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한국 근대사 산책 7: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7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 372쪽 / 14,000원



간토대학살과 의열투쟁


조선에선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노동 착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토(關東) 대지진 때 일어난 간토대학살은 일본에서 자주 벌어졌던 집단학살 중 최악의 것이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진도 7.9의 격진이 밀어닥쳐 14만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채가 전파(全破)·소실됐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둑질을 하고 불을 지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에 현혹된 일본인들은 도시 빈민들로 구성된 자경단을 중심으로 '조선인 사냥'에 나섰는데, 당시 도쿄 일대에 살던 조선인 3만 명 가운데 6000여 명이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9월 1일부터 6일 사이에 무차별 학살됐다. 학살 방법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웠다. 일본인 자경단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를 구별하기 위해 '15엔 55전'이나 '10엔 50전'을 일본어로 발음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어에는 머리글자에 탁음이 없기 때문에 이 발음만으로도 조선인을 가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10엔 50전'을 '쥬엔고쥬세엔'이 아니라 '추엔코쥬세엔'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조선인으로 간주되었다. 발음에 문제가 있으면 일본인이라도 조선인으로 몰려 살해되기도 했다.

2003년 8월 25일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 정부 자료와 형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조선인 학살을 유발한 유언비어가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됐다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간토대지진 80년 만에 일본의 공공 단체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 호세이대학 명예교수 마쓰오 쇼이치(松尾章一)도 2003년 9월에 출간한 『간토대지진과 계엄령』에서 대학살은 일반인이 조직한 자경단이 저지른 것으로 치부돼왔지만 실은 계엄령 아래 치안을 장악한 군대와 경찰이 직접 개입했다며 그 증거를 밝혔다. 쇼이치는 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 정부가 다른 아시아 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 사상을 국민에게 주입한 결과라고 했다. 군부의 학살 가담에 대해서도 '일본 사회 내의 조선독립운동세력,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혁명세력을 일거에 진압해 국가총동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토양을 조성하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의열투쟁의 모습도 짚어보자. 당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투쟁 단체인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자기 노선의 정당성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의열단은 묵묵히 의열투쟁에 임하고 있었지만 의열 활동이 모든 이들로부터 환영받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22년 말, 김원봉은 베이징으로 신채호(1880~1936)를 방문하여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의열단이 행동만 있고 선전이 뒤따르지 않으면 일반 민중이 겉으로 나타난 폭력만을 보고 그 폭력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신채호를 만난 것이다. 신채호가 이 요청에 응해 김원봉과 함께 상하이를 방문하고 유자명(1891~1985)의 도움을 받아 1923년 1월에 내놓은 것이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사진)이다.

'조선혁명선언'은 무정부주의 사상가 바쿠닌(Mikhail Aleksandrov ich Bakunin, 1814~1876)의 '총파괴' 노선에 폭력행동을 주장하는 상디칼리즘이 가미된 이른바 아나코 상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에 입각하여 기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나키즘의 테러리즘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크로포트킨(Peter Alekseevich Kropotkin, 1842~1921)의 이론을 기반으로 민족주의적 사상과 접목한 글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선혁명선언'은 우선 '내부의 적'에 대해 경고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론자나 강도(强盜)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한상도는 "'조선혁명선언'의 완성으로 의열단은 항일투쟁 노선을 한층 더 정당화시키고 이념적 지표로 삼게 되었다"고 했다.

자치운동과 출세주의

의열투쟁과는 달리 자치운동도 일어났다. 1923년 5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이광수(1892~1950)는 <동아일보>(1924년 1월 2일~6일)에 5회에 걸쳐 장문의 논설 '민족적 경륜'을 썼다. 그는 이 논설에서 일본을 부인하는 무장 항일노선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하는 자치운동을 주장했다. 이 논설은 반향이 매우 나빠 <동아일보> 불매운동까지 벌어졌다.

