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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데이비슨, 유라시아를 접수하다

이영건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할리데이비슨, 유라시아를 접수하다

이영건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09년 1월 / 255쪽 / 12,800원

모험을 떠나기 전에


내가 바이크를 타게 된 것은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작은 계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흔다섯 살 때, 미국상공회의소안의 소모임에서 파블로 리(할리 데이비슨 코리아 사장)의 말이 나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오늘은 날이 무척 좋아서,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달리고 싶어지는군요." 나는 연설이 끝난 후 그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할리데이비슨, 아니 오토바이 타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까?" "혹시 오토바이 면허는 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만…." 나의 대답에 그가 싱긋 웃었다. "저와 오토바이 이야기를 하시려면 면허가 없으면 안 되지요." 오기가 생긴 나는 약 15일 만에 면허를 땄고, 결국 파블로 리의 도움으로 나이 첫 바이크이자 첫 할리데이비슨인 '헤리티지(Heritage)'를 손에 넣었다. 'Heritage'는 100여 년 전의 모델이 바뀌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내려오는 명차였다.



'Heritage'를 타다가 얼마 안가'울트라 클래식(Ultra Classic)'으로 기종을 바꿨다. 나와 여행을 할 바이크는 바로 이 차였다. 평소에도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짧은 여행이라면 수백 번을 나와 함께 한 믿음직한 녀석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길고 험해서 잘 견뎌줄지 걱정이 되었다. 바이크를 타는 사람에게 바이

크는 자식과도 같아서 이 차가 여행 중에 다치고 탈 날 것을 생각하니 무척

속이 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쩌랴, 애초에 바이크는 제 몸 부서지도록 마

음껏 달리는 것이 행복인 것을, 기왕 가게 된 것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믿고

의지하며 끝까지 달려보자.



드디어 출발!

유라시아 바이크 횡단. 바이크는 17대, 사람은 지원 스태프들을 합쳐 총 20명이 되었다. 2008년 6월 27일 아침 9시경에 러시아의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 우연찮게도 6월 27일은 바로 나의 생일! 아침에 도착한 우리는 밤 11시에나 항구를 떠나게 되었다. 생일날 온종일을 항구에서 입국 심사가 끝나기만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항구에는 이렇다 할 식당조차 없어 첫날부터 야적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다. "허허, 첫날부터 라면이라니, 거참." "그러게 말이야, 무슨 수속이 이렇게 길어지나?" "혹시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닐까?" "괜찮을 거야. 암! 러시아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다들 괜찮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반 탈진 반 초월 상태로, 되는 대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 하루 동안 이미 한 달쯤 여행을 다닌 것처럼 피곤해지고 말았다.



러시아, 광활한 대륙을 달리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다. 약 250km라는 거리를 달려야 했지만 아침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가뿐한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른 저녁때가 되어서 기분 좋게 블라디보스토크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로비에는 러시아의 바이크 동호회인 '사무라이'에서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그날 저녁은 사무라이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먹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다음날 아침 다시 오겠다고 했다. 길을 가르쳐주고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음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을 텐데, 그들이 우리에게 잠시 시내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사무라이'들이 우리가 편히 다닐 수 있게 길을 열어주고 도로의 위험요소들, 가령 차들을 견제하는 일을 해 주었는데,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한지 마치 명사수가 쏘는 총알 같았다. 다니는 중에 간간히 대우 자동차 시내버스를 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날 밤 야영을 할 때도 사무라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 러시아는 위험하기 때문에 야영을 할 때 반드시 누군가 보초를 서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사무라이의 사람들이 한숨도 자지 않고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금 그들의 친절에 놀랐고, 세심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도 놀랐고, 할리데이비슨 동호회가 아니라고 처음에 다소 홀대했던 것이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험했다. 한번은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군인이 탄 승용차 한 대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말하다보니 러시아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경찰이 나타나서 우리를 검문하는데, 그럴 때마다 열일곱 명이 차례로 한 명씩 러시아어로 된 공증서류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라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카드 하나와 깃발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 카드는 마을 구간을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입니다. 뭐, 이 깃발을 달고 다니면 애초에 붙잡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어느 새 도로가 뚫렸고, 우리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을 갔다.



세 시간을 달리다 보니 잼바로스크라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그런데 그 마을 앞에 경찰차들이 서 있다가 우리를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두려워하며 그들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의 앞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에서 우리를 위한 환영식을 준비한 것이다. 잼바로스크의 여성시장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이했다. 기뻤지만 무척 당황스럽고 어안이 벙벙했다. 얼빠진 우리를 보고 그제야 시장이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만났던 군인이 그녀에게 연락하여,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는 무리가 있으니 환영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군인은 별이 셋 달린 현역 장군이었다! 잼바로스크에서의 깜짝 환영식은 매우 진귀하고 희한하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기세등등하게 바이크를 몰아 그날 525km나 달렸다.



