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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6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 382쪽 / 14,000원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


1910년 8월 29일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었다. 그날 조선 민중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그날은 의외로 조용했다. 반대시위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대시위는 '합방'에 대한 소문이 떠돌던 오래전에 있었고, 이제 조선 민중은 체념과 패배주의, 좌절감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조선 정부를 대신하게 된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엘리트층을 '포섭' 전략으로 대했다. 이를 위한 대표적 기구는 중추원(中樞院, 중앙자문회의)이었다. 1910년 9월에 임명된 65명의 귀족 또는 친일인사를 회원으로 하여 구성된 중추원은 총독이 행정조치에 대해 자문했을 때에만 의견을 말하는 것이 허락된 겉치레 기구였다. 중추원은 3·1운동 때까지 한 번도 소집된 일이 없었다. 일제는 또 농촌사회에서 '지방유력자'로서 지도적 지위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유생들에게는 일왕(日王)의 '임시은사금'을 지급하는 한편, 1911년엔 '조선 유학의 진흥을 위해'서라며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유교의 충효사상을 일제에 대한 충성심 배양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든 조선의 엘리트가 일제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국외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독립군기지 건설 구상은 '병합' 직후에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의해서 '서간도 이주 사업계획'으로 추진되었다. 1912년 한반도에 간도 열풍이 불었다. 1910년 10만 정도였던 간도 인구가 1918년 60만으로 급증할 정도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하와이 이민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른바 '사진신부(picture bride)'도 이때에 나타났다. 당시 하와이로 건너간 조선인은 5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결혼하지 못한 남자들이 많아 사진 교환만으로 조선에서 신부를 데려오는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조선 남성은 인종차별법으로 인해 현지의 미국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이민자들이 신부의 부족으로 정상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방황하면서 생산효율이 떨어졌다. 음주·도박·범죄에 탐닉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와이 정부가 1910년부터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된 1924년까지 14년 동안 사진신부를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배경 탓이다.

사진신부들의 나이는 대부분 17세에서 24세 정도였으며, 학력은 대부분 무학(無學)에 속했다. 사진결혼의 가장 큰 문제는 현격한 나이 차이였다. 남편 될 사람의 젊었을 당시의 사진을 보고 왔더니 자기 아버지뻘 되는 늙은이가 마중 나와 있어 자살하거나 도망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심지어 나이가 30세 이상 차이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부부관계는 '효'에 가까운 것이어서 심지어 자신의 남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진신부들도 있었다. 사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고 처녀들은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결혼 이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 사진신부의 하와이 행은 '지독한 가난'과 '조국의 암울한 현실과 막막한 미래'가 주요 이유였다. 신영숙은 "이들 사진신부들이야말로 자신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 한인사회 발전의 주역이 되었으며 민족독립운동에도 남자 못지않게 기여한 선구자들이었다"고 했다.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를 느낄 수 있는 것의 또 하나는 일제에 의한 인권탄압이다. 강점(强占) 이후, 일제는 철저한 헌병 경찰제도로 일체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고 인권탄압을 자행하였다. 1910년의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19년의 3·1운동까지의 약 10년간을 흔히 '무단(武斷)정치시대'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12년 12월 30일에 제정 공포된 '태형(笞刑, 가벼운 죄를 범한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준칙'은 일제의 잔혹한 인권탄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취미삼아 조선인들을 매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제가 적용한 태형의 범위는 넓었다. 가로수를 꺾었다고 5대, 집 앞 청소를 게을리 했다고 10대, 웃통 벗고 일했다고 10대, 잡기를 하다 발각되어 20대, 도살 허가 없이 개를 잡았다는 이유로 40대, 학교림에서 나무를 했다는 이유로 50대, 덜 익은 감을 팔았다고 80대 등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매질을 가했다. 항일운동가 오명천의 증언에 따르면, "일인들의 형판은 사람이 그 위에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十字板)에 벌려 묶고 두 다리와 허리를 형판에 결박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속칭 소좆매)은 매 끝에 납을 달아 노출한 엉덩이를 이것으로 치면 그 납이 살 속에 파고들어가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낭자했다. 매는 보통 80대가 보통이었으며 도중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불러내어 때렸다. 일단 맞은 사람은 절대 걸을 수가 없었고 사람의 등에 업혀 나오며, 죽으면 시체는 그날 밤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다.

