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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정구선 지음 | 애플북스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정구선 지음

애플북스 / 2009년 2월 / 292쪽 / 12,800원





맑은 솔바람 소리 들으며 도를 지키리라_ 성수침


성수침은 창년 성씨 성송국의 9대 손으로 성송국의 집안은 유독 처사와 충신이 많았다. 성송국의 7대 손이 바로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이다. 성수침의 인간됨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수사선도(守死善道, 목숨을 걸고 바른 도를 지킨다)'이다. 그렇다면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효도였다. 성수침은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우와 함께 산소 옆에 지은 여막에서 죽으로 연명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예순이었으나, 슬픔에 겨워 병을 얻어 혼절을 거듭하면서도 3년간의 여모살이를 마쳤다. 당시에는 경명행수(經明行修)라 하여 유학의 도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이가 훌륭한 선비로 인정받았다. 그는 효를 몸으로 실천하는 데 힘쓴 진정한 경명행수의 선비였다.

성수침은 그의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속세를 떠나 서울의 북악산 아래에 집을 짓고 청송당(廳松堂)이라는 현판을 달고 문을 닫아건 채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날마다 성인의 교훈을 외우며 태극도(太極圖)부터 정주서(程朱書)에 이르기까지 손수 일일이 베껴가면서 의리를 탐구하되 속된 생각으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친구인 조식과 더불어 당대의 대표적인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로 추앙받았다. 사람들은 "조식은 학문이 고명하고 성수침은 조용히 뜻을 기르고 깨끗이 몸을 닦는 사람이니 모두 일세의 고사(高士)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그를 천거하여 등용하려고 했다. 그가 처음 천거를 받아 관직에 임명된 것은 중종 35년(1540년)이었다. 조정에서 후릉 참봉에 제수(除授)했지만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한 뒤에도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그는 역시 계속해서 사퇴했다. 그후에도 6품 벼슬인 내자시 주부에 임명했으나 그가 취임하지 않자 곧 다시 예산 현감에 제수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가 관직에 나오기를 바라고 여러 번 고을을 바꾸어가며 현감에 임명했지만 끝내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성수침은 타고난 재질이 매우 높았으며 인품은 성실, 중후하고 너그러운 데다 헌칠한 키에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풍격(風格, 사람의 풍모와 품격)이 탁월했다. 일찍이 그는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도란 큰길과 같다는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한데 어찌 알기 어렵다 하겠는가.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골방의 학문은 일을 이룰 수 없다"라고 하여 지식의 실천을 특별히 강조했다. 평상시 그는 지극히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친척 중에 곤궁한 자가 있으면 아낌없이 돕고자 했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언제나 감탄하고 사모하여 잊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을 보면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은미(隱微)한 뜻만을 보여 스스로 깨닫게 했다.

그의 사후 숙종 때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지고 증직(贈職, 죽은 신하에게 내려지는 직책)이 더해졌다. 숙종 9년 조정에서는 "성수침은 도덕과 행의(行義)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증시(贈諡)의 은전을 내려야 합니다"라는 건의에 따라 그에게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서 숙종 11년에는 증직을 더해야 한다는 청에 따라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했다.

임금이 노해도 내 뜻을 꺾지 않으리_ 조식

경상도 삼가현에 태어난 조식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의 대유학자 노재 허형이 말한 "이윤(伊尹, 중국 은나라의 이름난 재상)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顔子,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과거 공부를 폐기하고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써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식을 평가할 때 "경상도의 상도에는 이황(李滉)이 있어 학문을 숭상했고, 하도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를 높였다"라고 할 정도로 조식은 이황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유학자였다. 그는 식견이 밝고 슬기로웠으며, 언론은 재기가 번뜩이고 강렬하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학문은 정밀하고도 광범위하며, 장성한 뒤에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는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놓고 제자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에 이 두 가지 있으니, 하늘과 해와 달이 만고를 밝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그 속뜻을 요약하면 이 두 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임종 시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두 글자는 해와 달처럼 폐할 수 없다"라고 했다. 조식은 향촌에 묻혀서 학문을 연마하는 동시에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쳐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그의 교육 방법은 독특했는데, 제자를 가르칠 때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하고 칼끝을 턱밑에 괴어 혼미한 정신을 일깨웠다고 한다.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수제자인 김우옹에게, 칼은 가장 아끼는 제자 정인홍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조식은 여러 번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로 천거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일로 천거된 뒤 중종 때 처음으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명종 때도 6품 관직을 여러 차례 제수했으나 상소만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명종 7년 10월에는 6품직인 전생서 주부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며, 명종 10년에는 경상도 단선 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관직을 사퇴했다. 그뒤 명종 21년 8월에 다시 상서원 판관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조정에 나왔으나, 대궐에서 임금을 한 번 뵙고 치란(治亂)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아뢴 뒤 곧바로 낙향했다.

