지루함에 눈을 감거나 부족한 잠을 청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익숙해지면 일상이다. 풍경이 주는 감동의 대부분은 낯설음에 있다.

뉴아카디아호는 옥포항이 종착지다. 228톤, 최대 속력 43노트(시속 80킬로미터), 워터제트의 추진력으로 항해하는 노르웨이산 여객선은 50분간의 항해에 300리터의 경유를 연소시킨다. 말라붙은 염분으로 여객선의 유리창은 온통 뿌옇다. 텔레비전에서는 <전국 노래 자랑>의 진행자 송해 선생이 또 다른 프로그램에 나와 흘러간 노래를 부른다. <목포의 눈물>, <나는 울었네>, <짝사랑>, <울어라 기타줄아>… 메들리로 이어지는 노인의 노래가 구성지다.

바다는 물결이 제법 세고 여객선은 쉴 새 없이 출렁인다. 파랑 속에서도 부산 거제 간의 다리 공사는 쉬지 않는다. 교각들이 완성된 것을 보니 오래지 않아 상판이 올라갈 모양이다. 다리는 부산과 가덕도를 연결하면 완공된다. 다리가 놓이면 이 항로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나는 머지않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거의 모든 섬들과 육지 사이에 다리가 놓일 것이다. 섬이 육지와 연결되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하지만 섬들이 육지로 편입되는 것은 섬사람들의 열망 때문이 아니라 토목건설 자본의 멈추지 않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육지의 산속 오지까지 남김없이 도로를 깔아 마침내 일거리가 없어진 토목건설 자본은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에서 활로를 찾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인생도 한번 가면 다시 못 오고……. 물새야 왜 우느냐. 울지를 마라." 노인의 메들리는 끝이 없고 인생사 슬픔도 끝도 없다. 어째서 우리네 삶은 온통 이별과 그리움으로만 출렁이느냐.

학꽁치를 뜨다

민박집 주인 내외와 저녁 밥상을 함께한다. 나그네가 운이 좋았다. 주인이 떠온 학꽁치 회가 푸짐하다. 주인이 떴다는 말은 회를 떴다는 게 아니다. 뜰채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왔다는 뜻이다. '반대'라고도 하는 뜰채 낚시는 대나무에 그물을 매달아 물고기를 잡는 재래식 어로다. 홍합 부스러기 같은 밑밥을 넣은 대나무 뜰채를 바다에 던져 놓으면 물고기들이 몰려든다. 어부는 그것을 들어 올려 거두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물에서 물고기를 떠오는 것이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섬에는 열다섯 채의 집이 있다. 두 집은 빈집이고 실제 사람이 사는 집은 열세 집인데 다들 민박으로 생계를 꾸린다. 하지만 모든 집에 사람이 상주하는 것은 아니다. 여섯 집 정도만 붙박이로 살고 나머지는 장승포에서 드나들며 민박을 친다. 섬이 부업거리 일터인 셈이다. 해방 이후부터 살아온 원주민은 세 가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근자에 들어온 외지인들이다. 외지인들은 장승포 등지에 사는 주인에게 세를 주고 집을 빌려 민박을 친다. 이 민박집 주인 역시 10여 년 전, 우연히 여행 왔다가 빈집을 사 고치고 또 새로 지어 눌러 살게 됐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경로로 섬에 정착했다. 낚시나 여행을 왔다가 섬에 매혹돼 눌러 살게 된 것이다. 섬에는 일본에서 여행 왔다가 주저앉은 일본인도 있다.