신용하는 "이 제도에 의하여 한국은 일제 헌병 경찰에 의한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제치하의 한국에서 '순사 온다'는 말이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공포의 용어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했다. "조선 사람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말도 바로 이 '태형준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문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김삼웅은 "총독부는 '합법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반일 사상가는 물론 일반 형사범까지도 가혹한 태형으로 다스렸다. 태형은 그나마 '합법'의 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일제의 헌병·경찰·군인·관리 등 총독부 수족들은 온갖 고문과 악형으로 한국인의 육신을 찢어댔다"고 했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인이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 파견한 관리는 보통 식민지 인구 2~3만 명당 1명이었던 반면, 일제는 조선인 인구 400여 명당 1명의 관리를 동원하여 조선인의 일상적 삶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먼 훗날 프랑스 지식인 미셀 푸코가 말하는 '판옵티콘(panopticon)'의 감시 체제는 이미 이때부터 조선에서 가동되고 있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만 국한시켜 놓고 보자면 얼마든지 칭찬받을 수도 있는 일본인들의 완벽주의적 기질이 타민족에 대한 지배의 힘으로 작용할 때엔 그건 구제받기 어려운 죄악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조선 민중 기죽이기

일제의 '조선왕조 죽이기'는 일관되고 집요했다. '합방' 5주년을 기념해 1915년 9월 11일 물품박람회 성격의 행사인 조선물산공진회(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했다. 10월 31일까지 51일간이나 열린 큰 행사였다. 경성 시내에 일장기를 비롯한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개회식에 2만 인파가 몰렸고 10월 말까지 도합 120만 명의 구경꾼이 몰렸다. '공진(供進)'이란 말은 일본과 조선이 '함께 발전해 나가자'는 뜻을 담았지만, 일제는 공진회의 장소로 경복궁을 택함으로써 그렇게 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무능력한 조선왕조에 대한 박제된 추억, 그리고 식민통치를 체념적으로 수용하도록 각인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조선물산공진회를 찾은 일반 시민들은 광화문의 3개 문(홍예3문, 가운데가 왕이 지나다녔던 문)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박현욱은 "광화문을 박람회 입구로 활용한 것은 '당신들이 직접 당신들 왕궁을 밟으라'는 식의 가장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일제는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을 진열장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자 나머지 건물들을 헐어 그 자리에 18개소 3700여 평에 달하는 진열장을 신설했다. 4만 8760여 점의 출품작이 진열되었는데, 진열관이라는 미명하에 우사(牛舍), 돈사(豚舍), 계사(鷄舍)까지 설치해 궁궐이 소, 돼지, 닭 우리가 되고 말았다. 철거한 경복궁 구조물은 민간에 불하되었다. 이는 별장, 요정, 일본 불교사원, 일본인 부호의 저택 등으로 팔려나갔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준공으로 일제의 '왕조 죽이기'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풍수사상까지 연구했다. 윤흥기는 "일본이 한국을 합방한 후 한국인의 문화정서를 잘 파악하려고 집정 초기부터 한국문화 전반을 속속들이 조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인의 풍수사상에 대한 조사였다"며 "그 조사는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이라는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 채집, 정리되어 『조선의 풍수』라는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고 했다. 일제지배 체제 하에선 그 무엇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조선의 풍수사상까지 연구해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한 고도의 '심리전'을 펼 정도로 영악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였기에, 훗날에도 일제의 의도를 둘러싼 '과잉해석'의 논란이 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침묵을 강요한 무단정치

무단정치시대에 언로(言路)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언론의 '암흑기'였다. 일본 신문들만이 판을 쳤다. <경성일보>, <매일신보>, <서울 프레스> 등 총독부 3대 기관지와 지방에 15개의 일문 일간지가 발간되었다. 한국인들을 위해선 국문판 <매일신보>만이 유일했다. 한국인이 내는 지방지로는 <경남일보>만이 살아남아 1914년 말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매일신보>는 총독부 일문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되어 <경성일보> 편집국의 한 부서로서 운영되었고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다.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합리화하고 식민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한편 일제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매일신보>는 일제의 식민통치 선전뿐만 아니라 갈 곳 잃은 조선 지식인 포섭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소설 '무정(無情)'과 '유교망국론'을 연재했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되고 이듬해 출간되었는데 출간 당시 1만 부 이상 팔려 우리나라 최초의 '연애소설'이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광수가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다니면서 쓴 이 소설은 전통적 사랑을 거부하고 새로운 자유연애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광수는 훗날 "내가 '무정'을 쓸 때에 의도한 것은 그 시대 신청년의 이상과 고민을 그리고 아울러 조선 청년의 진로에 한 암시를 주자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민족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쓴 것이다"라고 했다. 이광수는 1918년 9월에 '신생활론'도 연재했는데, 여기서 유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일종의 유교망국론이었다. 그는 "조선의 유교는 실로 우리의 정신의 만반 기능을 소모하고 마비한 죄책을 면할 수 없다"며 유교가 조선에 끼친 해독으로서 숭고(崇古)와 존중화(尊中華), 경제의 경시, 형식주의, 무조건적인 효, 애경(愛敬)이 없는 부부관계, 상문주의(尙文主義), 계급사상, 운수론, 과학의 천시, 과도한 예(禮) 등을 들었다. 이 글은 '저주받을 유교' 운운하는 극렬한 언사를 구사해 유생들의 극렬한 항의를 받았고, 한때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매일신보>는 우리 작가들이 작품 발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신문이기도 했다. 이효석을 비롯해 김동인, 채만식, 박종화, 박태원 등 당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작품활동을 펼쳤던 무대였다.



