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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뒤흔든 女人들

지앙성난 지음 | 시그마북스
중국을 뒤흔든 女人들

지앙성난 지음

시그마북스 / 2008년 12월 / 317쪽 / 15,000원



역사에 제왕으로 기록된 황후_ 서한의 여후(呂后)


여치(呂雉, 기원전 291년~기원전 180년)는 고황후, 고후, 여후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亞後)로서 서한(西漢)을 건국한 고조 유방의 황후이다. 젊은 시절 여치는 아버지 여태공을 따라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왔다. 여후에 관한 고사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후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유방이나 척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는 항상 남성에게 유리한 규칙이 적용된다. 역사는 남성 승리자에게는 '지혜'라는 영광의 관을 부여하며 그들의 수단보다는 성공을 더 부각시킨다. 이와 달리 여성 승리자에게는 항상 '잔인'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여후는 중국이 봉건사회에 진입한 이후 등장한 첫 번째 여성 집권자이다. 한대(漢代)도 조대(朝代)와 같이 부계사회였지만 모계사회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여후를 제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양한(兩漢: 중국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기에 집권한 황제들도 여전히 태후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경제(漢景帝)의 어머니인 두태후(豆太后)는 경제를 종용해 자신의 아들 양왕(梁王) 유영(孺 )을 보위에 올리려 했으나, 이후 관도공주(官途公主)의 개입으로 결국 경제는 태자 유영을 폐위시키고 유철(有鐵)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이후 황제로 등극한 유철이 바로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무제(韓無帝)이다. 한무제는 집권 초기 10년 동안은 할머니 두태후와 어머니 왕태후(王太后)의 간섭 아래에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한 무제는 죽기 직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과부인(毬果婦人)을 죽여버렸다.



이후 동한(東漢)시대로 접어들면서 모후들의 권력행사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황태후들로는 장제 두태후, 화희 등태후, 안사 염태후, 순열 양태후, 환사 두태후, 영사 하태후 등이 있고, 그중에서도 화제(和劑)의 황후인 등수(燈穗)가 가장 유명하다. 한대 여성들은 이후 다른 어떤 시대의 여성들도 가지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태후로서 나랏일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녀들의 힘을 짐작할 만한 첫 번째 근거로는 호칭을 들 수 있다. 당시 많은 황족이 자신의 어머니 성씨에 따라서 불렀는데, 이는 이후 조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한나라만의 독특한 관습이다. 두 번째 근거로는 작위를 들 수 있다. 한대의 많은 여성은 제후로 봉해지면서 그에 걸맞은 작위와 봉읍을 가졌다. 예를 들면 한고조 유방은 형의 부인에게 음안후(音安候)라는 작위를 내렸고, 뒤이어 권력을 잡은 여후는 소하의 부인을 찬후(贊後)에, 번쾌의 아내인 여수를 임광후(任光後)에 봉했다. 또 한문제(寒門帝)때는 제후 왕녀들에게 2,000호(戶)규모의 읍을 하사하기도 했다.

세 번째 근거로는 건축물을 꼽을 수 있다. 몇 년 전, 고고학자들은 장락궁에서 출토된 벽화 속의 방이 모두 붉은색 바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보통, 규모가 큰 집의 바닥을 붉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진(溱)의 함양궁(檻羊宮) 1호 궁전과 3호 궁전의 주전(主前)바닥은 모두 붉은색이다.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 정도의 특별한 사람들만 붉은색 바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붉은 바닥이 황제가 머물던 미앙궁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현대 여성들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대에는 이후 다른 시대와는 달리 여성의 재혼문제에 개방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한문제의 어머니 박희와 한무제의 어머니 왕희(王喜)처럼 재혼한 몸으로 당당하게 국모(國母)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결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재상 진평의 부인으로, 진평이 그녀의 다섯 번째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여인_ 동한의 등수(鄧綏)

재능 있는 여인 반소(反蘇)가 『한서(漢書)』를 쓰기 위해 황가의 동관 장서각에서 자료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당시 황제인 동한 화제 유조에게 청했더니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당시 화제는 서로 시기 질투하던 황후 음(陰)씨와 비빈들의 다툼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서』를 집필 중인 반소가 여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관한 책인 『여계(女誡)』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반소를 불러 책의 줄거리를 들은 화제는 후궁들이 이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자신도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제 앞에 선 반소는 마지못해 『여계』를 가르치러 입궁하겠다고 대답했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반소는 명문가 출신이었는데, 서한 성제 때 유명했던 반첩여가 바로 그녀의 고모할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역사학자 반표(反表)이고, 역사학자 반고와 붓을 던지고 군대로 달려간 명장 반초를 오빠로 두었다.『한서』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반표와 반고가 차례로 죽자 반서가 『한서』를 완성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당시에는 여성이 역사서를 쓴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쓰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아닌 당대 왕조 한의 역사였다.



