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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 414쪽 / 13,000원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비밀단체 형태의 정치사회운동도 전개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07년 4월에 결성된 신민회(新民會)였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사진)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 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설립 직후부터 교육구국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다. 신민회의 첫 학교는 남강 이승훈 등이 중심이 되어 1907년 12월 24일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다. 사환으로 출발해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된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울 결심을 한 건 안창호의 연설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승훈을 감동시킨 안창호의 연설 대목은 "나라가 없는 민족은 세계에 상놈이요, 전 민족이 상놈이 되거든 당신 혼자 양반이 될 수가 있겠소?"라는 구절이었다. 이승훈은 이 말을 듣고 더 들을 필요가 없다하여 강연장을 뛰쳐나와 당장 머리를 깎고 "여주 이가가 다 상놈인데 혼자 양반이 될 수 없으니 대한 민족 전체가 양반이 될 도리를 하여야 한다"고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윤식은 '연설의 감염성'에 주목했다. 그는 "서양의 문명개화 사상이 민중에게 소개하는 방식의 연설을 통해 행해졌다는 것은 개화기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만하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설은 목소리이며 외침이고 따라서 여지없는 선동이며 일종의 감정이다. (중략) 자연, 과장된 표현이 알게 모르게 스며든다. 저도 모르게 흥분상태로 빠져든다. 그 상태는 선동의 경우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랬다. 당시에는 선동이 없인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였다. 너무도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구국운동 차원에서 전개된 학교 설립 붐에 따라 사립학교는 한때 3000~4000개교에 이를 정도였다. 특히 종교계 사립학교가 많았다. 1910년 2월 현재 종교계 사립학교는 모두 810개교로, 천주교 46개교, 불교계 5개교를 제외하면 모두 개신교계 사립학교였다. 이에 대해 백낙준은 한국 개화기의 기독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위대한 교육자로서 환영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교 설립 붐은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탄압받기 시작했다. 통제를 벗어나 있는 사립학교에 대해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요구하고 검인정 교과서만 쓰게 했다. 1909년 2월엔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기부금이 중요운영자금이었던 사립학교에 큰 타격을 준 데 이어 4월에 '지방비법'을 공포하여 지방재산과 시장세 및 잡세에 의존하고 있던 지방 사립학교들을 폐교로 몰고 갔다.



일제는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1905년 2월 통감부 산하 교육 담당 고문으로 부임한 누사하라 히로시는 한국인에겐 "고등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으며, 이런 생각이 이후 일본 정책에 반영됐다. 일본인 신문 <경성신보> 사설(1908년 2월 29일) '무익한 유학생'(당시 도쿄에는 사비 유학생의 증가로 한국인 유학생이 800명에 이르렀다)을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한국인은 아직 전혀 근대적 교육을 받을 만큼 발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두뇌는 일본의 가마쿠라시대(12세기 말~14세기 초) 정도에 머물러 있다. 한국 유학생은 쌍방에 유익함은 없고 해악만 끼치므로 그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에 비용을 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

일제가 1905년에 시작하여 1909년에 끝낸 '화폐정리사업'은 백동화 등 조선 화폐를 없애고 일본 화폐만 쓰게 함으로써 조선의 화폐 금융 체계를 일본 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켰다. 많은 조선인들이 재산을 잃었고 그만큼의 재산이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많은 한국 상인들이 몰락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화폐정리사업에 따라 일본 제일은행권이 본위화폐가 되었으며, 1909년 11월에 한국은행이 설립됨에 따라 제일은행 업무 일체가 은행권과 함께 한국은행에 인계되었다. 또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빚에 옭아매 경제주권을 뺏는다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한제국 정부가 원치도 않는 빚을 억지로 사용토록 했다. 대한제국 1907년도 예산 1370만 원 가운데 1300만 원(원금 1150만원, 이자 150만 원)이 일본의 차관으로 채워졌고, 일본은 1할의 고금리 수수료(이자)를 떼 갔다. 이를 보다 못한 민간 차원에서 일제의 예속적 차관에 저항에 "나라 빚을 갚아서 주권을 사수하고 민족경제를 이어나가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을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예의 주시하고 있던 통감부는 1908년 7월 국채보상 지원금 총합소 재무담당인 양기탁을 의연금 횡령 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다. 김정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암초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라고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된 것에는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조항래는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국채보상을 위한 의연금 갹출만을 강조했을 뿐이고, 이것을 어떻게 관장하여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보상한다는 그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으며, 일제의 탄압책동과 국내의 분파세력에 대한 대응도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찬은 "국채보상운동의 지도부에는 전 현직 고위 관리와 개화파 인사가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중략) 특히 상당수가 친일 성향인 개화파 인사 중 상당수는 일본의 침략 과정에 부를 축적하였거나 출세한 인물들로 일본으로부터 빚을 들여오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일찍부터 문호 개방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주장해왔기 때문에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근대화라고 반색했다. 