지심도는 모든 땅이 국방부 소유라서 집주인도 땅에 대한 권리는 없고 오로지 건물에 대한 권리만 있다. 민박집 주인은 그 때문에 걱정이 많다. 지심도가 유명세를 타면서 거제시가 국방부로부터 섬을 통째로 불하받기 위해 협의 중이며 섬을 넘겨받은 후에는 대대적인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 섬의 소유권이 시로 넘어가게 되면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주민들이 몇 번씩이나 산불 난 것을 껐어요. 2000년엔가 그때도 산불이 났었지요. 그때도 주민들이 합심해서 불을 안 껐으면 원시림이 다 타 없어져 버렸을 겁니다. 그때는 저 위 국방과학연구소에 석유가 몇 만 톤이나 있었거든요. 한꺼번에 기름을 쟁여놓잖아요. 불길이 거기로 번졌다면 섬 전부가 타 없어져 버렸을 거예요. 그걸 우리 주민들이 껐는데……. 그래서 저 원시림이 남아 있는 건데……."

민박집 주인은 주민들 스스로 섬과 섬의 원시림을 지켜낸 탓에 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안타까워한다. 그가 처음 들어와 살던 10여 년 전만 해도 섬에는 관광객들이 거의 없었다. 방송과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섬은 순식간에 유명 관광지가 됐다. 동백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이 작은 섬에 하루 1천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한다. 주인은 섬을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까지 했던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는 섬이 개발되기보다는 지금 그대로 보존되기를 희망한다.

성도 이름도 없이 '아무것이네' 하고_ 통영 연화도



연화도 뱃머리

연화도 뱃머리가 기계음으로 요란하다. 절단기에 잘게 토막 난 생선들이 차곡차곡 박스에 쌓인다. 가두리 양식장으로 갈 사료들이다. 통영항으로 수입된 냉동 청어, 갈치, 정어리 등이 양식장으로 흘러든 것이다. 작업 중인 사내는 2만 마리의 우럭을 키운다. 그의 양식장에는 20킬로그램 남짓한 생선 사료 박스가 하루에 30개 정도 투입된다. 자연산 물고기들은 싱싱한 먹을거리를 먹지만 양식장의 물고기들은 중국산 냉동 물고기를 먹는다. 몸은 먹은 대로 된다. 생선의 맛이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연화도에서는 36가구가 가두리 양식업에 종사한다. 연화도와 우도 사이 가두리 양식장에서 기르는 어종은 대부분이 우럭이다. 도미는 두 가구만 키운다. 도시의 횟집에서는 도미의 가격이 비싸지만 산지에서는 우럭보다 더 싸다. 이즈음 연화도에서 출하되는 우럭은 500그램에 6,500원 선이고 도미는 1킬로그램에 8천 원 남짓이다. 쌀 때는 우럭이 500그램에 4천 원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료 값도 안 나왔다. 값이 올라도 8천 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요즈음 가격은 현상 유지 수준이다. 횟집에서 큰 것을 선호하지 않는 까닭에 양식 생선은 크다고 가격을 더 받는 것이 아니다.

뱃머리에 식품차가 들어왔다. 대파, 숙주나물, 브로콜리, 계란, 해남 배추도 싣고 왔다. "오늘은 우유도 없네." "대리점이 문을 안 열었는데 내보고 어찌라고." 대파 값이 비싸다. 한 단에 5천 원. "김은 없나?" "김은 다 나갔소." 두부는 한 모에 1천 원. "오늘 다 시무식 한다고 판장도 문을 여나. 그라이 물건이 없제." 장돌뱅이 사내는 삼천포에 살며 트럭에 물건을 싣고 욕지도와 연화도를 넘나든다. 욕지도는 일주일에 다섯 번, 연화도에는 한 번씩 들른다. "배추 다섯 단 가온나." "모레 아침에 나오소." 섬에 들어오지 않는 날은 주문을 받아 배에 실어 보내 주기도 한다.

