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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헤더 레어 와그너 지음 | 명진출판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헤더 레어 와그너 지음

명진출판 / 2008년 11월 / 308쪽 / 12,000원



Part 1. 소년의 영혼은 낯설고 외로웠다 - 혼란스러웠던 유년기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 / 조금 특별한 오바마의 가족이야기 / 다시 미국으로


오바마와 어머니는 일본을 경유해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새아버지가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시아인 새 아버지와 백인 친어머니, 그리고 흑백혼혈 오바마, 피부색이 모두 다른 가족은 이렇게 탄생했다. 오바마는 여섯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인도네시아에 살았는데, 그동안 여동생 마야도 태어났다. 오마바는 새아버지를 통해 갖가지 모험을 경험하면서 그곳의 생활과 문화를 접하고, 자신의 또 다른 배경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새아버지는 군 제대 후, 미국 석유회사에 취직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새아버지는 그 일로 돈과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새아버지가 돈과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불법으로 돈을 모으고 탈세까지 저지르다, 결국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몰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고, 어머니는 새아버지와의 불화가 깊어지면서부터 오바마에게 온 관심을 쏟았다.



참고로 버락 오바마의 이름은 그의 친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인데, 아버지 오바마는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알레고리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영국이 세운 학교에 다니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공부했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생으로 뽑혀 장학금을 지원받아 하와이대학교에 다녔는데, 하와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와이대학교 역사상 아프리카에서 온 최초의 흑인 학생인데다, 넘치는 자신감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제학생연합회를 조직해 초대회장까지 맡다 보니, 곳곳에서 연설을 초청받았다.

한편 오바마 시니어는 러시아어 강의에서 미국 캔자스 출신의 열여덟 살 백인 여성 스탠리 앤 던햄을 만나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고, 기존의 관습과 시선을 무시한 채 결혼했다. 그리고 1961년 8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버락 오바마를 낳았다. 아버지 오바마는 어머니 앤과 결혼한 뒤 케냐에 있는 가족에게 새 신부에 대한 내용을 편지로 적어 보냈다. 그는 이미 열여덟 살에 케지아라는 여성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두고 있었는데, 케냐에서는 이슬람의 풍습에 따라 아내를 여러 명 두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하와이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는 두 곳에서 장학금을 제안받았다.

하나는 뉴욕시에 있는 뉴 스쿨에서 제안한 전체 장학금으로, 숙식비 및 교내에서의 일자리 제공에, 학생과 그의 가족까지 지원하는 장학금이었다. 다른 하나는 하버드에서 제안 받은 장학금이었는데, 수업료만 받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내, 아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내가 어떻게 세계 최고의 교육을 거절할 수 있겠어?"라며 하버드를 선택했다. 아버지 오바마는 하버드로 가면서 어머니에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고향인 아프리카 대륙과의 약속에 밀려 지켜지지 않았고, 하버드에서 공부를 마친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조국 케냐로 돌아갔다. 한편 오바마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특별했다. 자식이 흑백혼혈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오바마가 용기와 꿈을 잃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오바마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아버지와 함께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어났을 때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함께 혹은, 가까이 살면서 가족의 자리를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1971년, 열 살이 된 오바마는 혼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있는 하와이로 4년 만에 돌아왔다.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다니게 될 학교는 오아후에 있는 하와이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였는데, 주로 하와이의 부잣집 백인 아이들과 아시아계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하와이의 엘리트 집단을 배출하는 명문 학교였다. 푸나호우에 간 첫날, 오바마의 담임선생님은 자신도 케냐에 산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베리'라는 이름보다 '버락'이라는 이름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의 가족이 어느 부족인지도 물었다. 순간, 그전부터 킥킥거리던 반 친구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오바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루오족이라고 대답하자, 아이들은 아예 원숭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면서 노골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꾸짖음으로 잠잠해지긴 했지만, 오바마는 온종일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Part 2. 아무도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질문들 - 방황을 거듭했던 사춘기