결국 개화파의 근대화론은 일제의 침략을 묵인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돼 버렸다"고 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은 돈은 한일병합이 되자 경무총감부로 강제 이관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유산이라면 이 운동은 여성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운동은 전국 각지에 30여 개 여성단체를 조직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국채보상을 위해 1907년 2월 23일 최초로 조직된 여성단체인 대구 남일동의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이 중대한 국가사업인 국채보상운동이 남자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있는 데에 격분하여 전국 여성을 향해 분발하여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돌림으로써 결성됐다. 이는 곧 부인들이 지닌 반지·목걸이·팔찌 등을 의연금으로 내놓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고미숙은 "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여성들을 민족적 주체로 자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며 "그것은 여성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여성들의 목소리가 다채로운 층위에서 언어화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고 평가했다. 정현백은 "여성에 의한 국채보상운동이 지닌 더욱 중요한 의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자율적인 여성운동의 효시라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국채보상운동은 90년 후인 1998년 초에 되살아났다. 당시 한국은 이른바 'IMF 환란'을 맞아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1998년 시점에서 총 외채는 국민총생산 4000억 달러의 37퍼센트에 달하는 1500억 달러였다. 1996년까지 7~9퍼센트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에는 마이너스 7퍼센트로 떨어졌고, 2~3퍼센트였던 실업률은 9퍼센트로 치솟았으며, 근로자들은 평균 9퍼센트 임금 삭감을 했다. 그런 우울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촉발된 '금 모으기 운동'이 결합되면서 'IMF 민족주의'라 해도 좋을 정도의 민족주의적 열기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점에서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충돌 지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다. 2007년 2월 21일에는 대구 도심에 자리잡은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국채보상운동의 현대적 의의'를 주제로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이곳에 참석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박원순은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효시이며 오늘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고 했고, 환경재단 대표 최열은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이며 경제정의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다시 전개된 의병투쟁은 1907년 7월의 고종의 양위와 그해 8월의 군대 해산을 계기로 더욱 치열하게 확대되었다. 의병투쟁에는 유생·농민·포군을 비롯하여 해산된 군인들과 광부 등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했다. 이들 의병부대는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고 철도와 전신선을 파괴하는 등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7~1911년에 활동한 의병 수는 총 14만 정도로 추산되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1908년 일본 통감부의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정당함을 홍보하자 장인환과 전명운 두 애국지사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을 계기로 의병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일본은 1908년 5월 경기도·충청도와 강원도 일부 지방에 제6사단의 보병 제23연대를, 서울 평안도 황해도에 제7사단의 보병 제27연대를 각각 파견하여 의병 탄압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의 투쟁경력을 갖고 있는 호남지방의 의병만은 꾸준히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간 '남한대토벌작전'을 지휘하며 호남의병을 철저히 탄압했다. 일제는 전라도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는 동시에 전라도의 기(氣)를 꺾기 위해 사실상 '대토벌'을 넘어서 '소멸'을 감행했다. 홍영기는 일제가 지칭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대신에 '1909년 호남의병대학살사건'이라 바꾸어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제의 군사작전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침략과 수백 년 전의 복수심까지 결함됨으로써 이미 잔학성이 예고된 것이었다." 