조식은 제동장치 망가진 자동차처럼 겁 없이 돌진하여 임금과 신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조식은 "당시의 관리들이 '공사(公事)'를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일삼으면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말 건드리면 안 될 부분까지 건드리고 말았다. 임금의 모친으로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그 유명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조식은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임금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면서 임금은 모름지기 덕치를 행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존망이 달려있습니다."

선조 5년에 조식이 7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임금은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줌)하고, 사헌부 대사헌을 증직했으며, 광해군 때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색 속에 지혜가 깊어지니 해 저무는 줄 모르네_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진 서경덕은 개성 사람으로 원래 집안이 변변치 못하고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스스로 분별하여 학문에 힘썼고,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며 뜻을 넓혔다. 젊었을 때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의 소과에 응시해 진사에 올랐으나, 곧 과거 공부를 접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그의 학문의 요체는 오로지 궁리(窮理,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와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궁극에 도달함)이었는데, 며칠씩 묵묵히 앉아 이치를 탐구하기도 했다. 그의 공부 방법은 자득(自得)과 깊은 사색이었다.

서경덕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 광해군 때의 정승 이항복은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서경덕은 학문의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지 않는 땅에 총명하고 고매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 궁극에 이르러서는 학문적 자세를 견지하며 사색을 통해 지혜를 터득했다. 그야말로 한 번 발을 내디뎌 도의 경지에 다다른 자라 할 것이요, 한때의 호걸지사(豪傑之士)라 할 수 있다. 근세의 학자들은 스스로 터득한 경지가 있다고 대단하게 평가하면서 그를 이황과 병칭(竝稱)될 수 있는 인물로 본다."

서경덕은 뛰어난 학문으로 명망이 높아 중종과 명종 때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아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가 처음 천거된 것은 중종 35년 7월로, 후릉 참봉에 제시되었으나, 그는 "이미 늙었는데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라며 극력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관직을 극구 사양했지만, 당시의 세대는 관직을 사양하기는커녕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엽관(獵官, 뇌물로 관직을 얻음)이 크게 성행했다. 중종 말엽에는 관직을 탐하는 엽관 행위의 만연으로 청탁과 뇌물이 횡행하여 재상은 물론 궁녀에게까지도 뇌물을 바치는 실정이었다.

살아생전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사후에 그의 학문을 기려 그에게 호조 좌랑에 이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죽은 후 명종은 "서경덕은 성수침과 명성이 같다고 했으니, 증직하는 전례를 빼놓을 수 없다. 네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하여 그의 증직을 의논하도록 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성수침과 비견된 당대 최고의 유일이요 처사였기에 명종이 성수침과 걸맞은 증직을 내리려 한 것이다.

먼지 없는 거울 같고 물결 없는 물 같더니_ 성운

성운은 성수침의 사촌 아우며, 선조 때의 대유학자인 성혼이 그의 당질이다. 그를 대곡선생 또는 대곡처사라 일컬었다. 그는 젊을 적부터 은둔(隱遁)의 뜻을 품었으므로, 성균관에 잠시 들어갔다가 즉시 과거 공부를 접고 아내의 고향인 보은의 삼산현 대곡에 들어가 은거했다.

성운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학문을 닦아서 덕기(德器)가 일찍 성취되었으므로 안으로는 엄숙하고 정직했으며, 밖으로는 평탄하고 화평했다. 그와 친교가 있던 조식이 그를 평하여 말하기를 "성운은 속에 빛을 머금은 정련된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또한 대신 노수신은 "선생은 온아(溫雅)하고 과묵하며 초연히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겸양하는 마음을 지켰으므로 일생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평했다. 성운은 조정에서 여러 번 징소(徵召)를 받았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처사의 삶을 살았다. 임금이 그의 풍도와 기절(氣節, 기개와 절조)을 높이 평가하여 수시로 먹을 것과 의복을 하사했으며,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의를 보내게 명하기도 했다.