아버지의 실체 / 나는 누구인가


어린 시절, 오바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가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들을 재구성해가면서 아버지를 자기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면서 소외감과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견뎠고,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와이로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오바마는 놀랄 만한 소식 하나를 들었다. "네 친아버지가 온다는구나! 너를 보러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소식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하와이에 도착해 그동안 친아버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다면서 오바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친아버지도 재혼을 했고, 케냐에 아들 다섯 명과 딸 한 명이 있고, 지금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요양 차 하와이에 오는 거라고도 했다. 드디어 아버지가 오는 날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오바마를 특별히 일찍 집으로 보냈다. 집에 들어서자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는, 키가 크고 마른 흑인 남자가 오바마를 맞이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오바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껴안았다. 하지만 오바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비록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지만, 오바마에게 아버지와 함께한 한 달은 특별했다. 특히 두 가지는 오바마의 기억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하나는 아버지가 일일 교사가 된 일인데, 그날 아버지는 아득히 먼 옛날의 아프리카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평원을 누비는 사나운 동물들, 사자를 죽여야만 진정한 어른으로 인정받는 여러 부족의 관습과 루오족의 관습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케냐의 역사도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강의가 끝나자 아이들과 선생님은 큰 소리로 박수를 쳤고, 선생님은 오바마에게 "넌 정말 멋진 아버지를 두었구나"라고 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추억은 아버지가 떠나던 날의 일이다. 짐을 싸던 아버지가 레코드판 두 장을 꺼내 전축에 레코드판을 올렸다. 기타 연주가 마치 깡통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 다음엔 날카로운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렸다. 기타 연주가 다시 이어질 때 강한 비트의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기쁨에 찬 밝은 목소리였다. 어느 순간, 오바마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아버지는 춤에 흠뻑 취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오바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눈을 슬며시 뜨고는 싱긋 웃어 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이 그렇게 따뜻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추억들을 남기고 아버지는 떠났다. 사실 아버지는 하와이에 올 때 오바마를 케냐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밑에서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아버지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 이듬해,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동생 마야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인류학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받는 장학금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런 현실은 오바마를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오바마와 어머니는 서로에게 조금씩 맞춰가며 3년을 함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인류학과의 현지작업을 위해 다시 인도네시아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오바마와 여동생 마야를 인도네시아의 국제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이었지만, 오바마는 전학을 거부했고, 결국 어머니와 인도네시아에 가지 않고 다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두 분 역시 좋아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바마는 내적으로 혼자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부터 '백인 중심인 미국에서 흑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으면서 어렵고 복잡하게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다투는 소리에 오바마는 잠에서 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던 외할머니가 어떤 일을 계기로 외할아버지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고,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가 말한 '어떤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데려다줄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그 '어떤 일'이란 바로,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외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는데, 그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오바마는 무거운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위해 희생해온 외조부모의 사랑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오바마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과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오바마에게 또 다른 공포였다. 해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한 오바마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그런 고민들로부터 잠시나마 탈출하려고 했다. 가끔 코카인도 손에 댔다. 그런데 그 시절 방황하는 오바마를 붙잡아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신, 자주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일과 그곳의 생활을 들려주며 오바마의 마음을 위로했고, 그의 미래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오바마는 기로에 섰다. 불량 청소년이 되어 혼돈의 나락으로 빠지느냐, 세상을 상대로 자신을 단련하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느냐,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선택했다.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워나가기로 말이다.

Part 3. 삶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다 - 성숙과 변신의 청년기



새로운 출발 / 지역 사회 운동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오바마는 여러 대학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그 가운데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옥시덴탈대학을 선택했는데, 그곳에서의 2년 생활 동안 그의 인생에는 매우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우선 그는 적어도 친구들 사이에서만은 '배리'라는 이름보다 '버락'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고,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라며 그를 격려해주는 친구들도 만났다. 그 뒤 그는 컬럼비아대학교에 갔고, 뉴욕에 온 뒤로 오바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항상 '버락'이라고 소개했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를 인정하고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눈을 뜬 오바마가 자아를 탐색하면서 나타난 변화의 결과였다.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오바마는 스스로의 성장도 함께 꾀했다.



뉴욕 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중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나이로비에 살고 있는 제인 고모였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순간 오바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오바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바마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나이로비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로 슬픔을 전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상실감 같은 것만 어렴풋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았고, 마음이 아픈 줄도 몰랐다고 고백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오바마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학업에 집중했다. 또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반 인종차별 시위와 같은 흑인학생단체 활동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려면 자신은 물론 나라에도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잘 조직된 지역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역주민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지역공동체가 조직되어 정원처럼 관리되어야 하며, 공동체의 권익은 싸워서라도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83년, 대학 졸업을 몇 달 앞둔 때였다. 그래서 오바마는 우선 자신이 아는 모든 민권운동단체와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답장은 없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하루 빨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오바마는 일단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번 후 다시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컨설팅 회사의 부연구원으로 취직했고, 불과 몇 개월 만에 자신의 사무실과 비서를 둔 재무설계사로 승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을 완전히 바꾸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틀 후 오바마를 만나러 오겠다던 이복누나 아우마가 또 다른 이복동생 데이비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화로 알려 왔다. 전화를 끊고 오바마는 맨하튼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생각들을 털어버리려고 머리를 좌우로 힘껏 흔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내 새로운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나와 피를 나눈 그들은 누구일까? 그 청년은 죽기 전까지 어떤 생각, 어떤 꿈을 품고 살았을까? 그리고…… 가족을 잃고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날 이후, 오바마는 원래 꿈이었던 지역사회 운동가에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지역사회 운동가로 일할 곳을 본격적으로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카고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연봉 1만 달러를 받는 지역사회 운동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시카고에서 오바마가 처음으로 성공한 일은 '알트겔드 가든 공공주택 계획'이었다. 오바마는 그곳의 실상을 처음 목격하고 가슴이 답답했고, 사람들을 만나 해결 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돌파구를 찾게 된다. MET(취업 및 훈련을 위한 시장 직할 위원회) 지회 위원장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의 사업내용이 담긴 팸플릿을 보고, 알트겔드 가든과 관련된 사업이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2주간 철저한 준비 끝에 MET 총책임자와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바마는 사람들에게 집회의 목적을 이야기해주고, MET의 총책임자에게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마침내 MET 총책임자로부터 여섯 달 안에 직업 창출 및 훈련 센터를 설립하겠다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참석한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했고, 함께 집회를 준비한 사람들도 오바마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알트겔드 가든 집회를 성공시킨 후 오바마는 더욱 열정적이고 자신감 있게 일했는데, 오바마가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지녀야 할 안목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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