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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 지음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 316쪽 / 13,000원



조금은 가난하게, 불편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제가 대학교수로 끼니를 때울 때 이런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네, 대학교수와 거지가 닮은 점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그게 뭔데?" "첫째, 말로 밥 빌어먹고 산다." "그 다음은?" "몸 편하고 마음 편하다." "또 그 다음은?" "한번 잡으면 끝까지 깡통을 놓지 않는다." 빈정대는 농담이었지만 이 우스갯소리 안에는 부러움이 섞여 있습니다. 대학교수. 좋은 직업이지요. 그러기에 제가 교수직을 버리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그렇게 말렸고, 동료 교수나 학생들 가운데는 '정말 대학교수를 그만두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내기를 건 사람도 있었겠지요.



대학을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곳에 농사일에는 거의 까막눈인 상태로 온 지 다섯 해를 넘겼습니다. 농사는 머리로 짓는 게 아니더군요. 말품을 팔아 끼니를 해결할 수도 없고요. 하루 이틀 사이에 일머리가 트이는 것도 아니고, 서툰 일손이 한두 해 사이에 잽싸지는 것도 아닙니다. 첫해 힘든 거야 으레 그러려니 치더라도 한두 해도 아니고 서너 해를 파농하다시피 하다 보니 정신이 아뜩해지더라고요. 게으르거나 요령을 피운 적도 없는데 농사지은 지 세 해쯤 되는 세밑에 우리가 지어서 거두어들인 주곡을 돈으로 환산해보니 한 사람이 한 해에 18만 원어치를 거두었을 뿐이에요. 먹고 쓰고 남은 돈이 그만큼이냐고요? 아니요. 빼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몽땅 털어서 계산해보니 그렇더라니까요. "주곡 농사? 그것도 유기농으로? 그렇게 해서 먹고살 길이 열린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 장을 지진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 또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마을 어른 입에서요. 그야말로 '쌔빠지게' 일했는데 고작 소득이 한 달에 1만 5천 원꼴이어요.



"음력 오월 단오 때꺼정은 염소가 먹는 풀은 사람이 먹어도 암시랑토 않다는 거여." 어쩌다 무심결에 들은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이던 때가 있었어요. 남새 농사도 내리 3년을 파농했으니 밭에서 거둘 것이 있어야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초제도 농약도 화학비료도 마다하려면 똥오줌 잘 버무려서 퇴비라도 넣고 벌레라도 제때 잡아주어야 하는데, 그리고 풀이라도 제대로 잡아주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어요. 번번이 때를 놓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반찬으로 염소가 먹을 만한 풀들을 뜯었어요. 제가 염소가 되어서 직접 맛보고요. 어렸을 적에 어깨너머로 보았던 곰밤부리며 씀바귀며 명아주 같은 것을 뜯어다 주고 나물로 무치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도시내기인 우리 공동체 안식구들 낯빛이 달라져요. 요리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지요. 우리 마을 냇가에 야생 갓이 꽤 많이 자라서 그걸 캐다주어도 갓김치 담그는 법을 모른대요. 동네 안어른들께 여쭈어보아도 고개만 흔들어요. 언젠가 제가 밭에서 자생하는 씀바귀를 캐서 냇물에 씻고 있었더니 빨래를 하러 오신 동네 안어른 한 분이 그것도 먹는 풀이냐고 도리어 제게 물어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요. 콩과 식물인 살갈퀴를 뜯어다가 된장에 싸 먹은 적도 있어요. 이름은 나중에야 알았어요. 먹을 만하더라고요.



소득이 없으니 지출이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어요? 꼭 그 탓만은 아니지만 저는 빨래할 때나 몸 씻을 때 세제나 비누를 안 씁니다. 물도 수돗물도 거의 안 쓰지요. 집 앞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손발 씻고, 개울이 마르면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씁니다. 제방은 산에 가서 주워 온 삭정이나 장작을 패서 덥히고요. 우리 식구 가운데 어쩌다 밤에 뒤를 보고 뒷간에 전깃불을 켜놓은 채 잊거나, 잠든 시간인데도 툇마루에 외등을 밝혀놓고 있으면 벼락이 납니다. "아니, 땅 살리고 물 살려 나도 살고 이웃도 더불어 안심하고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뜻을 세웠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고작 이것밖에 안 돼? 내 땅만 번듯하게 잘 가꾸면 그것으로 끝이야? 전기 낭비하면 그만큼 화력 발전소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고, 그만큼 수질도, 공기도, 땅도 오염되는 것 몰라?"