하바롭스크를 30km 정도 앞둔 지점에 있는 주유소에서는 또 수백 대의 바이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라이 동호회가 하바롭스크 바이크 동호회에 우리가 그리로 간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이었다. 고마운 사무라이! 그 동호회 사람들도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길을 통제해주었다. 숙소까지 가는 도로는 마치 망상해수욕장의 그랜드 투어처럼 아름다웠다. 밤중에 바이크의 헤드라이트들이 줄 지어 늘어선 모습도 아주 장관이었다. 막힘없이 호텔에 도착해서는 하바롭스크 동호회 사람들과 밤새도록 파티를 하며 만남을 기념하고 기쁨에 넘치는 하루를 즐겼다.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게 이런 것이라면 몇 번쯤 다시 와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기고만장해졌다. 물론, 이런 일은 그날 이후 다시는 없었다.

치타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달려온 길보다 더 열악한 상태라고 하바롭스크 동호회 사람들이 강력하게 경고해 주었다. 비포장도로일 뿐만 아니라 돌이 많은 길이었다. 치타까지의 길은 그렇게나 험하면서, 무자비하게도 2,000km나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이 모두 흙길이라니! 출발도 하기 전에 모두들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2,000km도 문제지만 한국에서 할리데이비슨만큼 고가의 바이크를 타고 이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정신 나간 짓'을 해본 사람은 지금껏 없었던 것이다. 각오하고야 있었지만 바이크가 이렇게 상할 줄은 몰랐기에 돌아와서 이를 통탄하며 많이들 후회했다.



비러비잔까지만 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또 다쳤다. 바이크들도 서서히 망가져갔다. 5시간을 꼬박 달려 밤 9시가 되니 너무나 피곤했다. 결국 도로 옆에 자리를 잡고 그날 밤을 보낸 뒤 아침에 식사도 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러나 치타, 그 먼 곳은 조금도 가까워지는 기미가 없어 마치 달릴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필사적인 야간 주행 끝에 새벽 4시가 넘어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제각기 자신의 바이크에 새 보호 테이프를 꼼꼼하게 감았다. 오렌지색의 할리데이비슨 전용 테이프를 바이크에 붙이니 고난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영웅이라면 몇 군데 가지고 있는 영광의 상처처럼 부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멋이 있었다.



하루는 잘 달리고 잠잘 곳도 딱 안성맞춤인 곳을 발견해서 편히 잤다. 그곳은 숲 속의 아름다운 강가였다. 그렇게 하루는 좋았는데 다음날에는 비가 오면서 길이 더욱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회장의 바이크가 망가졌다. 우리를 이끌어주던 늠름한 바이크가 하릴없이 견인차에 끌려가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속을 달리고 있자니 어쩐지 기운이 빠지고, 만사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왔던 일상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이런 때가 되어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여행이 아무리 뜻깊은 일이라 해도, 하루하루를 평범하게도 무사하게 보내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이상, 이제는 그런 일상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라도 무사히 횡단을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내 일상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지만, 내 아내, 내 자식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달린 모든 것을 위해 다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치타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을 연달아 야영생활을 하며 힘겹게 달려야 했다. 멋진 모습을 자랑하던 우리의 바이크들도 먼지로 뒤덮여 초라한 몰골을 하고, 고작 하나의 탈 것으로만 취급받고 있었다. 얼마나 지쳤던지 그렇게 고대하던 치타에 도착하는 순간은 거의 아무런 감흥도 없이 넘어가게 되었다. 어쨌거나 치타에 도착한 기념으로 하루를 쉬었다. 바이크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팀워크는 내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들었다. 하루 쉬는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라고는, 언제의 어떤 일은 누구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식의 책임 전가와 힐난뿐이었다. 대원 하나하나가 할리데이비슨의 오너로서 대쪽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완전한 화합을 이루기는 어려웠으나, 여기는 집과 멀리 떨어진 생경한 곳인지라 곧 죽어도 모두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조금씩 굽혀야하는 때였다.



