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배우기 2: 개성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마테오 마랑고니 지음 |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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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마랑고니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 845쪽 / 22,000원
Ⅰ 세속미술
도해성과 형식성현대미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서 예술작품의 주제와 관련된 도해성과, 예술가의 표현 수단과 언어에 관련된 형식성의 구별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도해성'이라는 표현은, 이미지로서 예시하는 것과 관계된 일종의 외적 요소만을 가리킨다. 반면에 내재적 '형식성'은 가려내기가 한결 애매하며, 단번에 알아보는 안목과 한결 숙련된 비평 감각을 요구한다. 피렌체 오니산티 성당의 보티첼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를란다요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특별히 도해성과 형식성의 차이를 증명이라도 하려고 그려진 듯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도해적 소재가 주제의 외양적 요소 대단히 의도적으로 주도된 스타일을 위해 극복되고 용해되고 망각되는 그런 동시적이며 일원적인 시각이 비롯된다. 기를란다요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와 달리 도해적 요소들에만 만족하려 한다.
보티첼리는 머리의 자세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유연한 오른손놀림의 율동 효과를 중시했다. 반면에 기를란다요는 그것들을 제대로 다 보려면 족히 한 시간쯤 걸릴, 재미있는 골동품들로 가득 찬 다락방 한복판에서 거룩한 글을 짓고 있는, 존경심을 자아내는 멋진 백발노인을 꼼꼼히 묘사하려는 것을 특히 중시했다. 게다가 화가는 잉크가 튄 얼룩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전체적 관념은 없고 그런 통일성의 결여가 순수하게 묘사적 관심만을 제사하는 작품만이 나온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그림의 정신적 주제는 보티첼리의 고상한 환상을 통해 서정적으로 승화한다. 반면에 <성 히에로니무스>에서 평범한 사실주의자 기를란다요는 무미건조하게 주제에 매달린다.
달필과 스타일우아한 필력으로 매력을 발산한 시기 가운데 '국제 스타일'이라 불리던 시기(14~15세기)가 있다. 이 스타일은 색채는 물론이고 리듬에서도 세련된 우아미를 보여주었던 잠보노의 흠잡을 데 없는 '달필'에서 그 전형성을 드러낸다. 그는 <세례 요한>에서 창기(槍旗)와 피륙에서만이 아니라 손가락, 발가락, 머리털, 모피의 술장식과 수염마저 출렁이게 한다. 바위들까지 이러한 유혹적인 물결에 동참하려고 기를 쓰는 듯하다. 성자는 입을 벌리고 둔한 사람처럼 뻣뻣이 서 있는 한편, 화가는 이 마네킹에 이미 상당히 유행이 지난 고딕 복장을 입히는 데만 몰두한다. 그렇지만 잠보노는 세련된 미덕과 동시에 거기에 열정과 확신을 쏟으면서 그 작은 나무판을 마치 한 점의 보석처럼 만들어놓는다. 보티첼리 또한 <봄>의 저 유명한 상을 엄격하게 수직축에 따라 세웠으며, 이는 동작과 걸음걸이를 돋보이게 한다. 그는 마치 잠비노가 <세례 요한>에서 그렇게 했듯이, 복잡한 옷주름으로 괴상한 옷을 입히기를 즐겼다. 그러나 잠비노는 필치의 우아함을 추구했던 반면, 보티첼리는 날아갈 듯한 옷감의 도움을 받아 그 형상에, 잠보노의 '세례자'에 결핍된 운동과 생명을 되살려낸다.
