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
정양원 지음 | 에코리브르
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
정양원 지음
에코리브르 / 2009년 1월 / 400쪽 / 18,000원
연금술사, 성, 궁녀의 기술 연금술사, 성, 궁녀의 기술은 마약을 통해 남성의 양기를 보충하고 정액을 강하게 하고 정력을 되찾는 기술을 의미한다. 《담정준( 精雋》은 '서역과 몇몇 바다 건너의 나라들은 허푸롱(合甫融)이라는 약을 생산하는데, 이것이 우리 중국에서 아편이라 부르는 것이다. 모양은 몰약처럼 생겼는데 진한 노란색이고, 황소 아교처럼 끈적끈적하다. 맛은 쓰고 과도하게 열을 올리며 독성이 있다. 주로 남성의 양기를 보충하고 정액을 강하게 하며 정력을 되찾는 데 쓰인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아편이 최초로 의약에서 마약으로 전화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편은 원(元) 왕조까지 여전히 약용으로 쓰였다. 신의라고까지 불리던 이고(李 )는 그의 역작 《식물본초》에서 아편이 설사에 가장 좋은 약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1483년에 이르러 아편은 설사와 일사병 같은 각종 통증에 효험이 있는 약에서 연금술사와 성교와 궁녀의 기술로 전화되었다. 1483년은 명 왕조 중기였고, 외부인에게는 중국이 장중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막상 황궁 내부는 성 추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제위에 있던 성화 황제의 관심이 바로 연금술사, 성, 궁녀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환관들은 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으며, 마약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마약이 생산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파견되었다. 이제 아편은 '성공의 사다리'로 이용될 정도로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편이 황실과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된 이유는 먼저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조공국들이 아편을 중국 황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조공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궁녀로 둘러싸인 황제가 아편의 힘으로 '성 유희'를 즐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관들이 아편을 황제에게 진상하는 것이 일신상의 영달을 도모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권욕이 강한 대신들의 조장 때문이다. 황제가 아편에 탐닉하면 할수록 대신들은 정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던 것이다. 아편에 탐닉했던 대표적인 황제가 성화, 주익균이었다. 만력이라는 제호로 불려진 주익균은 아편 흡연 때문에 발생한 불치병 때문에 25년 동안이나 회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편의 새로운 역할(연금술사, 성, 궁녀의 기술)은 1578년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집필한 이시진을 통해 그 맥락이 명료해진다. 아편이 의약에서 마약으로 변모된 사실은 아편이 욕망과 사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전환(diversion)' 즉 어떤 특정한 경로로부터 일어나는 상품의 전환이다. 성화의 대신들과 환관들은 아편을 새롭게 해석했으며, 아편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아편의 역사를 다시 썼다. 마약으로서의 아편, 혹은 아편의 '방향 전환'은 왕조를 초월해서 지속되었으며, 잡초처럼 그 생명력을 왕성하게 이어갔다.
왕조 교체기 티머시 브룩(Timothy Brook)은 《케임브리지 중국사(Cambridge History of China)》에서 "명이 지배하던 3세기 동안 중국인들의 인생 경험은 엄청나게 변화했다"고 쓴다. 그 변화 중 하나는 담배 흡연이었다. 17세기에 마약으로서의 아편은 식자층에게 한정된 지식이었지만, 담배 흡연은 보편적인 유행이었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소개된 흡연 행위는 중국인들에게 소비문화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은 늘 용광로였으며 그들의 문화는 여러 정체성이 모인 집합체(constellatiln)였다. 담배 흡연 같은 외래 상품과 여가 방식은 경제와 사회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만일 담배 흡연이 없었다면, 중국에서 아편 흡연이 싹트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담배 흡연은 아편 흡연의 토양을 마련했던 것이다.