잡지계에서 맹활약을 한 인물은 단연 최남선(1890~1957, 《소년》, 《붉은져고리》창간)이다. 그러나 무단정치시대에는 일반 종합잡지의 발행마저도 어려워 종교잡지와 일본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들이 언론의 명맥을 이어갔다. 표현의 자유가 통제받자 문학이 사학(史學)을 대체하는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봉영은 "문학은 계몽의 도구로서 민족의 삶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원동력으로 인식되었다"고 했다. 이후 문학이 학문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세월은 한 세대 이상 지속된다. 해방 후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없어 문학적 우회를 해야 하는 세월이 또 한 세대 이상 지속된다. 이게 한국인의 소통방식과 형식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깊이 고민해 볼 만한 주제라 하겠다.



'시일야방성대곡'의 또 다른 슬픔도 살펴보자. '무단정치시대'에 우리 신문의 부재는 개화기의 항일언론인들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라도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아예 침묵할 것인가? 침묵은 생계를 위한 문제이기도 했으니, 당사자들에겐 딜레마였을 것이다. 그간 개화기 항일언론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존경받아온 장지연도 그런 경우다. 장지연의 선택은 <매일신보>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1914년 12월부터 1918년 7월까지 그가 쓴 글은 무려 730편을 상회하는 막대한 분량이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지지하고 대변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오늘날까지 뜨겁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에서 위암의 친일행적을 폭로한 바 있는 역사학자 이이화는 "위암이 일제의 합병 후 <매일신보> 등에 친일논설을 쓴 사실 등은 연구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라면서 "신문사 주필로서 일왕(日王)을 위한 축시를 쓰고 천장절에 신문을 휴간(<경향신문> 2005년 3월 5일자 1면 머리기사 보도)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합방 이후 변절되어가는 위암의 모습에서 민족사의 비극을 보는 것 같다. 역사바로잡기 차원에서라도 위암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언론사학자인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정진석은 <경향신문> 2005년 4월 9일자에 기고한 '시일야방성대곡' 100주년 칼럼에서 "글과 인물을 평가할 때는 시대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나라의 운명이 다했던 100년 전에 살았던 언론인의 행적을 오늘의 상황에 끌어다 놓고 작은 흠집을 찾아내어 그보다 훨씬 큰 업적을 덮어버리면서 더 치열하고 완벽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매도하는 일을 역사청산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다면 역사의 또 다른 왜곡이며, 허무주의밖에 남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 4776명의 명단에는 결국 장지연이 포함됐다.



아무래도 문제는 '시일야방성대곡'이 불러일으켰던 엄청난 반향에 있는 것 같다. 장지연이 평범한 애국지사였다면, 이 논란도 이렇게까지 불거지진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민중의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흐르게 할 정도로, 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울 정도로, 민심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일야방성대곡'의 주인공이기에, 논란은 양극을 달리는 게 아닐까? 과거의 큰 업적이 있기 때문에 좀 봐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따져야 하는가? 이름의 무서운 무게를 절감하게 된다.

3 · 1운동의 폭발

한국인들은 일제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저질러진 '침략과 지배, 수탈과 분열, 탄압과 차별'에 대한 분노와 한(恨)을 안으로 삭히다가 출구를 찾아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인 연합국 27개국 대표 70여 명은 1919년 1월 18일부터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전후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열흘 전인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의회에서 선포한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대책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조항에는 국제연맹의 창설이 제창되었고, '모든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조치'를 규정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었다. 민족자결주의의 요지는 식민지 문제를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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