네로초 또한 소중한 이 <성 미카엘>에서, 화가의 작업이라기보다 차라리 금은세공사의 작업에 빠져 그 주제를 완전히 망각한다. 이 작품은 환상이 가득하며, 우리가 보는 머리털과 생생한 살결까지도 금속적으로 경직된 괴팍한 장식취미로 일관된다. 오직 창만이 단순한 직선적 성격으로 비스듬한 인물을 대조적으로 균형잡고 함축하는 듯하다. 잠보노와 네로초의 '달필'로 다듬어진 멋에 뒤이은 스타일의 걸작은 힘과 운동으로 넘치는 진정한 걸작인 안드레아 델카스타뇨의 기막힌 <성 히에로니무스>이다. 비록 이 작품이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더라도 당대 미술가들은 그 엄청난 영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작품은 미친 듯이 운동감 넘치는 폴라이우올로(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의 원형이자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선조이다.안드레아는, 때늦은 고딕 스타일의 선적 필치와 유연한 멋에 지쳐 있던 베네치아 회화에 비할 때, 완전히 낯선, 남성적이며 역동적 필치를 지닌 강력한 언어를 개발했다. 이 걸작이 16세기 중반에는 알레산드로 알로리의 그림에 가려져 있었으니까! 네로초와 마찬가지로 에르콜레 로베르티도 성자라기보다 차라리 광대처럼 보이는 과장된 인물을 그리면서 주어진 주제를 잊어버린다. 로베르티도 이 전통적 서정성을 부조리한 수준으로까지 밀어붙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요동치는 이 인물의 감수성은 얼마나 풍부하던가! 마치 하프라도 뜯는 듯한 역설적인 손짓에 실린 매력은 얼마나 잊기 어려운가! 이 <세례 요한>을 잠보노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여러분은 삶과 예술이 대립하는 면을 보게 될 것이다. 한쪽에 어떤 예술가와 인간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감미로운 '쾌락주의자'밖에 없다.
'동작'으로서의 운동미술에서는 운동이 그 형상의 동요(동작으로서의 운동)보다 고요한 모습(정태 즉 힘으로서의 운동)에서 더욱 미묘하고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즉 화가가 관객의 시각적 통찰력에, 예컨대 윤곽선의 역동적 진동에 잠재되고 또 느껴지는 운동을 찾아낼 수 있도록 배려할 때 그렇다. 폴라이우올로의 그림에서처럼 요동치는 형상에서 모든 것을 흔들리게 하는, 떨리고 신경질적이며 흥분 상태의 형상을 그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윤곽선이다. 토스카나의 온화한 환상파,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는 분명 운동을 좋아하거나 표현할 줄 아는 화가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생하고 훌륭하게 낚아낸 이 형상은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예상치 못했던 것이 된다. 이것은 물론 가장 덜 알려지고 도판으로 수록되지도 않는 작품이다. 터무니없는 얼굴과 왼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을 대단히 즐겁게 했었다 마솔리니는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상당한 원한을 품었다고 이야기했었다. 여기에서 신체의 운동을 요약하고 강조하는 장검(長劍)은 진정한 발견이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다윗>은 단지 그 스타일의 놀라운 참신성과 통일성 때문만이 아니라, 혁신적 화가로서 카스타뇨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주며, 그 뒤로 화가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 때문에도 칭송받을 만하다. 이 작품은 오늘날 표현주의의 산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분방한 서정성이 참으로 대담하다. 여기에서 카스타뇨는 스스로 창안한 선에 의한 새로운 조형언어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그 고유한 수단을 확신함으로써 모든 대담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환상적 인물은 우리에게 강렬한 촉각성으로 만테냐와 투라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금속을 녹여 빚은 고부조 같은 인상을 던진다. 영감에 취한 화가는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이 <다윗>에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진정하고 순수한 스타일의 가치로서 이뤄진 이 생생한 극적 표현 앞에서 전문가의 눈조차 황홀에 빠질 뿐이다.
폴라이우올로의 <헤라클레스와 히드라>도 물론 스타일이 빼어난 걸작이다. <다윗>이 특히 고부조 같은 인상을 준다면, 반대로 <헤라클레스와 히드라>는 조형적이라기보다 선적 형태로서 구상되었다. 이 영웅은 멋지게 사지와 꼬리를 휘날리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채 팔다리에서 흘러넘치는 힘의 잠재력으로써 우리를 매혹한다. 더구나 평원을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조차 같은 운동에 가담하지 않던가! 폴라이우올로는 전형적인 피렌체 화가로서 이 놀라운 광경 속에 자신의 신경질적 기질을 훌륭하게 담아내었다. 여기에서 다시 항전 운동과 역동성은 동작의 활달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표현적 자질, 다시 말해서 데생을 왕성하며 통렬하게 강조함으로써 표현된다. 또 다른 걸작 소품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도 폴라이우올로의 역동적 선을 만끽하게 된다. 그 운동은 동작보다 힘으로 표현된다.