담배 경작과 판매를 수월하게 하고, 담배 흡연을 보편화시킬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명나라 화폐를 매개로 한 도시의 시장경제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담배 재배가 확산되고 전국적으로 흡연이 여가로 자리 잡으면서 연(煙) 문화라는 독특한 담배 문화가 생겨나고 번성했다. 중국에서 담배가 토착화되는 과정은 영국에서 설탕과 차가 토착화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영국에서 설탕은 두 세기도 못 미처 토착화되었다. 중국에서 담배도 그랬고, 아편도 곧 그럴 예정이었다. 이런 상품들은 세계화와 토착화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속성을 지닌다. 영국인들은 차를 마시고 중국인들은 담배를 피우던 시기에 이미 세계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의 흡연가들은 흡연을 재정의했다. 흡연은 중국의 수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중국인이라면 남녀와 빈부를 떠나 사진을 찍을 때 늘 담배 파이프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17세기 말, 담배는 '사람들을 마취시키는 것'이었지만, '비연(鼻煙)'이라는 코담배 혹은 '코담배 병(비연호)'은 청 궁중과 고위층 사회를 휩쓸었다. 중국 문학과 청대의 소설이 '코담배'에 탐닉한 이유는 그것을 예술 형식으로 여기며 비연호(코담배 병) 자체를 예술품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엘리트들이 '코담배'에 탐닉하는 것은 품위와 교양의 증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煙) 문화는 중국 왕조가 교체되면서 활짝 피었다. 각기 다른 계급의 소비자들이 그들의 다양한 삶 속으로 연을 흡수했고, 담배 소비 자체가 문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17세기는 흡연의 역사에서 특별한 시기다. 한편으로는 담배 흡연과 코담배 병이 아편의 전례가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 고유의 소비문화였던 아편이 성장할 최적의 토양을 제공했다.
캘리코, 차, 아편의 시대 18세기는 "캘리코(코지코드산 면포), 차, 아편의 시대"로 묘사된다. 특히 의약품이던 아편이 마약으로 바뀌어 확산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중국 소비문화의 더 큰 틀 속으로 융화되어야 했다. 18세기는 아편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수된 시기, 다시 말해 아편 지식이 축적되고 사회화된 시기였다. 아편 확산은 해상무역과 더불어 크리스 베일리(Chris Bayly)가 "원시 세계화"라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광범위한 이주와 문화 전파 체제와 관계가 있다.
1773년에서 1793년까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편 무역 독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수많은 대책을 시도했으며, 결국 아편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중국에 대해 아편 판매에 대한 합법적인 권한을 확보했다. 이로써 제국과 자본가들의 이익을 함께 충족시키는 아편 체계가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아편 무역은 '지방 무역(country trade)'에 의해 훨씬 더 성행했으며, 지방 무역은 밀수입의 창궐을 가져왔고, 더 나아가서 중국, 영국, 네덜란드 등 각국의 무역국에서 아편 무역에 손을 대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없었더라면 아편 무역은 크게 성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아편이 중국의 성 유희 산업과 연결되자 아편의 이용은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식자층과 도시 부유층에게는 필수품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아른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썼고 찬양했다. 아편은 일반 대중 속에서 그들 자신을 위해 문화적으로 재해석되고 사회적으로 재정의되었다. 아편문화와 흡연양식을 해석하고 만드는 이들은 도시민과 문인, 그리고 세련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아편을 구할 여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편을 즐길 줄 알았으며, 엘리트들의 소비는 아편 소비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재산을 모으기 위해 중국 남부로 온 프랑스의 젊은 상인 샤를 드 콩스탕(Charles de Constant)은 "중국인들이 아편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으며 이 열망은 필수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아편, 담배, 코담배는 모두 '옌', 즉 연(煙)으로 불렸고, 건륭 제위기에는 신분 고하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연 문화가 번창했으며, 건륭 황제 자신도 흡연을 크게 해로운 것으로 보지 않고 코담배에 탐닉했다.
관료 사회 고위직과 하위직의 취미 중국에서 아편이 확산되는 과정은 문인 관료 조직에서 아래로 침투했으며, 항구 도시에서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아편의 확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즉 계급적 관점과 지리적 관점이다.