<동아일보>는 '민족적 경륜' 파동에 대해 '수사(修辭)의 졸(拙)'이라고 해명했지만, 최민지는 이 논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 인촌 김성수(1891~1955)가 경영하던 경성방직과 총독부와의 관계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총독부 당국은 1924년부터 김성수의 경성방직에 사업보조비라는 명목으로 해마다 막대한 보조금을 주었고, 그 결과 기업적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불경기와 일본의 조선 경제의 수탈 착취로 일제하에서는 민족경제나 민족자본의 성장은 불가능하였다. 이런 속에서 막대한 일제의 보조금으로 성장한 경성방직과 김성수를 생각해볼 때 <동아일보>가 일제의 식민 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동아일보>는 그들과 일면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원을 얻어 내고 동포들에게는 민족산업을 장려 육성하도록 호소함으로써 판로를 확보하는 양면 작전을 써왔다. 이것이 곧 그들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으로서의 경제운동이었다."

권희영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만일 우리가 정치를 본질적으로 '타협'이라고 볼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총독부 권력과의 '타협'은 필요했다.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가 중심이 되어 전개했던 자치론, 이광수의 사회사상 등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1922년에 나온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나 1924년부터 본격화된 '자치운동'은 그 선의야 어찌되었던 조선 민중을 상대로 일제의 조선지배를 당연시하는 처세를 할 걸 권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전에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던 '출세(出世)'라는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1920년대 중반부터였다. 이에 대해 최봉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문화의 유입과 함께 '출세'라는 일본식 용어가 수입되어 재가자(在家者)가 스님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난다는 의미의 출세라는 단어에 이와는 정반대의 의미, 즉 세속적 성공으로서의 출세라는 의미가 새롭게 첨가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여 다른 사람의 이목과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일시에 성공을 거두는 '출세작'이라는 일본어는 타협적 신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지식인들의 요구와 잘 부합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추구된 입신양명은 국가라는 무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를 잃은 식민지에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백성이 추구하는 것은 양명이 아니라 출세였다. 출세는 역사적 명예가 아닌 당장의 성가(聲價)를 추구하는 것으로, 유행과 인기에 의존하는 대중문화의 성장과도 부합하였다. 이에 따라 점점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출세인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사회로 변모해 갔다."

자치운동과 더불어 확산된 출세주의 문화의 첨병노릇을 하게 된 것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사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 의한 교육운동을 억누르고 식민지배의 효율화를 노려 1924년 5월 총독부령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은 특별한 위치를 점유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요보'-이 말은 조선인들이 많이 쓰는 '여보'란 말에서 나온 말로 '조센징'보다 좀 더 풍자적이고 무시하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 말이었다. 천정환은 '조센징'의 상대어가 '왜놈'이라면 '요보'는 '쪽바리'나 '게다짝'의 상대어라고 했다-라고 부르며 '조선인 주제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조선인을 모욕하곤 했는데, 경성제국대학 출신은 사회적으로 '요보'의 굴레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잡지《개벽》(1924. 7.)에는 경성제국대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 그 엄청난 경비는 물론 조선인의 고혈을 짜내 벌어들이는 세금으로 충당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 중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168명 학생 중 조선인은 고작 44명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인에게는 출세의 등용문이었다. 들어가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조선인들 사이에 출세 경쟁을 유발하는 효과를 냈다. 조선인은 공부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사상 및 신분검증을 받아야만 경성제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간 조선인은 출세의 '보증수표'를 거머쥔 셈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후에도 각 부문의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김상봉은 "경성제국대학은 식민통치를 직접 담당하는 관료기구와 식민통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는 교육권력, 그리고 식민지 수탈을 위한 공기업 등 이 땅의 주요 권력기관에 진출하여 식민통치를 돕는 토착 권력집단의 모태가 되었다"며 "경성제대 이외의 대학을 불허하여 대학교육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을 뿐 아니라 하나뿐인 대학을 참된 학문공동체가 아니라 한갓 권력 획득과 출세의 도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대학교육을 왜곡하고 이후 한국 사회에 학벌주의의 씨앗을 뿌렸다"고 했다.

한반도를 휩쓴 사회주의 열풍

1920년대 한반도엔 사회주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윤치호는 사회주의 성장 원인을 기본적으로는 일본 통치에 의한 조선인의 '걸식 상태'에 있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타인에 빌붙어 살 능력밖에 없는 민중이 '부자의 집과 토지의 몰수에 의해 그 기생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열풍은 이런 시각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사회주의 사조(思潮)는 1917년 러시아혁명, 1919년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등 1910년대 후반의 세계사적 상황으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특히 3·1운동은 '한국 사회주의 어머니'였다. 3·1운동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친일인사나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각종 청년단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1923년부터는 국내 사회주의 단체들의 헤게모니 경쟁이 치열해질 정도였다.