이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해 2000여 명의 의병이 사상하거나 투항함에 따라 호남의병은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호남의병의 와해는 조선에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의병운동 또는 의병전쟁의 성격에 대해선 오늘날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조동걸은 '의병전쟁'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왕과 정부는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쟁의사도 결정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럴 때 민족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권의 형식적 당국자가 아니라 민족 자체인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병운동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했고, 의병의 의지가 민족의 양심과 의지를 대변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의병운동은 민족의지를 표현한 성격의 호칭인 의병전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오영섭은 민중주의사관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행 근현대사 교과서의 의병 서술은 인민대중의 반봉건 반침략 활동이 역사발전을 선도했다고 하는 이른바 민중주의사관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았다. 한말 의병운동 당시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들은 고종 세력과 밀접한 연계하에 활동하였다. (중략) 개별 의병장의 신분상의 평민성만을 가지고 그들의 의병운동의 성격을 평민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매우 단선적인 역사해석이다. 차라리 고종 세력의 근왕성과 평민 의병장의 평민성을 아울러 고려하는 것이 한말 의병운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오영섭은 의병 참여동기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체로 고종 세력에게는 친일 세력을 축출하고 전제황권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유림층과 해산 군관에게는 강렬한 의리심과 애국심에 따라 일본 세력을 물리치려는 사상적 동기가, 평민층에게는 의병에 참여하여 급료를 받으려는 경제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저명한 한일의병장·일부 척사·혁신 유림·전직 군관 등 비교적 사상성과 애국성이 투철했던 우국지사들을 제외할 경우 상당수 의병 세력들은 다소간 생존권 확보차원에서 거의 활동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진화론·영웅숭배주의·문약망국론

중국에선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청 말의 저명한 개혁사상가이자 문인이기도 했던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1929. 사진)와 엄복(嚴復, 옌푸, 1853~1921) 등의 지식인이 사회진화론을 국가 간의 경쟁에 적용시켰으며, 이 또한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 사회진화론은 망국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자강(自强)이 생존의 문제로 부각된 190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사회진화론은 중국 변법파(變法派)의 논객 양계초의 저서 『신민설(新民說)』이 1902년에 간행되면서 1900년대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양계초는 『신민설』에서 "오늘 열강들의 민족제국주의를 우려해 우리가 대적하려면 ……우리가 우리의 민족제국주의를 행하는 방책밖에 없는데, 민족주의를 중국에서 실행하려면 신민(新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00년대 지식인들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오늘날에도 열띤 논쟁의 대상이다. 박노자는 "제국주의를 떠받치는 주요 담론인 사회진화론의 내면화를 필수 조건으로 내걸었던 그들의 독립운동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지적(知的) 항복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하동현은 박노자와의 논쟁에서 "한 세기 전 우리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논리, 계급적 이해, 서구 중심주의적 인식에 함몰되었다는 박 선생님의 지적도 설득력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 그런 관점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현재적이 아닌가 합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양계초라는 동아시아의 선구적 지식인조차 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두 눈으로 목격한 1919년에서야 비로소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달았고 그에 맞서 중국이 살아남을 방법으로 '개명 독재'라는 국가주의적 해결 방안을 고안했습니다. 양계초가 그러할진대 개화기 우리 지식인들에게 왜 사회진화론과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지 못했느냐고 채찍질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셈입니다."

사회진화론은 영웅숭배주의로 이어졌다. 국가주의 사상에 심취한 양계초가 영국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의 영웅숭배사상을 받아들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양계초의 영웅숭배주의는 집단주의적 '대아(大我)' 사상과도 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16일과 17일자에 쓴 '큰 나(大我)와 작은 나(小我)'에 반영되었다. 국가라는 '큰 나'를 위해 '작은 나'를 희생하자는, 즉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메시지였다. 이에 따라 중국의 본토까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됐으며, 이 과정에서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도 화려하게 부활했다. 적은 군대로 수양제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을지문덕은 '한국의 4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 되었다.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이렇게 강하고 용감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라고 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전기를 선전한 광고는 "차가운 피를 뜨겁게 데워주며 뼈대가 없는 자에게 뼈대를 주는 책"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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