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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패러독스

송상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문명 패러독스

송상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2월 / 317쪽 / 13,000원



왜 문명의 가치는 의심되지 않는가_ 집단의 중력은 강하다


프롬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의심도 하지 않고 집단주의라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는지를 분석한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는 강압적인 집단주의 체제였지만 한편에선 많은 동조자들에 의해 탄생해 유지되었던 체제이기도 하다. 프롬은 이러한 체제의 공통적인 성격은 원자처럼 세분된 개개의 인간에게 새로운 피난처와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고 강조한다. 개인들은 이러한 피난처와 안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복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프롬의 말대로 개인적, 사회적 요인이 맞물리는 가운데 믿음과 복종은 사회적 미덕이 되고 나아가서 불문율이 된다. 사회적인 요인이 앞에서 끌어주고, 개인적인 요인이 뒤에서 밀어주는 가운데 그 사회는 이탈자를 허락하지 않고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의심'을 직접 대면해 보기로 하자. 의심과 불복종의 역사는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기독교를 보면 최초의 인류라고 하는 아담과 이브가 신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을 두고 인류의 타락과 원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견해를 달리한다. "바로 이와 같은 불복종이라는 최초의 행위"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불복종이라는 최초의 행위야말로 자유의 최초행위였다고 본다. 즉 신의 권위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콜린 윌슨은 의심하는 사람들을 아웃사이더라고 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심의 역사'를 써나간 사람들은 당시에는 대부분 배척을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콜린 윌슨은 인류 문명과 아웃사이더와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웃사이더는 쇠퇴한 문명의 한 징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건강한 징후라는 이야기가 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나름대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던 문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굴절과 왜곡을 거쳐 쇠퇴하는데, 그 문명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요청될 때 아웃사이더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들의 행적을 본다면 의심은 결코 파괴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짧은 안목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창조의 씨앗이 되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믿음으로 뭉친 수많은 사람들이 발휘하는 중력을 이기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큰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힘은 어떤 면에선 기존의 믿음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더 큰 믿음을 보여주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에서 이를 극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큰 의심이 있고서야 큰 깨달음이 있다."



위선자를 위한 변명_ 인간은 가면을 필요로 한다

위선은 겉으로만 착한 체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위선은 좋지 않은 모습, 그래서 버려야 할 태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위선을 영어로는 'hypocrisy'라고 하는데 보여주기 싫은 것은 숨기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여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은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은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이려는 인간의 경향은 페르소나 이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페르소나 이론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체계화한 이론이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을 할 때 쓰던 가면을 일컫던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쇼'를 하기 위해 극 중 역할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썼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과 인격' 등으로 번역되는 'person'과 'personality'가 페르소나와 어원이 같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의 인격이 가면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융은 페르소나가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보여주기 싫은 면은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면은 나타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페르소나는 '한 인간이 표면적으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에 관한 개체와 사회 사이의 타협의 한 소산"이라는 것이다. 이부영 교수는 페르소나를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라고 하는 것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성답다, 사람답다, 교사답다'라는 표현 중에서 '답다'라는 표현이 페르소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사회적 인격으로서 한 사회에서 부여받는 개인의 역할 그러니까 '교수로서, 사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등에 어울리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페르소나의 팽창이 나타날 때이다. 융은 자아와 페르소나를 동일시하는 현상을 '팽창'이라고 명명했다. 개인이 자기가 하고 있는 구실이나 사회적 역할에 지나치게 말려들거나 지나치게 사로잡혀, 자아가 이 페르소나와 동일화하기 시작하면 그의 퍼스낼리티의 다른 측면은 당연히 한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런 사람이 권위와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으면 아랫사람을 괴롭히기 십상이다. 어떤 부모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자녀에게 투사하고 강요하여 자녀를 괴롭히기도 한다. 융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가면을 쓴 채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통일성 있게 유지하는 의식적 위선자이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연기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페르소나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무의식적 위선자이다. 이런 경우를 이중인격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의식적 위선자가 아니라 바로 무의식적 위선자, 곧 이중인격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보여주고 싶은 부분과 보여주기 싫은 부분, 그래서 위선을 부려야 되는 부분이 있다. 어차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사회와 문명은 알게 모르게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과학이 발달해서 사람의 속마음까지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장치가 나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너무 단단한 1등의 신화_ 인간에게 서열을 매기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 사회는 순위 매기기 문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깊고 굵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는 이러한 가치 측정의 신화를 책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사람의 성장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련된 자기주장의 성장이며, 어떠한 척도나 교육과정을 가지고서도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타인의 업적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측정할 수 없는 재창조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로 측정할 수도 없는 가치를 너무나도 쉽게 측정해서 수치화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가치측정의 신화'라고 일컫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치측정의 신화'는 사실 서구 자본주의의 문명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자료화하고 서열화하고자 한다.