'잠재력'으로서의 운동미술에서의 운동감은 동작이 아니라 잠재력으로서 간접적으로 옮겨질수록 더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정적인 모습의 조토의 인물상을 보자. 정태적 외양의 이 <실 잣는 하녀>는 단지 치마의 강한 긴장이라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이렇게 눈길을 끄는 결정적 방식과 놀라운 참신성으로 잠재된 힘으로서 운동에 대한 미묘한 인상을 준다. 그토록 단호한 몸짓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격렬한 <성 히메로니무스> 또한 그 옆모습의 통쾌한 활력과, 머리와 목의 떨리는 긴장 덕분에 동작이 아니라 잠재력으로 운동감을 표현한다. 이 인물의 조형적으로 비틀린 머리와 목은 다시금 빛의 급격한 강세를 배가시킨다. 사자 또한 그 성자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리듬 속에서 신경질적인 꼬리로 운동을 마감한다. 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미완성이지만 결코 어떤 걸작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걸작도 문외한에게는 말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분명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성자의 머리가 어느 날 톱으로 잘린 채 결국 페슈 추기경의 구두장이 걸상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이제 그토록 독창적인 스타일 모티프가 궁극적으로 귀결된 작품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성취하고, 새롭게 다듬고, 그것으로써 시스티나 예배당의 수많은 기적 가운데 하나인, 눈부신 <요나스>를 빚어낸다. 매우 널리 성행하는 후렴으로 미켈란젤로의 '고뇌'라는 것이 있다. 내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고뇌라는 말을 들먹이며 이야기하려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들이 주제를 극복하려는 이 작가의 힘겨운 노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이런 고뇌는 모든 예술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결정적인 노력이 예술에 도달하는, 바로 거기에서 어떻게 고뇌를 이야기할 것인가? 이럴 때 오히려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황홀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입방체 형태로 완전히 종합된, 진정한 인간적 기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요나스>에서 우리는 발견의 기쁨을 맛본다. 새로운 리듬의 출현이란 마치 새로운 언어의 탄생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힘찬 형상을, 당치도 않게 고통에 찬 것으로 본다면 이는 우둔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것을 주시할 만한 전문가적 시선으로는 이런 서정적 대담성에서 오직 작가가 겪은 황홀을 즐기고 나누게 될 뿐이리라. 이 <요나스>는 미켈란젤로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 다름 아닌 '회화' 즉 '형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이다. 그는 여러분이 거기에서 보는 그런 고뇌를 표현할 꿈도 꾸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형상이 고도의 인간적인 의미로 그토록 충만하다고 할 때, 이는 단지 그것이 미켈란젤로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단한 재능으로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근접한 사람들, 즉 로소와 빈첸초 단티 같은 이들은 이 거장의 것을 완벽하게 모사한 수법이 어떻든, 그저 순진하고 소박한 쾌락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단축법의 역동성단축법은 짐작컨대 형상언어의 강력한 표현 수단이다. 그것이 우리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양괴감과 잠재력은 현실에서보다 더 강하다. 이는 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재구성하면서 체험하는 미적 쾌감 때문이다. 단축법은 원근법의 결실인 만큼, 르네상스와 더불어 등장했을 뿐이다. 선구자 조토는 그의 선구적 천재성의 경이로운 증거인 <성 프란체스코 수사 두상>에서 그것을 입증하듯이, 이 표현 수단에 대한 경험적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조토의 두상은 대담한 단축법으로서 원구형으로 구상되었지만, 마사초의 것은 어렵사리 단축된 사각형의 프리즘 형태로 구성된다. 마사초는 진정한 예술가로서 그로 하여금 이 두상을 입방체의 리듬에 따라 묘사하도록 부추긴 왜곡에 대한 취미를 현대인과 함께 나눈다. 얼굴 형태와 어우러진 사각 베레모가 그런 의도를 충실히 전해준다. 튼튼한 사각형 구조 속에서 크게 뜬눈과, 힘차게 그려진 코와 입은 웅장한 전체 리듬과 하나가 된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청년기 작품 하나는 그를 일찌감치 폴라이우올로에서 레오나르도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는 위대한 노선의 우두머리로서 자리 잡게 한다. 선의 역동적 조형성을 주창한 사람으로 말이다. 카스타뇨의 작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조류는 <세례자의 두상>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마르코 초포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감지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남성적이며 투박한 안드레아의 언어는 그의 소중한 필치 속에서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그 점은 머리털을 다루었던 수법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된다. 즉 카스타뇨는 그 밝은 부분들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도록 어둡고 커다란 고리들로 그것을 채색한다. 반대로 마르코는 그의 그토록 독특한 수법으로 금속가루 물감을 완벽하게 다룬다.