음황후와 등수는 사실 친척관계이다. 음황후는 광무제 유수의 황후인 음려화(陰呂化)일가였는데, 등수의 어머니가 바로 음려화 황후의 5촌 조카딸이었다. 그리고 등수의 조부는 동한 개국 공신인 태부(太傅) 등우이고 아버지는 등훈이었다. 광무제 유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음려화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 "음려화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황제 자리에 오른 것만큼 기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음려화는 뛰어난 미모와 온순한 성격으로 호족 출신의 황후 곽성통(郭聖統)을 밀어내고 당당히 입궁하여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화제 유조의 황후 음씨와 귀인 등수도 모두 음려화의 빼어난 미모를 물려받은 덕분에 총애를 받고 있었다. 동갑이었던 음씨와 등수는 화제가 열네 살이 되던 해 모두 태자비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등수의 아버지가 병으로 죽어 등수는 부친상을 지내고 나서 3년 후에 다시 입궁했다. 등수가 자리를 비운 3년 동안 음씨는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화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친척 등수의 미모와 실력도 자신과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음씨는 등수가 다시 궁으로 돌아온다면 분명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음 씨 일가들은 안팎으로 힘을 써 등수가 입궁하기 전에 음 씨를 황후로 만들었다. 이 일은 등수는 물론이고 등씨 일가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후한의 역사 기록에 등수가 입궁하던 모습을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좌중을 압도했고 모든 사람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했다"라고 할 만큼 등수의 미모는 음향후보다도 월등히 뛰어났다.



그래서 등수의 입궁에 음황후가 느끼는 부담은 상당했다. 게다가 등수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지혜로웠다. 여섯 살 때 사서(史書)를 읽기 시작하여 열두 살 때는 『시경(詩經)』과 『논어(論語)』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처럼 등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형제들과 함께 학술적인 지식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등수가 바느질하기 등 보통 여자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볼멘소리로 "여자 박사라도 되려는 것이냐?"라며 불평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등수를 보통 여자아이로 대하지 않던 아버지 등훈은 딸과 함께 사회정세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등수는 비록 음황후보다 3년 늦게 입궁했지만 음황후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게다가 등수가 입궁하기 직전, 등씨 가족은 등수에 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이란 등수가 맨 처음 입궁하려 했을 때 이상한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그녀가 손으로 하늘을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고 푸른 하늘에서 내리는 젖을 마셨다는 것이다. 이 꿈은 '하늘을 만지는 꿈을 꾼 요(堯)임금이 제왕의 자리에 올랐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 임금 또한 하늘에 올라가 음식 먹는 꿈을 꾼 뒤에 그렇게 되었으니, 이 꿈은 제왕이 될 조짐을 보이는 꿈이다'라고 해석되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관상가를 데려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여줬는데 그 관상가는 또한 "탕 임금처럼 천하를 다스릴 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꿈 해석들은 옛날부터 모두 출세한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 입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입궁 전에 등수의 숙부 등해가 그녀에게 은밀히 말했다. "1,000명의 목숨을 구한 사람의 자손은 크게 된다는 말이 있다. 너의 아버지(등훈)는 과거 석구(石臼)강을 막아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하늘에서 분명 우리 가문에 복을 내려 줄 것이다. 게다가 너의 조부(등우)께서 일찍이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인 것이 없다. 그러니 내 후손 중 뛰어난 자가 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그녀는 '가문을 높일 인물', '제왕의 자리에 오를 상'에 대한 의무감도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받은 가족들의 사랑과 뛰어난 글 솜씨가 만들어 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나라의 국모 자리에 오르겠다는 당찬 꿈을 가진 그녀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입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별안간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했다. 3년을 꼬박 채우고 다시 입궁할 준비를 할 때는 이미 황후 자리에 음황후가 앉아 있었다. 등수가 죽고 난 뒤 안제는 집정 능력이 부족해 환관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염후(念後)의 섭정까지 받게 된다. 밖으로는 대신이 죽임을 당하고 안으로는 태자가 폐위되면서 동한 왕조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등수의 업적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녀는 동한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 업적과 명성을 가진 최고의 황태후가 되었다.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여인_ 당대 무측천(武則天)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624년~705년)이 죽은 뒤 남긴 것은 글자 없는 비석이었다.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그녀는 후세에 무수히 많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큰 업적을 남긴 여러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무측천은 당고조 무덕 7년(624년)에 형주(刑誅) 도독(道獨) 무사화(武士化)와 수나라 종실 출신인 양씨의 딸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던 무측천은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궁녀로 선발되었다. 입궁하여 당태종의 재인(才人)이 된 무측천은 그에게 직접 미랑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무미랑이라고 불리기 이전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신당서(新唐書)』의 '측천황후 본기'에는 무씨휘후라 적혀 있지만 『신당서』의 '지제이십칠지리일(志第二十七地理一)'에는 또 화주, 화음 두 지역의 무측천이 섭정하던 수공년에 피휘(왕이나 높은 이의 이름에 사용된 것은 피한다는 뜻)하여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아마도 그녀의 본명은 무화후가 아닐까 짐작되는데, 사내 이름 같은 이 이름은 아버지 무사확이 남자아이 옷을 입혀 그녀를 키웠다는 이야기와도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가 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 떠있는 해와 달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뜻을 가진 조(組)자로 바꾸었다. 측천이란 두 글자는 아들 이현이 그녀에게 '측천대성황후(測天大成皇后)'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나온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불리던 이름에 따라 그녀를 '무측천(武測天)'이라 불렀다.