성도 이름도 없어요. 누구 즈그 어메라고 부르고

아침 일찍 연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길가 어떤 집 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말리고 있다. 호박을 잘게 썰어서 말리지 않고 한 통의 반을 잘라 속을 파내고 통째로 말리는 모습이 특이하다. "할머니 어째서 호박을 통으로 말리세요?" 할머니는 호박을 통으로 건조시켰다가 꾸덕꾸덕 마르면 길게 썰어서 묵나물을 만드실거란다. "고향은 어디세요, 할머니?" "거제서 나서 열여덟에 시집와 이라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못 살겠고 그래서 이라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가서 살아도 봤지만 답답해서 다시 돌아왔단다. "열, 열하나씩 살았어요. 씨아재, 씨누들 여기서 다 키와서 시집장가 보냈지. 씨아재는 또 미국 가고, 한 씨아재는 죽고, 영감도 10년 전에 돌아가고." 이 좁은 집에서 열씩, 열한 명씩 북적이며 크고 자라 지금은 다들 멀리 떠나고, 더러 이승을 하직도 하고 이제는 할머니 혼자만 사신다. 혼자 살기에도 넓어 보이지 않는 집에서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 "팔십둘, 설 쇠면 셋이고. 다리아 아파서 염증 수술하고 마산까정 맨날 약 타러 다닙니다. 걱정이 태산이요. 태산. 돈도 없고." 할머니는 통영까지 배를 타고 나가 손자들 사는 마산 시내의 병원까지 또 버스를 타고 가서 약을 타오는 일은 고역이다. 할머니는 아지 불을 때고 사는 부엌을 수수 빗자루로 청소한다. "사람 사는 것도 아니지." 누추한 부엌살림을 들킨 것이 민망한지 할머니가 괜한 말씀을 하신다. "불을 때서 난방을 하세요?" "나무도 때고 추운 날은 전기도 꼽고." "나무는 어디서 구하시는데요?" "영감이 해놓고 갔어요."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어버지가요?" "예, 빈집에 해놓고." 할머니는 10년 전에 할아버지가 해놓고 간 나무를 아끼느라 몸이 성할 때는 손수 해다 땠을 것이다. 몸에 병이 생겨 움직이기 힘든 이즘에야 아껴 둔 나무를 가져다 때는 것이겠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섭섭하셨죠?" "하나씩 죽어야 하제. 늙어서 둘이 있으면 어쩔거야." 기둥에는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태가 여태 걸려 있다.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성도 이름도 없어요. 누구 즈그 어메라고 부르고. 아무것이네 하고. 성도 이름도 없이 살아요."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 말리던 메밀을 까불러 나간다. "감기 들면 끓여 먹고. 열을 내린다 해요. 메밀이." 혼자 살지만 할머니는 아픈 다리 이끌고 종일 움직인다. "가만있으라 한들 가만 못 있어요. 일해 먹던 사람이 돼 놔서." '챙이'(키)로 메밀 터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다. "나 이름은 윤필순이오."

겨울 산이 가장 깊다_ 옹진 자월도



겨울 산, 가시나무도 제 가시를 숨기지 못하고

장골 해안을 따라 걷는다. 할머니들이 굴을 캐러 나왔다. 반찬거리도 하고 굴을 팔아 가계에도 보태기 위해서다. 할머니들은 자기 노동의 양만큼 굴을 수확해 간다. 바다가 죽지 않는 한 바다는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준다.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 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고동과 소라와 굴들을 얻어다 산다.

자월도의 주산, 국사봉(166미터)은 구릉처럼 낮지만 자월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면사무소 옆길을 따라 국사봉에 오른다. 길의 초입에서 막태골과 국사봉 양 갈래 길이 나온다. 마을이래야 두어 가구에 불과한 막태골, 거기도 노인들만 산다. 산자락의 계단식 밭은 묵정밭이 된 지 오래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땅의 농경문화가 끝나가고 있다. 섬이라 해도 예전에는 섬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농사였다. 육지와의 소통이 쉽지 않은 까닭에 바다에서 나온 것들은 큰 소득이 되지 못했다. 이제는 육지뿐만 아니라 섬에서도 땅은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하고 황무지가 돼 간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는 '농경' 자체가 문화유산이 되고 말 것이다.

