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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연설

김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위대한 연설

김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1월 / 332쪽 / 15,000원

안티폰, 민주정과 과두정 사이에서


안티폰은 소피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수사학을 가르치던 소필로스(Sophilo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수사학을 배워 '연설의 능력(dunamis logn)'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투퀴디데스(Thuchidides, 455~400)의 기록에 의하면 안티폰은 400인으로 이루어진 과두정 체제를 세우는 데 주동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400인의 과두정은 민주주의 체제를 중단시키고,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곧 스파르타의 아기스(Agis) 왕과 강화를 맺고, 사모스의 반민주적 과두정파 세력과 공조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안티폰의 과두정은 곧 실패로 끝나고 5000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안티폰은 체제 전복이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안티폰은 그의 동료들처럼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당당히 법정에 서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했다.



"제가 예전에 공직에 있을 때, 수많은 돈을 관리하였지만, 제가 언제 결산에 대한 감사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까?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을 받아야 하는 일이 제게 일어나거나 했습니까? 아니 제가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에 있기라도 하였습니까? …전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제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저를 고발한 사람들은 제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법정 연설문을 작성해 주고, 그로부터 수입을 올렸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두정 체제에서는 저는 그런 일을 전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민주정 체제에선 연설하는 능력 덕택에 저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과두정 체제 안에서 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지만, 민주정 체제 안에서는 큰 가치를 지닌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과두정 체제를 원한다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이겠습니까? 제가 과연 그런 계산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아테네 사람들 가운데 오로지 저만이 저에게 무엇이 유익한 것들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의 죄목은 체제 전복이라는 반역에 해당되는 죄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죽음에 맞서서 당당하게 그 자신을 변론했다. 그의 변론은 자기가 추구하던 바와 자신의 공적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변론(apologia pro vita sua, 자기 삶을 위한 변론)으로 평가된다. 안타깝게도 안티폰의 모든 수사학적인 기교와 능력을 총동원했던 탁월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과두정을 이끌었던 책임을 그에게 묻고 사형을 언도했다. 그 후 안티폰은 처형을 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없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러나 안티폰의 연설문은 보석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후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안티폰의 연설문은 수사적 기교를 통해 '개연성'이 넘치는 논변을 설득력 있게 구성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그는 논변을 끌어낼 줄 알았다. 개연성에 기초하여 정교하게 연설을 구성할 때, 그는 격정(pathos)을 일으키는 노력보다 고상하고 숭고한 뉘앙스(euprepous)를 잃지 않으려 했다. 연설문 대필가이면서, 동시에 연설 교사였던 그의 특별한 재능은 세 편의 시범연설(epideiktikon genos)에서 특별히 발휘된다. 그 시범연설 가운데 4부작(Tetralogia)이 세 편 남아 있다. 이 연설문의 시리즈는 실제 법정에서 문제가 된 사건이 아니라 가상적인 사건을 다룬다. 이 4부작 연설문에서는 연설 교육에서 가장 전통적인 '반론(antilogia)'과 '이중논변(dissoilogia)'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반론이란 상대가 낸 논변을 반박하는 논변이고, 이중 논변이란 하나의 전제에서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변호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논변을 구성하는 것이다. 안티폰의 4부작은 상대방의 논변을 그대로 받아들여 상반된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내는 데에 그 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남아 있는 세 편의 4부작 시범 연설은 연설가로서의 안티폰의 모습보다는 소피스트로서의 안티폰의 모습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뤼시아스, 최고의 법정 연설문 작성가