다음날, 차량 정비를 끝내고 저녁에 숙소를 떠나 밤 열두 시까지 달렸다. 편안했던 침대를 떠나, 길가의 주유소 공터에서 다시 야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가 눈에 띄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심드렁하게 텐트를 치고 저녁밥(라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을 기다리고 있는데 낡은 승용차 한 대가 텐트 곁에 섰다. 아저씨와 한 젊은이가 차에서 내렸다. 곧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 손님임을 알게 되었다. 노장의 가수(?)가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는데, 그것이 기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소 뻔뻔스럽게 우리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서서 환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그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밤이 무르익어가고, 기타와 노래에 분위기도 무르익어가고, 한쪽에서는 라면도 맛있게 익어가는 훈훈한 시간이었다. 라면이 담긴 그릇을 건네주자, 가수와 아들은 아주 좋아하며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다 먹고 나니 다들 피곤함이 몰려와서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아침까지 죽어 있다가 깨어나 보니, 떠났을 줄 알았던 가수와 그 아들이

우리의 텐트와 바이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이라고는 라면 한 그릇밖에 없었는데, 그 값에 멋진 공연을 선사해 주고 경비까지 서 주었으니 얼마나 크게 베푸는 친구들인가. 사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우리는 너무 피곤해서 보초를 세웠대도 신나게 조느라고, 눈앞에서 바이크가 몇 대 사라졌더라도 몰랐을 터였다. 정 많은 그 가수는 나중에 연락하라고 이메일 주소도 건네주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친절한 사람들은 또 이렇게나 친절해 고마운 마음이 매우 컸다.



그날 저녁에는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우리는 울란우데를 그대로 지나쳐 계속 달렸다. 밤 열두 시에 카페에 도착해서는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슬슬 졸린 대원들이 눈에 띄어, 먼저 출발하여 일찌감치 바이칼 호수의 호텔에 도착하여 쉬겠다는 조와 좀 늦더라도 여기서 더 쉬고 가겠다는 조, 두 조로 나누어 떠나기로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주변은 완전히 캄캄해진 상태였다. 때로 달리는 우리의 옆으로 바이칼 호수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었는데, 시커먼 물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일렁이는 바다처럼 보였다. 피곤해서 더 이상은 달릴 수가 없었다. 바이칼 호수가 보이는 호텔이고 뭐고 그저 여기서 바이크를 멈춰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2조는 호텔을 포기하고 길가의 버스 정류장에서 잠을 잤다. 천장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아침이었다. 간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호수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호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그날 아침부터 불운이 시작되었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길이 온통 물웅덩이 천지였다. 나는 아차 하는 순간 큰 웅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바이크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아이고,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바이크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악수를 건네듯 바이크 손잡이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게 작용했던, 살겠다는 의지가 손과 손목을 지탱해주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5개월 간 벤치프레스 운동으로 길러둔 팔의 완력이 제때 발휘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제멋대로 튕겨나가려는 바이크를 내 팔과 손목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들어진 기적이 아니었을까 하고 지금에 와서야 생각한다.

7월 17일, 아침 7시에 기상했지만 전날에도 고장 난 바이크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한 차례 수리를 거치고 출발하게 되었다. 과하게 화창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었더니 졸음이 두 배로 쏟아졌다. 우리는 졸음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부터 백까지를 큰 소리로 외치며 가고 있었다. 사고가 난 사람은 내 앞의 앞, 이렇게 말하기는 참 미안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살았다. 그의 사고를 목격한 순간, 잠이 싹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는 시속 110km 정도로 달리다가 넘어졌다. 그는 갈비뼈가 일곱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 사고를 목격한 나는 너무 무서워져서 더 이상 바이크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를 실은 앰뷸런스를 따라 달려서 케메로보에 도착했다. 청정 도시이자 보드카 제조로 유명한 케메로보는 러시아에 오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도시다운 도시'였다. 도로에 세계의 유명 메이커 차량이 대거 돌아다니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런 느낌이었다.

사고 이후로 우리는 카페가 나오는 족족 들어가 쉬었으며, 밥을 먹은 다음에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잠을 자고 출발했다. 중간에 그런 식으로 쉬어가며 달리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 길가에 바비큐를 파는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레스토랑에서 본 러시아인들은 참 가정적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니 내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좋다고 가족을 두고 이 먼 곳까지 왔지만, 정작 이곳에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었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날 밤에는 바비큐의 힘을 빌려 국경지대인 알리스까지 갈 수 있었다. 부근에서 숙소를 구하기 위해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곳 사람들에게는 열일곱 대의 거대한 바이크, 할리데이비슨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꼴이 영 수상해 보였던가 보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차 두 대가 달려와 우리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니 경찰 쪽에서 도움을 주겠다며 알아보고는 기차역 앞의 작은 여관을 알선해주었다. 여관은, 방 내부는 인테리어가 조악하고 낡아빠졌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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