아편 흡연은 왕실에부터 시작되어 환관으로, 그리고 엘리트 층으로 확산되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 중의 한 본보기가 청조의 여섯 번째 황제가 될 가경의 둘째 아들 민녕이다. 민녕은 왕자 때에 아편을 즐겼으며 아편 파이프를 만드는 데 재주가 있었다. 민녕이 아편 흡연자였다는 것은 그를 수종들었던 수많은 하인들(환관들)에게 아편의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너선 스펜스(Jonathan Spence)는 환관 제도와 황실의 등급 자체가 아편 흡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환관들과 황가 구성원들은 다른 시대라면 정치권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음직한-예를 들면 명 말기 환관이나 청 초기 만주 귀족들처럼-보호된 환경 안에서 따분한 일상을 보냈다." 환관은 궁 안팎에서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에 시달렸으며, 그들은 번번이 황제, 왕자, 궁녀들의 평판을 위태롭게 하는 각종 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왕자들과 패륵(왕실 사람들에 대한 존칭)들이 아편을 즐기고 있을 때 그들은 무단 수색을 당하고 아편 흡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 "원숭이에게 겁을 주려면 그 앞에서 닭을 죽여라"라는 유명한 속담과 같다.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인 환관들은 은신처에 모여 그들이 받은 스트레스와 울분을 아편을 탐닉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콩스탕은 정치적 압력과 중국인의 아편 중독 사이에서 직접적인 연관성을 보았다. 루이 테미니(Louis Dermigny)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부연했다. "아편 소비의 증가는 정치적 폭정과 함께한다." 전제 정치는 대중의 심리와 행위를 형성한다. 중국인들의 내성적인 성품과 결합된 억압적인 정치 환경은 그들이 아편에서 위안과 안정을 찾도록 유도했다. 달리 말하자면, 아편 흡연은 영혼을 고양시키고 다른 세계로 도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위안을 안겨주었다. 좌절이나 인생의 고역으로 인한 위축은 아편 소비를 부르는 동기 중 하나다. 이런 맥락에서 아편은 사회 정치적인 마취제와 같았다.
아편 파이프가 왕자에게서 환관으로 전해지는 동안 지리적으로는 내륙과 북방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아편의 지리적 확산은 아편 밀수입과 아편의 국내 경작이 선봉대 역할을 했다. 이윤 추구형 농부들은 명조 말에는 담배 경작으로, 청조에는 아편 경작으로 전환했다. 또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 아편에 대한 인식이 자라나고 있을 때 대중들의 관심에 편승하여 밀수도 나란히 증가함으로써 이 증대되는 대중의 수요에 맞추어갔다. 외국 밀수업자들은 아편을 광둥까지 배달하고 이것을 내륙으로 운송하고 배급하는 일은 중국인들 스스로 해야 했다. 아편을 광대한 지역으로 나르는 일은 비전문가들의 몫이었지만, 내륙 수송과 배급은 대부분 전문가, 즉 상업조합에 맡겨졌다. 결론적으로 아편의 지리적인 확산은 국내 경작과 수요 증대로 인한 밀수의 확장, 상업조합이라는 발달한 수송과 배급 체계 때문이었다.