뤼시아스는 케팔로스의 아들이었으며, 뤼사니아스의 손자였다. 그의 가문은 원래 이탈리아 시라쿠사 출신이었다. 아버지 케팔로스는 시라쿠사에 살고 있었으나 아테네에 대한 열정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초청으로 아테네로 이주했다. 뤼시아스는 케팔로스가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태어났다. 그는 재류 외국인(metoicos)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카팔로스 재력 덕택에 아테네의 최상류층 자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뤼시아스는 시라쿠사 사람이었던 티시아스와 니키아스에게 수사학을 배웠다. 412년경, 시칠리에서 잠시 거주했던 뤼시아스가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는 아테네는 400인 위원회가 주도하는 과두정 체제하에 있었다. 그러나 과두정은 곧 무너지고 아테네에 다시 민주정이 수립되었다. 아테네가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과두정에서 다시 민주정으로 환원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처해 있기는 했지만, 뤼시아스는 정치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연설의 기술을 가르치는 수사학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수사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후진을 양성하는 데 투자했다. 특히 아테네의 민주주의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다른 뤼시아스는 민주주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그 후 30인의 참주정이 수립된 후 열렬한 민주주의자였던 뤼시아스는 참주정의 지도자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를 탈출한 뤼시우스는 30인 참주정을 전복시키고 민주정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헤르몬과 함께 외국인 용병 300인을 모았으며, 엘레이야 사람 트라쉬다이오스를 설득하여 군지금을 마련했다. 뤼시아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투사가 된 동기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소신, 참주들에 대한 복수심, 무고한 형의 죽음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마침내 참주정은 정권을 장악한 지 8년 만에 민주주의에 의해 타도되고 말았다. 뤼시아스는 그가 아테네로 돌아온 후 30인 참주 인사들을 법정에 고발했었는데, 이 때 법정에서 그가 연설한 연설문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배심원 여러분, 제가 저들에 대한 고소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설을 끝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일이 그 크기가 너무나 크고 그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함을 일삼는 서른 명의 사악한 이들은 권력을 잡고 난후, 부정한 무리들을 쓸어내고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어 다른 시민들이 탁월함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은 해 놓고, 감히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전 페이손에게 물었습니다. '돈을 받고 저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액수가 많다면야 좋지.' 그래서 전 은 한 달란트를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고, 그는 그러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전 침실로 들어가 금고를 열었습니다. 페이손은 그것을 보고는 수행원 두 명을 부르더니 금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가지고 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는 서로 합의했던 만큼만 가져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 세 달란트와 400퀴지케노스, 100다레이코스, 그리고 네 개의 은제 도자기를 가져갔습니다. 전 그에게 여비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저에게 '네 몸이나 구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지'라고 말했습니다."



뤼시아스는 묘사와 서술의 달인이었다. 그의 연설문은 차분하게 사건을 서술하며, 인물과 상황을 소박한 어조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그의 수사학적인 재능은 당대의 상황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의 글은 당시 아테네의 소송과 법률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며, 법에 담겨 있는 정신마저도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의 연설문들 하나하나가 마치 도자기의 그림이나 벽화처럼, 재생되는 연극처럼 당대의 생활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특히 뤼시아스는 수사학의 세 가지 설득의 조건 가운에 에토스적인 조건을 가장 잘 충족시킨 연설가로 꼽힌다. 그는 의뢰인과 상대방 성격을 대비시켜 그 성격의 도덕적인 차이를 또렷하게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의뢰인은 지고의 선한 사람으로, 상대방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감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창출했다.



뤼시아스는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으면서도 어떤 아테네 시민보다도 정렬적으로 활동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토양 위에서만 제대로 자라나 꽃필 수 있었던 수사학으로 민주주의를 충실하게 일구어 나갔으며, 연설문 작성가로서 돈과 폭력, 권모술수와 사기가 아닌 합리적인 말을 통해 사건을 풀어나갔다. 민주주의의 원칙과 전통을 세워 나가려했던 진정한 수사의 영웅, 최고의 법정 연설가였던 뤼시아스는 80세의 나이에 아테네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도키데스, 전쟁과 정쟁 속의 방랑아