좀 심했나요? 귀농을 꿈꾸는 분들 가운데 이런 말 듣고 정나미가 떨어져서 뜻을 접을 분이 있을까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입은 가로찢어져 있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이 있지 않아요? 언젠가 제가 귀농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윤 선생님 사는 곳 땅값이 얼마나 됩니까? 3만 원 선이라고요? 그 돈으로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 은행 이자를 제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또 자연농법으로 힘 안 들이고도 농사지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연농법으로 농사지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마자 제 목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길이 있다면 왜 이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야반도주하다시피 태어나 자란 정든 땅 버리고 달동네 찾아 도시로 가겠어요?' 대뜸 이렇게 쏘아붙이려다가 참고, "귀농의 뜻을 세우는 분들은 어차피 좀 더 가난하게, 좀 더 힘들게, 좀 더 불편하게 살 마음의 준비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농사 경험이 저처럼 거의 없는 사람이 처음 농사를 시작하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하든, 제초제, 노약, 화학비료를 쓰는 관행농법을 따르든, 서너 해는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요. 십중팔구 손해 보기 십상이지요. 그 손해는 수업료로 여기세요. 도시의 생활양식과 수준을 시골에서도 유지하려는 욕심을 부리다 보면 투기 영농에 손대기 쉬운데 농사는 투기가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그럴듯한 성공사례를 듣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마세요. 농사를 투기로 생각하고 귀농하는 분 가운데 100명에 99명은 손 털고 다시 도시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귀농하려는 분들 가운데 먼저 땅부터 사려는 분들이 꽤 많은데 그런 생각 접으세요. 농사를 모르는 분이 어떻게 땅인들 제대로 볼 수 있겠어요. 먼저 빈집을 거저 빌리거나 헐값으로 구해서 몸만 오시는 게 좋습니다. 머슴살이하는 셈치고 이 집 저 집에 가서 공이를 하다 보면 일머리도 트이고 땅을 보는 눈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고 일러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분은 아직 농사지을 마음의 준비가 충분치 않구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면 소재지까지 걸어가고 걸어옵니다. 잰걸음으로 걸어도 오가는데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 꽤 먼 길입니다. "이 먼 길을 어떻게 걸어다녀요? 자전거라도 타고 다녀야지요." 도시에 사는 분들이 일손 거들러 왔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야 심상하게 들어 넘길 수 있지만, 한 마을에 오래 산 분들이 같은 말을 할 때는 민망해집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뜻을 지닙니다. 농작물을 농사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치도 틀림없는 말입니다. 뛰어다니면 안 됩니다. 걸음을 서둘러도 안 됩니다. 갈지자걸음으로 느릿느릿 논둑길, 밭둑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갓 움 돋는 바랭이풀도 보이고, 배추벌레도 보입니다.



시작을 절약한다고요? 아니요. 시골에는 절약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 때는 있어도 건너뛸 시간은 없습니다. 들고 나는 철에 따라 머리도 쓰고 몸도 움직여야 합니다. 철을 앞당기거나 철을 놓치는 사람은 철 모르는 사람입니다. 서둘러야 할 때도 있고 늦추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한 철, 두 철 나면서 사람도 철이 나고, 한 철, 두 철, 접어들면서 사람도 철이 들어갑니다. 저요? 저는 시골에 산 지 다섯 해밖에 안 되니 아직 다섯 살배기 철부지이지요. 도시의 공간화된 시간, 시계에 의해서 측정되는 인위적인 시간은 앞당길 수도 뒤로 늦출 수도 있지만 싹트고 자라 꽃피는 생명의 시간은 앞당길 수도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의 순리를 거스릅니다.



좀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생의 길입니다. 제가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덥니다. 제가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힙니다. 제가 불편하게 사는 만큼 이웃이 편해집니다.



참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몸 편하면 마음도 편하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자꾸 몸 아끼고 도사리는 버릇이 늘어가요. 저는 허겁지겁 차에 실려 발 동동 구를 때보다 느긋하게 걸을 때 마음 편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마음이 편해야 살맛이 나지 몸만 편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무슨 살맛이 있겠어요? 힘들게 일하는 건 싫다고요? 지나치게 힘들면 그야 일할 맛이 가시지요. 그러나 과로가 아니라면 몸으로 때우는 게 얼마나 상큼한데요. 땀 흘려 일해보아야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막걸리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알 수 있습니다. 다 좋다 쳐도 가난은 지긋지긋하다고요? 강요된 가난은 그렇겠지요.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가난은 원수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은 나눔을 가르쳐줍니다. 잘 사는 길은 더불어 사는 길이고, 서로 나누며 더불어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지난 5년 동안이 제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요.



사랑 없이 하나가 될 수 없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생명을 가진 것은 하다못해 길섶에 자라는 이름없는 들풀 하나까지도 사적인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전 세계에 걸쳐서 유전자조작을 통한 생명체의 인공합성과 형질변경이 첨단과학의 탈을 쓰고 거리낌 없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기술이 특허로 등록되어 밭에 씨앗 하나를 뿌릴 때도 기술료를 치러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지녔다는 것은 그 생명체 안에 하나님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기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같은 이는 이나 벼룩 같은,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몸에 해로운 생명체마저도 '형제'라고 불렀겠지요. 저는 프란체스코의 거룩한 심성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지난여름 장마철에 밤새 물것에 시달리다 제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때 끼적여놓은 시로 고백할까 합니다.