사회주의가 인기를 누리면서 나타난 것은 한국 특유의 '쏠림' 현상이었다. 배경식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사회혁명을 논하지 않는다면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시대 풍조가 나타났다. 사회주의는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아니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청년'같이 생각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심지어 사회주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처세의 상식'이란 치장용의 지식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 이러한 자들을 비아냥거려 일본 경찰은 '마르크스 보이' 또는 '겉만 빨간 홍당무나 사과'라고 하였다"고 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결성된 단체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카프(KAFE, 진보적 문학예술운동단체) 등이다. 카프의 경우는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 문학운동체로 확대되어 한국 문단을 거의 휩쓸었는데, 김병익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으로부터 깊이 침투한 사회주의 이론이 미처 기본적인 원론조차 정리하지 못한 우리 문학계를 쉽사리 굴복시킬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힘과, 유산가의 착취에 반항하는 그들의 노선이 식민지 착취에 반항하는 민족주의자들의 태도와 혼동되는 당시의 지적 취약성 때문이었다"고 했다. 사회주의가 풍미하면서 기독교는 비난을 받았다. 영토 확장 제국주의의 수족이자 자본주의 국가 옹호의 무기로써 민중에게 인종(忍從)과 유순(柔順)의 도덕을 가르치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난이었다. 권희영은 "공산당의 반종교운동은 기본적으로는 공산당 사상이 종교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며 "한인사회주의자들은 몰자아적으로 소련공산당 및 스탈린에 헌신적으로 되어갔으며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조차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로 스탈린과 소련에 정서적으로 고착되어 있었다"고 했다.

일제는 사회주의 유행에 대해 치안유지법으로 대응했다. 1925년 5월 12일부터 시행된 이 법의 목적은 "국체의 변혁이나 사유재산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근절하는 데 있었다. 이 법의 시행으로 1925년부터 1938년까지 1만 8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6·10 만세운동의 폭발

6·10 만세운동은 조선사회가 일종의 신드롬에 빠져들면서 폭발된다. 1926년 4월 25일 아침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이 52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숨을 거뒀다. 천정환은 "당시 대중은 순종의 죽음을 통해 조선 왕실의 몰락을 보면서 새삼 국가 상실의 회한을 느꼈던 것일까. 국왕에 대한 추모와 민족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남녀노소 계급계층을 가리지 않고 크게 번졌다. ……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통해 썰물처럼 밀려나가던 '봉건'과 밀물처럼 들어오던 '근대'가 부딪쳐 해일을 일으켰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28일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일본의 낭인이 만든 보수우익 조직인 국수회(國粹會)의 모독 사건이다. 국수회 회원 10여 명이 자동차를 몰고 상중인 경복궁 정문으로 돌진하여 모여 있던 궁궐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는데, 이들에 대한 경찰의 제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사건은 평소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흠모해 오던 송학선(1897~1927)의 의거다. 송학선은 사이토 총독이 조문 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 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 송학선은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얼마 후 그들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 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그러나 송학선이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른바 '금호문 사건'이라 불리는 이 일로 송학선은 사형을 언도받고 이듬해(1927. 5. 19) 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因山)일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 폭발한 것이다.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운동 주체는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규모 군중시위를 전개했다. 만세운동 당시 뿌려진 격문들은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일본 물자를 배척하자! 조선인 관리는 일체 퇴직하라! 일본인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라! 일본인 교원에게는 배우지 말라! 일본 상인과의 관계를 단절하라!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군대와 헌병을 철거하라! 재옥 혁명수를 석방하라! 보통교육은 의무교육으로!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철폐하라! 일본 이민제를 철폐하라!"였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들은 서울에서만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2만 명이 넘는 학생들의 맹휴(盟休)가 이어졌다. 운동의 주체는 누구였던가. 이는 학계의 오랜 쟁점이다. 그간 학생단체와 천도교의 합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역사교과서에 '좌우합작 운동'으로 표기해 좌파계열의 공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