퀴다데나이온 데모스 출신이었던 안도키데스는 아테네의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안도키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지속되던 전쟁과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활동한 10명의 아테네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446년 맺어진 30년 평화협정은 그의 작품이었다. 441년에는 소포클레스,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사모스 전쟁에도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안도키데스의 아버지 레오고라스는 이름난 부자였으며 호사스런 난봉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도키데스는 스무 살의 나이에 과두정주의자들의 정치 동아리에 연줄을 두었던 것 같다. 과두정이 무너졌을 때, 안도키데스는 과두정에 관여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테네의 미움을 사서 잠시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30인 참주체제를 거쳐 아테네에 다시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그의 아테네 시민권도 복권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승리한 후, 델로스동맹(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아테네와 그리스 폴리스들 간에 체결된 군사동맹 협정)의 맹주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코린토스 전쟁(395~386)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계속 전쟁을 진행하는 것이 국익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상을 위해 안도키데스를 아테네의 대표로 파견했다. 특사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의회에 출두하여 「스파르타와의 평화에 관하여(peri ts pros lakedaimonios eirns, 391년」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전쟁을 하는 것보다 정의로운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시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연설가들은 평화라는 이름에는 동의하면서도 평화를 실제로 가능하게 해 줄 일들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여러분들 모두가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말합니다. 평화가 맺어지면 민주정은 매우 끔찍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며, 현 정치체제는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예전에 단 한 번도 아테네의 민주정이 스파르타인들과 평화를 맺어본 일이 없었다면, 그런 일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저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예전에 이미 여러 번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저들과 평화를 맺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전에 있었던 그 일들을 여러분들이 먼저 살펴본다는 것이 어찌 그럴 듯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테네 시민 여러분,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야말로 앞으로 있을 일들에 관한 확실한 증거로써 이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도키데스는 수사학적 논증의 대표적인 방식인 개연성 논증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을 맺는 일은 민주정체에 위협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유익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법은 과거의 여러 사례를 예시하여 앞으로의 일에 확증을 심어주는 예증법(paradeigma)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실제적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협상 내용을 굴욕으로 받아들인 아테네 시민들과 의회는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을 거부하였고, 전쟁을 계속할 결의를 다졌기 때문이었다. 아테네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칼리스트라우스와 안도키데스와 다른 특사들은 반역의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안도키데스는 특사로서 아테네 이권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고, 그 대가로 추방을 당했는데, 390년의 일이었다. 이 때 추방당한 안도키데스는 다시는 아테네에 돌아오지 못함으로써, 연설가로서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 이후로 그의 행방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안도키데스는 직업적인 연설가나 연설문 대필가는 아니었다. 그의 연설문은 수사학적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연설가들의 연설문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연설을 잘하는 시민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연설문은 기교가 없기에 꾸밈없이 진실된 것으로 여겨져 독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안도키데스가 남긴 세 편의 연설문은 모두 법정이 아닌 의회에서 발표된 것으로, 의회 연설문으로서는 최고(最高)는 아니지만 최고(最古)의 텍스트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소크라테스, 소피스트를 넘어선 소피스트

최고의 법정 연설문 작성가인 뤼시아스와 쌍벽을 이루던 연설문 작성가인 이소크라테스는 에르키아 테모스 출신의 신흥 부호였던 테오도로스의 아들로 기원전 436년에 태어났다. 아올로스(피리)라는 악기를 제조하여 돈을 모았던 아버지의 부유함 덕에 이소크라테스는 어려서부터 아테네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소피스트였던 프로디코스, 고르기아스, 티시아스와 온건한 과두정주의자였던 타라메네스 밑에서 배웠다고 전해진다.



390년경,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소크라테스는 법정 연설문 대필 작업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수사학 학교를 열었다. 타고난 목소리가 약했고,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신 있게 연설할 수 있는 천부적인 배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 논쟁에 몸소 참여하길 삼갔으며, 자신의 작품을 작은 모임과 자기 학교에서 읽고 그것들을 글로 출간하는 데 만족했다. 그가 세운 수사학 학교의 교육이념과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그가 발간한 일련의 연설문 「소피스트 반박 연설」, 「헬레네 예찬」, 「뷔시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환(antidosis)」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그는 당시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그가 기존의 소피스트를 몰아 세웠던 「소피스트를 반박하며」의 연설문은 그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만일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 자신들이 완수하려는 것보다 더 큰 약속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일반 대중들로부터 나쁜 소리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사리분별 없이 무모하게 허풍을 떨고 있는 사람들이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뭐든 쉽게 하려는 사람들이 지금 진지하게 철학에 시간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좋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또 돈은 필요 없다고 합니다. 부란 그저 은 쪼가리나 금 쪼가리일 뿐이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거의 불멸의 신으로 만들어 주겠노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웃기는 것은 그들이 뭔가를 얻어내야만 할 사람들에 대해서, 소위 정의를 전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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