성운의 학문은 공경(恭敬)에 근본을 두고 실천을 우선했으며, 용모를 장중하게 하고 항시 몸가짐을 공순하게 하여 마치 신명을 대하듯 엄숙했으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있을지라도 자제나 집안 사람들이 그의 나태한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인사(人事)에 주력해서 공부했기에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데부터 평범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실천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는 또한 학도들을 모아 강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일이나 나랏일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초연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죽음에 이르자 선조는 장사 지내는 데 드는 제반 물품을 관에서 지급하라 명하고 예관을 보내 사제하게 하고, 제문을 지어 보냈는데, 그 제문에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임금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

백성을 위하는 그 마음, 벼슬로 어이 다 펼치리_ 이지함

《토정비결》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맑은 마음을 지녀 욕심이 적었으며 뛰어난 재능과 식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뿐만 아니라 의학, 복서(卜筮, 점), 천문, 지리 등에 정통했다.

그는 처신이 분명했으며 특히 여색을 조심했다. 젊은 시절에 지방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들이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이름난 기생을 시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하면서 색욕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소에 욕심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짚신에 삿갓 차림으로 천하를 주유(周遊)했으며, 도학과 명절(名節)이 있는 선비와 사귀었다. 특히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지 찾아갔고, 그와 함께 담소를 나누면 기발하고 탁월하여 경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는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했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려고까지 했는데 마침 이웃에 과거에 급제하고 연회를 베푼 자가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마음속으로 천하게 여기고 과거에 뜻을 접었다고 한다.

이지함의 성품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에서 전사한 제자 조헌(趙憲)의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섬기는 사람이 셋 있는데 이지함, 성혼, 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 없는 자세,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으니,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 보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지함은 선조 6년에 학행이 높다하여 대신들에 의해 처음으로 천거되었다. 이지함은 정인홍, 최영경 등과 함께 천거되었는데, 이때 그는 형의 병환 때문에 한양에 올라왔다가 6품 벼슬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 귀를 씻고 돌아갔다. 벼슬을 버리고 떠난 뒤에 다시 포천 현감이 제수되자 잠시 취임해 고을을 다스렸다. 그러나 본래 관직 생활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곧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람하다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그가 아산에서 병사하자 아산의 백성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거리를 가로막고 울부짖으며 다투어 고기와 술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기 어려우면 마땅히 물러나야 하거늘_ 성혼

성혼은 명종조의 처사 성수침의 아들이다. 가훈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행실이 순수했고, 학문에 깊이 정진하여 고을 사람들이 선사(善士)라 칭했다. 그는 천성이 매우 고매했으며 자질이 순박하고 후덕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학문적 특징은 강론과 실천을 아울러 힘쓰고 본원의 바탕에 독실한 것이었다. 청년 시절에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 친우가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이론에 대해 아홉 번이나 서신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는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관직을 하사받았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 천거를 받은 것은 선조가 즉위한 직후였다. 천거된 후 적성 현감으로 임명됐지만, 성혼은 서울에 와서 사은한 뒤 부임하지 않고 곧바로 시골로 돌아갔다. 선조 6년에는 다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이이의 주청에 의해 경연에 출입할 수 있는 파격적인 예우를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사직하자 임금이 일곱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후 선조 13년에 그를 정인홍과 함께 사헌부 장령으로 삼았는데, 성혼이 사직하자 임금이 세 번 부르고 나서 또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병이 있어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니 말과 가마를 주어 올라오게 하라"고까지 명했다. 선조 16년에 병조 참지에 임명된 뒤 마침내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니 임금이 특지(特旨)로 이조 참의에 제수하고 은대(銀帶, 정3품부터 종6품까지의 관리들이 차던 띠)를 하사했으나 모두 사양하자 임금은 매우 서운함을 표했다. 그후 동지중추부사,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과 우참찬에 잇따라 제수했으나 모두 사퇴했다. 그가 이렇게 사퇴를 거듭한 것은 그의 관직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이이와 나눈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즉 그가 이이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기 어려우면 마땅히 빨리 물러나야 한다. 임금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먼저 사업에 힘쓰면, 이는 한 자를 굽혀 한 길을 파는 효과를 추구하는 패자(覇者, 권력으로 일을 성취하는 자)의 일이지 유자(儒者, 학자)의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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