가치측정의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는 시험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객관식 문제나 정답이 있는 단답형 문제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객관식 문제의 폐단을 이야기해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묘한 믿음'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서열화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서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러한 서열화를 위해선 정답이 존재하기 힘든 주관식 문제 대신 객관적이고 획일적인 측정 기준치를 지녀야 한다. 그래서 한 사회학자는 한국 사회와 서양 사회의 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 사회는 정답이 있는 교육을 하며, 서양 사회는 정답이 없는 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서열 문화에 익숙한 사회에서 1등은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지점이기는 하지만, 과연 1등이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까? 트리나 포올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는 아주 탁월한 이야기로 이 문제에 새로운 힌트를 제공한다. '한 나비 애벌레가 있었는데, 애벌레는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는 다른 나비 애벌레로 이루어진 탑을 발견한다. 그 탑은 수많은 애벌레들의 몸으로 이루어진 굉장히 높은 탑이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진 한 애벌레는 천신만고 끝에 다른 애벌레를 짓밟고 짓밟아 정상에 올랐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에 따르면 애초부터 1등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꼭대기에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환상과 경쟁심리, 그리고 그곳을 향해 오르는 행렬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1등을 향한 경쟁은 일정한 실험실적인 조건을 만들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인하는 인간들의 유희일 수 있다. 즉 서열 매기기는 인위적이고 관념적인 생각이 바탕이 된 인간의 행렬이라는 것이다.



도시는 인류의 고향이다_ 도시의 서로 다른 두 얼굴

영국 시인 윌리엄 쿠버는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도시를 개척해서 발전시켜온 역사로, 도시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창조물로 도시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도시는 과연 인류 문명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기원에 대해 학문적인 접근으로 도시의 근거를 댄 사람이 현대의 고고학자 칠드(Child)다. 칠드는 도시의 기원을 생산력의 증대에서 찾는다. 사람이 정착하여 도구를 이용한 농경을 시작하며 농업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농업혁명의 결과로 농산물의 잉여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네 사람이 다섯 사람분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농경에서 해방된 한 사람은 학자 · 예술가 · 기술자 등 비농업적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가 늘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활동 여건이 좋은 중심 촌락에 모이게 되고, 여기서 계급과 도시도 생기고 국가도 형성되게 된다는 것이다.



존 리더는 『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에서 잉여 생산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는 이론에 정반대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먼저 도시가 탄생했고, 그 다음에야 도시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농업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이며 그 이후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존 리더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메소포타미아문명보다 더 오래된 페루의 '카랄'을 예로 든다. 리더는 이어서 도시를 도시 안팎의 생태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리더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오가는 물질과 에너지, 인력의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지구 환경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도시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때 중요하게 제시되는 개념이 '생태발자국'이다. 생태발자국이란 인간이 자연에 남긴 발자국을 뜻한다. 1996년 캐나다 경제학자 마티스 웨커네이걸과 윌리엄 리스가 개발한 개념이다. 이런 생태발자국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것이 도시 농업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를 보면 실제로 생태적 관점에서 이를 잘 풀어 가고 있는 도시들이 있다. 쓰레기 처리를 잘하고 있는 멕시코시티, 도시 농업을 통한 식량 배급의 모델이 된 런던, 사람보다 나무가 더 많아 생태적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베를린, 미국의 경제 봉쇄에 대처하기 위해 자급자족적 도시 농업을 시행하고 있는 쿠바의 아바나 등이 그 예들이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도시의 생활방식은 더 생태적인 모습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싶다.



