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찾은 책벌레들
정문택, 최복현 지음 | 휴먼드림
도서관에서 찾은 책벌레들
정문택, 최복현 지음
휴먼드림 / 2009년 1월 / 246쪽 / 12,000원
원효(元曉 617~686)_ 책 속에서 깨우친 세상 : 아무리 많은 독서를 했다고 해도 얻은 지식이나 정보를 품고만 있으면 그 독서는 무용지물로 끝난다. 독서는 자신을 교양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활용하는 데 목적이 있다. 원효의 독서법은 일반인과 사뭇 달랐다. 원효는 독서의 시작을 주체적인 자각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책을 읽는 순간 바로 자기의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저서는 자신이 의미 있게 읽은 책들에 대해 스스로 주석을 달고, 필요한 경우에는 나름대로 과감하게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쓴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그는 대승불교의 초기 원전인 『대승신기론』을 읽은 다음에 거기에 나름대로 주석을 달고 해석을 붙여서 『대승신기론소』를 저술했다. 요컨대 그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곧 저술의 한 과정이었다. 물론 원효처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책을 읽든 그 책을 이해할만한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만큼 독서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그와 같은 독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가 했던 독서법은 그야말로 경제적인 독서법이었다.
원효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는 불교에 있어서 선진국이던 당나라로 유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의상과 함께 바닷길을 통해 당항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더 이상 여행길을 재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그들은 어느 흙으로 된 집을 찾아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튿날 잠에서 깬 그들은 깜짝 놀랐다. 자기들이 하룻밤 잠을 청한 곳이 집이 아닌 오래된 무덤이었고, 더구나 원효가 마셨던 머리맡 바가지의 물은 해골에 괸 썩은 물이 아닌가! 여기서 원효는 새로운 진리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진리란 어느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당나라에 가서 유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곧바로 되돌아와 저술과 대중 교화에 힘을 썼다. 원효는 비록 당나라 유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 그는 그만큼 스스로 도를 깨우치고, 깊은 삶의 뜻을 헤아리는 영특함이 있었다. 비록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열심히 책을 읽었고, 깊이 생각했다. 배우기 위해서라면 물 불 안 가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우려고 하는 열정이 남달랐기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만인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_ 책을 읽고 세상을 만들다 : 세종대왕은 다방면에서 많은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가 이룬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선 예악의 정리, 훈민정음 창제, 실록 보관을 위한 4대 서고의 설치는 물론, 과학에서도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제작했다. 그리고 부강한 나라를 지향했던 그는 북으로는 김종서를 시켜 육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했고, 남으로는 쓰시마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한 외교에서도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등 모든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타고난 총명함도 있었지만, 그가 가졌던 독서의 힘이 컸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책 읽기를 무척이나 즐겼다. 그는 자신의 호기심 많은 성격을 우선 책을 통해 얻는 새로움으로 충족시켰고, 그렇게 책을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은 다시 그로 하여금 모든 면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너무 책 읽기를 좋아한 나머지 늘 눈병을 달고 살 정도였지만, 눈을 혹사하면서도 그의 손에선 책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훗날 왕이 되어서 엄청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항상 책 읽기를 좋아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며 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왕이었고, 늘 읽고 배우고 실천하는 성실한 왕이었으며,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는 신하들에게도 독서를 권하는 것은 물론 독서와 연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런 의지와 표현이 바로 집현전 설치로 나타나기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구할 수 있는 한 많은 책들을 구해 그들에게 제공하였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인쇄라도 하여 집현전에 비치하게 했다. 특히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학자들의 독서를 적극 권장하고 독서를 독려하기도 했다. 사가독서제도는 학자들에게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이나 경제적인 여유를 제공하여 책을 읽고, 그 독서를 바탕으로 하여 연구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주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한 세종의 배려와 노력으로 집현전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의 인물이었지만,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국가의 백년대계임을 간파했던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다.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연구에 몰두한 집현전 학자들은 1446년 우리나라의 고유한 문자인 한글을 반포하게 되었다. 세종은 성군이라 불릴 만큼 어질게 나라를 잘 다스렸고, 인재의 중요성을 미리 간파했던 왕다운 왕이었다. 세종대왕의 그런 능력은 바로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독서는 우리보다 전에 살다간 이들의 지혜를 가지게 하는가 하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열어주기도 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독서의 힘을 알았던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자들을 독려하여 독서에 힘쓰게 했다. 세종의 모든 업적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독서를 하고, 그 독서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은 데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_ 조선시대 별난 독서가 : 유학은 물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김수온은 별난 독서가로 유명하다. 젊어서부터 유난히 책 읽기를 즐겼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을 다 읽자 남의 책까지 빌려 읽기 시작했다. 물론 책이라면 어떤 종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게 책을 빌려주기를 꺼렸다. 왜냐하면 일단 그에게 책을 빌려주면 온전히 돌려받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읽는 습관이 아주 독특했다. 책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내용을 다 외울 만하면 그 책장을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한 장씩 뜯어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암기하고, 다 암기하면 그 장은 버리곤 했다. 그러니 그의 책장에 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머리가 좋아 학자로서 성공했다기보다는 순전히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생각을 가진 노력파였다. 총명하지는 못했지만 끈질긴 노력으로 조금은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 살에 그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한 세종대왕은 그를 집현전 학자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당대의 명사인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과 함께 《치평요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김수온,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에 관한 서적을 다수 독파하여 불경에도 통달할 정도였다. 그가 영천군수 자리에 있을 때, 마침 이 고을에는 왕의 비호를 받는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시건방지게 굴며 지방 관리들을 업신여기고 했다. 스님의 행태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던 김수온은 스님에게 내기를 걸었다. "당신은 불교의 전문가이니, 만일 나와 당신이 불교의 이치를 서로 토론하여 지는 사람은 지팡이로 마구 맞아도 때리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기로 합시다." 김수온은 먼저 거침없이 불경을 줄줄 외며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말솜씨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스님은 답변은커녕 머리만 조아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스님을 지팡이로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고, 스님은 이내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무엇을 하든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세웠던 인물이었다. 