에프킬라



장마가 시작되었다.

습기에 젖어 떨던 벌레들

마르고 따뜻한 곳을 찾아

내 방으로 몰려왔다.



깜깜하고 무섭고 심심한 벌레들

'그만 자고 우리와 놀아'

내 살을 물어 깨웠다.

'어서 일어나, 어서 일어나.'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가려워 벅벅 긁다가

단잠 깨운 그놈들이 귀찮고 미워서

살충제를 찾아 들었다.

모두 죽이고 나서야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죽은 벌레들이 내게 바랐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늦게야.



그 뒤로 그 살충제를 버렸지만, 그리고 고단한 잠 속에는 벌레도 찾아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게으른 제 선잠을 탓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없앤 생명체들이 되살아나지는 못할 겁니다. 이렇게 늘 깨우침은 너무 늦게야 찾아듭니다.



몬산토 콩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있는, 세계에 이름난 몬산토 농약회사에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만들어낸 콩이랍니다. 아시다시피 몬산토 농약회사는 제초제를 비롯해서 농사에 방해가 되는 풀과 벌레들을 어떻게 하면 잘 죽일 수 있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수많은 농약들을 전 세계에 내다 파는 기업입니다. 그 회사에서 제초제와 농약을 뿌리면 다른 생명체는 다 죽지만 인공으로 합성한 특수한 유전자를 지닌 콩만은 살아남게 유전공학을 이용해 만든 콩이 '몬산토 콩'이랍니다. 이 몬산토 콩이 어찌나 농가의 일손을 크게 덜어주는지 미국의 콩농사 가운데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콩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식용으로, 사료용으로 팔리고 있는 중이라더군요.

본디 콩의 고향은 우리 한반도가 포함된 동북아시아 지역입니다. 이 콩이 독일을 거쳐 유럽에 처음 이사 간 때는 18세기,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때는 19세기라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서 전 세계 수요량의 50퍼센트가 넘는 콩을 생산하고 있다지요. 몬산토 회사에서는 '몬산토 콩'의 유전인자가 들어 있는 콩은 따로 몬산토 회사에서 종자콩을 사서 쓰지 않더라도 유전자 감식을 하여 기술료를 받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인공으로 조작한 유전자가 사람이나 가축의 몸에 길에 보아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 터에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어쩌다 이 땅에 떨어져 다른 콩까지 전염시키는 경우에 손해배상을 하려는 생각은 접어두고 기술료를 받아내겠다는 심사라니요.

사람들이 저지르는 이런저런 꼴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하나님의 자식인지 더럭 의심이 생깁니다. 내친김에 한마디 더하지요. 하나님이 깃들어 살아 숨 쉬는 생명체 하나하나가 사적인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제 생각은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종료를 보면 '생명 그 자체'인 하나님을 제 소유물로 여기고 교리나 종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독점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서 생겨나는 싸움이 그칠 날일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싸움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나가 되려는 과정에서 벌이는 싸움이라야 '사랑싸움'이라고 하겠는데, 다른 교리나 종파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자기 것만 옳다고 내세워 하는 싸움이니 거기에 어찌 사랑이 깃들 수 있겠어요?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습니다. 교리나 종파에 기대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교리나 종파 속에서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여서 '님'(임)인 분이 어찌 교리나 종파에 따라 '여럿'으로 나뉠 수 있겠어요? 사랑만이 갈라진 것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상대방을 '임'이라 부릅니다. 교리논쟁이 있어야 한다고요? 예. 그러나 사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자리에서 벌이는 교리논쟁은 정파투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순이 있는 곳에 갈등이 있고, 갈등이 있으면 싸움이 벌어집니다. 싸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싸움이 갈등 해소의 지름길인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고 어른이 된 사람들도 한 마을에 살면서 싸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가뭄에 물꼬 싸움 같은 것은 섬뜩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논밭이 네 것, 내 것으로 갈리고 나면 내 것을 제대로 챙기느냐 못 챙기느냐가 생사의 갈림길이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지요. 어찌 논밭뿐이겠습니까. 법당이나 절집에서 벌어지는 낯 뜨거운 싸움도, 십자군 전쟁 같은 끔찍한 살육전도, 마녀사냥도 모두 부처님도, 알라신도, 하나님도 제 소유로 여기고 제 울타리 안에만 가두려는 데서 생겨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소유'를 으뜸가는 수행의 길로 치는 것이겠지요. '무소유'는 '공동소유'의 다른 이름입니다. 참뜻의 '공동소유'는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눔'입니다. 가진 것도, 몸도, 마음도 함께 나누어야 공동체로서 '하나'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를 한패거리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많은 듯합니다. '하나'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하나'를 되찾고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의 소망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 하나가 되려는 소망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 하나가 되려는 소망은 늘 패거리 의식으로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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