초상예술이 사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진정한 화가가 그린 초상이 형편없는 화가가 그린 초상보다 실물을 덜 닮았다는 점이다. 형편없는 화가들은 자연의 사실성을 모사하지만, 진정한 화가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시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초상예술이 개인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그리고 개성의 미묘한 다양성을 재현하는 데에서 14세기의 조잡하고 단출한 기법보다 더 뛰어나게 응용된 기법을 괄목하게 세련시키면서 주로 르네상스에 활짝 피어났다는 것은 당연하다. 조토, 시모네 마르티니 그리고 14세기 화가들은 물론이고 알프스 이북의 고딕 화가들은 때때로 탁월한 초상을 그려내었다.
마소는 커다랗게 함축된 덩어리로서 수염과 머리를 다루는 수법에서 보이는 시원시원한 특징에 따른 기법으로 미루어, 마사초를 예고하면서 그를 이끌고 있다. 마소의 작품에서 흰 의복의 광채 위로 흘러내리는 대칭적인 두 머릿단과 검은머리의 '발색 효과'와 참신한 천재적 리듬도 주목해보자. 마소의 두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회화언어의 다양한 요소들을 선묘, 조형적 명암대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사초의 두상에서는 이런 구별이 불가능하며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마사초는 단번에 천재적으로, 한 세기에 걸친 회화언어를 근대적 언어로 변형시켰다. 그 성격에 대한 탐구가 가장 대담한 왜곡으로까지 밀어붙여진, 수염을 그린 노인의 오른쪽에서 솟아오른 머리에 생각이 미칠 때면, 한 점의 현대 회화 앞에 서 있다는 당혹스런 발상을 받을 뿐이다. 경쾌하게 나는 듯하고 튀어 오르는 그 진정 인상파적인 붓놀림은 빛에 흠뻑 젖어 있지 않던가!
유명한 <포르나리나('벨라타'라고도 함)>는 성숙기 라파엘로의 작품이다. 우리는 즉시 블라우스의 아름다움에 놀라게 된다. 그림 그 자체 속에서, 이 부분은 예기치 못한 화려한 발색 효과와 신선하고 속도감 넘치는 붓놀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 감탄할 부분에서 눈을 돌려 '살아 있는' 신체 부분들을 주시할 때마다 필자는 언어의 변화에 실망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 머리와 손은 참으로 생기가 없고 화려함도 뒤진다. 그토록 자유자재롭던 붓놀림 바로 곁에서 그렇게 굳어진 붓질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손목에 서투르게 걸쳐진 면사포도 오히려 딱딱하고 쳐진 옷감으로 보인다. 너무나 납작하게 그려진 목걸이는 피부와 분리되지 않는다. 손마저 무기력하다. 왼손은 거의 밑그림 상태지만, 오른손은 모델도 없이 그려져 이미 아카데미풍이 아니던가! 그러나 머리야말로 나를 가장 괴롭힌다. 그 뻣뻣함 때문일 것이다. 머리는 옷의 부드럽고 생기 있는 터치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가슴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것을 걸작이라고 외쳐야 했을까? 무슨 까닭에 이 초상을"모든 화가,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창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써야 했을까?(오제티) 여기에서 바로 필자가 서문에서 개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즉, 명예라는 것이 문학에서라면 부조리해 보이고, 음악에서라면 불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