꼼꼼하면서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 애썼던 그의 독특한 독서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_ 책에서 배운 아름다운 어머니상: 고액권 지폐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 돈에 들어갈 인물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결국 5만 원 권에는 신사임당이 확정되었다.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신사임당을 지폐에 넣는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신사임당이 우리나라 지폐에 들어가는 최초의 여성으로 뽑혔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반증이다. 또 자녀를 잘 키운 어머니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여성들이 활동하기에 많은 제약이 따랐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간 그의 삶을 후대인들은 그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열린 생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둔 덕에 사임당은 어린 나이에도 글을 배우고, 책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한편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처럼 대하며 학문을 깨치게 했고, 자신이 가진 학문 또한 전수해주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자라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산 덕에 비교적 자유롭고 여유롭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자녀교육 또한 그런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었다. 사임당은 이런 환경에서 자란 덕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한 탓에 세상을 읽는 이치에도 밝았던 사임당은 때로는 남편과 세상 돌아가는 대화도 잘 나누었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과의 대화에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성품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사임당은 종종 남편과 대화를 나누면서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지적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어머니였고, 고매한 지성을 갖춘 학자이기도 했으며, 진정한 예술가이기도 했던 사임당은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세상을 보람 있게 살다 간 고결한 여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이(李珥 1536~1584)_ 효성이 지극한 책벌레 : 이율곡도 유명하지만 그의 어머니 또한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율곡은 훌륭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났기에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던 탓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책을 즐겨 읽었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 중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며 자랐고, 그에 보답하듯 그는 열세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가 열여섯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효심이 지극했던 율곡은 어머니를 모신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어머니의 무덤가를 지키는 시묘를 했다.
그는 박학하면서도 실천 가능하고, 평등한 제도개혁에 대한 이런 생각은 다방면에서 제안되었다. 진전개간(陳田開墾)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휴한지나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실제로 경작하는 면적에만 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또 당시 파산 상태에 빠져 있던 국가 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하고 관료기구를 간소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고의 낭비를 없앨 것을 주장하는 등,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일들을 당시에 이미 주장하는 놀라운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을 익혔고, 다방면에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 『경연일기』 등이 있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가 갔지만 이이는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었고, 폭넓은 학문을 연구했으며, 성실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한 그의 성실과 독서의 습관이 그에게 많은 족적을 남기게 해주었다.
허균(許筠 1569~1618)_ 독서록의 효시, 학계의 홍길동 :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로 항간에 회자되는 허균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능력은 누구보다 출중하고 뛰어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평생 벼슬길이 막힌 채 시대를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슬픈 삶을 다룬 소설로, 서자 차별문제를 제기한 작품이다. 허균은 명문 사대부가의 적자 출신임에도 자신의 환경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이에 반하는 소설을 써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접하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깊이 생각했던 덕분에 그와 같은 폭넓은 인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허균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대신, 세상을 자신에 맞게 고치려고 했다. 그는 당시 성리학으로 획일화된 사회에 반발심을 갖고 있었고, 시대를 앞선 생각으로 사회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다하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배척당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허균이 광해군 폭정에 항거하여 1618년 처형된 그해, 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185건이나 등장했다. 이는 허균 때문에 조정이 거의 매일 격론을 벌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한 그는 역적이라는 이유로 온전히 그의 영혼과 정열을 쏟은 저작물조차 모두 불태워지는 불행을 겪는다.
허균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야말로 광범위한 독서를 한 대단한 독서가였다. 그렇게 다양한 책을 읽다 보니, 당대에 그의 해박한 지식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지식세계는 무척이나 넓었다. 그는 책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즉시 메모해두는 습성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책을 엮었는데, 그렇게 탄생한 책이 바로 『한정록』이다. 이 책은 그가 마흔두 살에 관직에서 물러나 지은 책으로, 4000권이 넘는 중국의 고전에서 각각의 주제에 맞는 시문을 가려 뽑아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를 위해 생활교양서로 펴낸 것이다. 그의 엄청난 독서량에도 고개가 절로 숙여질 정도이지만, 이처럼 감동받은 글들을 일일이 추려내 책으로 묶는 그의 열정은 실로 무서운 집념이라 할 만하다. 허균이야말로 독서록의 효시인 셈이다. 비록 명문 사대부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당시 사회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키웠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혁적인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_ 책에서 찾은 실용의 길 : 『열하일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이름이 높다. 그는 실학자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열하일기』뿐 아니라 『연암집』을 남겼고, 소설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허생전』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이런 내공은 그가 어려서부터 독서에 관심이 많았으며, 독서를 즐겨했던 덕분이었다. 소위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은 힘으로 사회를 주도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강한 무기는 독서라는 것을 옛 사람들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
학자이면서 작가였던 연암 박지원은 선구자적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가 주장한 학문에서도 그는 실용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의 그런 주장은 당시의 사회풍조에 반하는 것으로, 그는 늘 그를 배척하는 무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곤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 실용노선을 추구한 그는 유학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취하면서도 청나라의 과학적 문물과 합리적 학문을 받아들여 점진적인 개혁을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