국사봉 산정에서 겨울 산을 본다. 산이 가장 깊어가는 때는 언제일까. 신록이 무성한 여름일까. 여름의 산이 나무와 풀들로 울창하여 골이 깊은 듯하지만 실상 산이 가장 깊어지는 때는 겨울이다. 겨울 산이 가장 깊다. 맨몸의 산. 감추는 것은 깊은 것이 아니라 얄팍한 것이다. 겨울 산의 속살, 맨살을 다 드러낸 나무와 숲과 계곡. 자신의 맨몸과 창자와 실핏줄까지 다 드러낸 산보다 더 깊은 산이 어디 있으랴. 맨살의 겨울 산정에 이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사람 또한 감춰진 제 속살을 다 드러내고 가는 것이다. 겨울 산의 나무는 구도자다. 화려한 치장도 채색의 옷도 다 벗어젖힌 본연의 모습. 겨울 산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숨길 수 있으랴. 산 스스로도 다 드러내 놓고 서 있는 것을. 이미 투명한 산의 속살에 담긴 사람이, 산짐승과 날짐승이 또 어디에 몸을 숨길 수 있으랴. 가시나무도 제 가시를 숨기지 못하고, 나뭇잎의 모습으로 몸 바꾸어 자신을 숨기던 바람도 기어코 본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것을.

포로수용소의 추억_ 통영 추봉도



다찌 집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 부근 식당에서 나그네는 밥상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주인은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메뉴는 '생선 정식' 하나뿐이지만 식당은 늘 만원이다. 밤이면 식당은 밥집의 간판을 접고 '다찌' 집으로 변신한다. 다찌 집에 돼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메뉴는 따로 없다.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유일한 메뉴다. 술은 맥주나 소주 불문하고 무조건 한 병에 만 원. 술값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안주가 공짜다. 술 세 병 기본 상차림에 생선회부터 생선 구이, 소라, 멍게, 새우튀김, 전복죽까지 온갖 해산물이 딸려 나온다. 술 한 병을 더할 때마다 새로운 해산물 안주가 추가된다. 해산물의 종류는 철마다, 날마다 바뀐다. 주인이 새벽 어시장에 가서 싱싱한 것들을 골라온다. 다찌 집은 한자리에서 싼값에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맛보고자 하는 술꾼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다. 그래서 '다찌'의 어원이 '다 있지'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다찌 집은 사철 풍부하게 해산물이 공급되는 통영 같은 어항에서만 가능한 문화다.

허름한 시장이지만 점심 예약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주인 부부는 생선을 굽고 홀 한 편에는 다듬다만 마늘종이 그대로 놓여 있다. 주방 쪽에서 머리에 비녀를 꽂은 노인 한 분이 느리게 걸어 나와 홀 청소를 한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치우고 빈 물통에 물을 채운다.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은 팔십이 넘어 보인다. 이마는 주름이 깊고 얼굴은 까맣게 탔다. 안주인의 친정어머니일까. 노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나이든 노인이 노동할 수 있는 건강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노인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힘에 부치는 노동. 노인은 혹 주인의 가족이 아니라 품팔이를 온 것이 아닐까. 시리다. 식탁에 나온 참나물도, 콩나물도, 배추 겉절이도 모두 저 팔순 노인의 손을 거친 것이다. 손님이 들기 시작하자 노인은 소리 없이 뒷문으로 사라진다.

바람의 통로_ 제주 가파도



성게 향 가득한 포구


가파도는 바다와 거의 수평이다. 섬 전체에 산이나 언덕이 없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이 20.5미터다. 언뜻 보면 섬은 물에 잠길 듯이 위태롭지만 사람살이 내력은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제주도 내에 남아 있는 180여 기의 고인돌 중에 135기가 가파도에 있다. 가파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왕돌'이라 부른다. 가파도의 왕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다. 판석을 세우지 않고 지하에 묘실을 만든 다음 작은 굄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왕돌의 나라. 이 손바닥만 한 작은 섬도 그 옛날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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