무측천은 든든한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입궁하자마자 당태종에게 이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출발은 누구보다도 멋졌지만 이후 12년이란 긴긴 세월동안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녀는 줄곧 '재인'의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무측천보다 두 살 어린 재인 서혜는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입궁했지만 줄곧 신분 상승하여 재인, 첩여(捷女), 충용(充用)을 거쳐 마침내 비(妃)의 자리까지 올랐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당시 유명했던 '사자총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태종에게는 사자총이라고 불리던 명마가 한 필 있었는데, 성질이 워낙 난폭하여 그 말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무측천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채찍과 철퇴, 비수만 있으면 소첩이 그 말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말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 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당태종은 "의지가 매우 훌륭하구나"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당시 겨우 십대였던 어린 소녀는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태종은 그녀의 용감함을 칭찬하긴 했지만 여성스럽지 못한 그녀에게 전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직접 무측천의 이름을 미랑으로 바꾼 것도 남자 이름 같은 그녀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당태종은 서혜처럼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을 더 좋아했는데, 무측천은 지나치리만큼 활발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후세 사람들의 글을 보면 서혜는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자제력이 뛰어나 유가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여성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지혜롭고 총명했던 서혜가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과 궁의 대대적인 수리를 간언하던 모습은 장손황후(長孫皇后)와 매우 흡사하다. 장손황후는 일생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다. 당태종은 장손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와 닮은 서혜를 다시 얻었다. 이를 보면 당태종은 장손황후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서혜가 황제의 총애 속에 있을 때 무측천은 오랫동안 후궁전에서 외롭게 지내야했다. 보는 눈이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측천은 아버지 당태종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아들 이치(理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손황후의 셋째아들인 이치는 두 형인 태자 이승건과 위왕 이태가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부지리로 태자가 된 인물이다. 이치는 처음부터 태자 교육을 받으며 자라지 않은 데다 이미 위로 강력한 두 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아버지 당태종은 이러한 이치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당시 무측천보다 네 살 어렸던 이치는 자신보다 어린 태자비 왕(王)씨와 처첩 여럿을 이미 거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던 여인들과 달리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성격이 강한 미인 무측천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또 하나, 이치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곁에서 시중들던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늘그막에 자주 변덕 부리던 아버지의 의중과 기분을 미리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당시 무측천은 죄책감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이 '금지된 사랑'에 저주를 퍼붓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훗날 그 사랑에 감사했을 것이다. 힘든 시기에 '금지된 사랑'이 오히려 이치로 하여금 다른 여인들보다 무측천에게 더 많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다.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듯, 가질 수 없었기에 무측천에 대한 마음이 더 컸다.



황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여인_ 북송의 유아(劉娥)

사람들이 송진종의 황후 유아(儒雅, 969년(?)~1033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녀가 '아들을 훔쳐 태자로 삼았다'는 민간 전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는 일찍이 역사상 '송대 무측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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