친왕에서 환관과 관료 사회의 고위/하위 관리들로, 그리고 학생, 장교, 매관, 조합 상인을 거쳐 아편은 가경의 짧은 제위기 동안 대중에게 다가갔으며 내륙으로 나아갔다. 화폐 시장의 도시경제는 한때 담배 확산에 일조했는데, 이제는 아편 확산을 도왔다. 가경은 아편 판매와 사용을 금하려 했지만, 포고령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1819년 육순 잔치에서 가경은 총애하는 왕자들과 고관들에게 정교한 코담배 병을 하사했다. 코담배 병은 엘리트 문화와 황제 후원의 상징이었고, 가경 제위기에는 그 생산이 정점에 이르렀다. 아편 흡연은 인기를 더해가면서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과서적인 의미의 소비자 트렌드를 이루지는 못했으며, 이것이 실현되기까지는 도광 제위 초기 1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편 소비에 대한 정치적 재정의 1835~1836년에는 아편 소비가 급증했는데, 이와 같은 아편 소비의 급증 현상은 아편이 더 이상 교양과 세련의 표시가 아니라 하층계급들이 아편 흡연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아편이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 흡연은 하층계급이 참여하면서 흡연의 속성이 바뀌었으며, 이것은 아편 소비를 정치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은 더 이상 상류사회의 고상한 기호품이 아니라 삶을 파괴하는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1830년대에 일어났던 야오(瑤)족의 반란과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은 아편의 보급 상황과 그 폐해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사례가 된다. 야오족은 광둥과 광시, 후난 지역 난령 산맥 부근에 사는 소수민족이었다. 당시 총독 내무부 대신이었던 희은(禧恩)이 새 총독으로 임명되어 반란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진압 과정에서 긴급한 소가 올라왔다. "1만 명 이상의 병사가 있지만 열에 일곱은 광둥 토박이다. 그들은 겁쟁이어서 산으로 진격하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연안 지역에서 온 병사들은 대부분이 아편 흡연자다." 병사 열에 일곱은 아편 사용자였다. 이것은 병사 1만 명 중 7,000명은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다. 결과는 패배였다. 병사의 대부분이 아편에 중독되자 그들은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할 용기가 없었으며, 군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전쟁은 역사였고, 무용(武勇)은 추억이 되고 말았으며, 아편은 전쟁 기계들을 무장 해제했다. 하지만 여기서 실패한 것은 아오족과의 전투뿐만 아니라 1차 아편전쟁 자체였다. 그 전쟁도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상황에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 아편 흡연자의 수효가 급증하고 아편 흡연의 폐해가 확산되자 '세 법복들(성직자, 귀족, 자유전문직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쑨중산('손문'이라고 불러왔던 중화민국 정치가 순원)이다. 쑨중산은 "아편이 온 나라를 망쳐놓았으니 이것을 근절하지 않고는 회생할 수 없다"고 설파했다. 쑨중산의 아편 금지운동은 애국 세대들을 자극시키고, 아편 소비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재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범국가적인 정화작업의 불씨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핵심을 찔렀다. "현재 일본과 치르는 전쟁은 아편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편전쟁은 중국 인민들이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해온 끊임없는 투쟁을 대표한다."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들을 멸망에서 구해내려면 제국주의와 그들이 몰고 온 악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밖으로, 그리고 아래로의 '침투'
아편은 문인들이 아편의 가치와 상징을 창안하던 시기에 '강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은 18세기 도광 통치(1820~1850) 초기에 추진력을 얻었다. 전쟁 간 시기(1842년 1차 아편전쟁이 끝난 무렵부터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종결되기까지)에는 아편 확산이 나타나고 국내 경작과 밀수가 증가함으로써 아편이 일반적인 것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이 소비의 가장 중요한 국면이다.
아편은 이미 1800년대부터 국내 경작을 시작했다. 국내 경작이 시작된 이래로 국내 경작은 급속하게 확산되었는데, 이 국내 경작의 증가는 지방 관리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운귀 총독으로 있던 원원과 원난 순무로 있던 이리포는 도광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소를 올렸다. "야만인(버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따뜻한 기후에 기대어 항상 양귀비를 재배합니다. 이들은 즙을 모아 끓여서 푸롱(芙蓉)을 만들어 이를 아편으로 팝니다." 지방 관리들은 양귀비 재배 현황에 대해 끊임없이 황제에게 그 실태를 보고했다. 양광 총독 이홍빈은 차오저주 지역에서의 아편 재배 상황을, 쓰촨 총독 악선은 쓰촨 서부에서 아편 재배의 사실을 보고했다. 도광제와 함풍제 시기의 관료였던 장집형은 비단길 지역의 양귀비 재배 실태에 대해서 "지천에 양귀비꽃이고, 오뉴월이 되면 구름처럼 꽃이 피어난다. 여자와 노인과 젊은이들이 대나무 칼과 구리 양동이를 들고 즙을 얻는다. 장쑤와 저장 상인들이 큰돈을 들고 모여 든다." 서남과 서북 지역은 아편 공급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편은 농민들의 주요 소득원이었으며 어떤 때는 유일한 소득이기도 했다. 처음에 시작된 국내 경작은 자발적이었지만, 20세기 초가 되어 군벌과 정치 조직들이 아편에 대해 징세와 거래를 통제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경작은 비자발적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