도시를 말할 때 첫 번째 요인이 되는 것은 인구수이다. 바벨탑을 만들었던 문명인들이 서로 흩어지지 말자며 모여 살고자 애를 썼던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통화기금에서 2007년 10월 7일에 펴낸 간행물을 보면 세계의 도시인구는 2008년에 처음으로 50퍼센트를 넘어선다고 한다. 1800년에 3퍼센트, 1900년에는 13퍼센트였으니 무척 빠른 속도다. 이 추세라면 2030년에는 10명 중 6명이 도시 거주자가 된다고 한다. 문제는 현대 도시가 지표면의 2퍼센트가 안 되는데 세계 자원의 75퍼센트를 소비하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도시화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며, 2030년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인이 될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싫든 좋든 인류는 도시와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함께하게 될 운명이다. 존 리더의 생각대로 도시를 거부할 수 없다면 즐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편리를 추구할수록 불편해지는 딜레마_ 불편함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편리함 그 자체의 관성은 결코 멈추거나 만족하는 법이 없다. 편리함에 대한 중독은 끊임없이 더 편리한 것을 쫓게 만든다. 그런 우리들은 한편에서 바보가 될 수도 있다. 박정순 작가에 의하면 편리함을 주는 문명은 인간을 '편리함'에 길들여진 '불편한 바보'로 만들어 간다고 한다. 기계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 말이다. 편하고자 문명을 추구했는데 그 문명 때문에 '불편한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패러독스이다.

문명이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구조적인 발전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문명과 도시를 건설하면서 일정한 구속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실 그것이 문명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갖가지 구속 장치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유명한 문명사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그의 『문명화 과정』에서 개인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장치들과 방법들이 변동하는 과정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중세사회, 궁정사회, 근대사회의 사회 형태나 변화를 분석하면서 개인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장치들과 수단들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주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에서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본능과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자제하며 자기통제의 압박이 점진적,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자유롭고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문명이 동시에 사람을 구속하는 틀이 되었던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다.



문명화의 과정이 주는 불편함과 구속은 과거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디어 메트릭스'의 전성훈 사장은 "디지털 시대 편리함의 패러독스"라는 글에서 "아날로그 카메라보다 좀 더 편리해보겠다고 구입한 디지털 카메라의 엄청난 양의 카메라 사용법을 대하면서 편리함의 패러독스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노트북과 같은 휴대용 디지털 사무용품이 생겨서 업무량이 줄어든 게 아니라 훨씬 많아졌다는 고백도 함께 곁들였다.



<미아니치> 신문의 기자로 일하는 후쿠오카 켄세이는 『즐거운 불편』이란 책에서 소비가 미덕이고 능력인 사회,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소비와 행복은 정말 비례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겪으면서 행복을 발견하고자 한다. 지전거로 출퇴근하기, 엘리베이터 사용하지 않기, 직접 농사짓기 등을 자청해 겪으면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불편이 소비의 기쁨을 되찾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담았다. 이제 우리는 편리함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편해질 수 있다는 편리함의 패러독스를 깊이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고정관념을 위한 변명_ 고정관념은 문명과 일상의 창조자

서커스단에서 부리는 코끼리는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진 코끼리이다. 이 코끼리를 먼저 튼튼한 나무에 매어놓으면, 처음에는 도망치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하게 된다. 이 포기하는 과정에서 코끼리는 절대로 나무 기둥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데, 이 고정관념이 형성된 다음에는 조금만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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