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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 407쪽 / 13,000원

러일전쟁 전야


한반도 쟁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러일전쟁의 전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점점 더 가중되는 외세의 지배 하에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은 있으나마나 한 자리였다. 외부대신은 외세와 황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파리 목숨 신세가 되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4년 동안 외부대신이 20번이 넘게 교체된 이유도 바로 그런 비참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외부대신이 굴욕의 자리였던 건 분명하다. 이미 1898년 7월 외부대신 유기환이 독일영사 크린(D. Krien)에게 불려가 모욕과 구타를 당한 해괴한 일이 일어났을 정도로, 외부대신의 지위는 땅에 떨어져있었다. 사실 바로 이런 사건들이 대한제국이 이미 망국(亡國)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세는 대한제국의 이런 상황을 파고들어 한껏 이용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용암포 개항 사건'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러시아는 1896년 두만강, 압록강의 삼림채벌권을 차지하고 1903년 본격 벌채에 나서면서 판을 크게 벌이기 시작했다. 1903년 5월 러시아가 100명의 군대를 보내 압록강변의 벌목 목재 집산지 용암포를 독점 점유하면서 압록강 유역에 대한 러·일·청 3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경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는 용암포에 자국민 40명을 거주하게 하고 포대를 설치한 다음 조선 정부에 러시아 삼림회사에 용암포를 조차해줄 것을 강요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이에 러시아의 팽창을 두려워한 일본·영국·미국은 용암포 점령의 불법을 내세워 개항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 정부는 다시 조차를 취소하고 개항을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러일 간의 대립이 날카로워졌고 이로 인해 이듬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 전야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자. 하와이 노동이민이 이루어지고 있던 그즈음 한반도는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외국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갔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그렇지만 지배층은 전혀 딴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1903년 7월 25일은 고종의 즉위 40주년에 고종의 50회 탄신일이었다. 이날 3000명의 중앙 공무원들은 덕수궁 뜰에 앉아 잔치를 벌였다. 정환덕의 회고록 『남가몽』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상을 겹겹이 차릴 필요가 없었으나 고기는 산처럼 쌓아놓고 포는 숲처럼 준비하였으며 술은 샘처럼 많아 잔치를 즐기니 보통 때의 수라상에 비하면 10배가 넘은 가짓수였다." 잔치판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인천 감리(監理) 하상기로부터 월미도가 일본인 손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담당관리가 뇌물을 먹고 몰래 섬을 팔아버리고 달아난 사건이었다. 박성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천은 수도 서울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월미도는 그 현관에 딸린 대문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인이 처음 보고 너무도 예뻐 장미섬이라 이름 붙인 월미도는 당시 한국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월미도를 차지하는 나라가 곧 한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열강은 앞 다투어 이 섬에다 거점을 만들고자 발광을 했다."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행사를 전후로 한 한국의 모습과 관련하여 웨베르(1885년~1897년까지 러시아공사로 재직,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통했던 사람)가 1903년 한국을 방문해 느낀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을 살펴보자. "대한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다시 와보니 거리의 남루한 복장은 이전보다 두 배나 많았다. 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제대로 몰랐다.(중략)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서도 정치, 경제적 예속화를 촉진시키는 데 모든 수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한제국의 조정과 국민 자산을 잠식하고 있었다."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러일의 대립이 심화된 것은 영일(英日)동맹과 노불선언(露佛宣言)이 발표되고부터였다. 1902년 1월 30일 일본은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에 대해 만주로부터 철병할 것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대신 일본은 중국에 대한 영국의 특수권익을 인정했다. 고종은 영일동맹에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청일전쟁 당시와 같은 내정간섭을 시도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1902년 3월 16일에는 영일동맹에 대항하는 노불선언이 발표되자, 러일의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노불선언은 영일동맹에 비해 형식적 선언에 지나지 않는 무력한 것이었지만, 한국의 입장에선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1903년에는 주일공사 고영희가 러시아와 일본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보고해오자 다급해진 고종은 그해 8월 일본과 프랑스·네덜란드·러시아 등에 특사를 파견해 중립화 가능성을 타진했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마침내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중립은 가능한 게 아니었다.



러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항(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그날 일본은 동시에 인천 제물포 해상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해 격침시켰다. 그리고 이틀 뒤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까지 만주에 200만 이상의 병력이 집결된 대전쟁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러시아가 전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강성학은 "당시 러시아의 지도자들도 일본이 훨씬 우월한 유럽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감히 선제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1895년 삼국간섭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해왔었기에 전쟁준비가 철저했다. 송우혜는 러일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여순(뤼순)·대련(다롄)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일제는 전쟁을 일으킨 지 2주 후(2월 23일)에 조선을 협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조선은 제도 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증한다.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는 경우 일본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은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조선은 이 조약과 상반되는 협정을 제3국과 체결하지 않는다" 등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양국의 친교 유지·동양평화의 확립·대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전 등을 내세웠지만, 핵심은 조선은 일본의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 시 일본군을 출동시킬 수 있고, 그에 따른 군용지 수용 등 편의를 제공할 것 등이었다. 시정 개선 권고권으로 일본은 합법적으로 한국 내정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 미국의 결탁

러일전쟁은 외교 전쟁이기도 했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하고, 독·프가 러시아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루스벨트는 독·프가 삼국간섭 당시처럼 일본에 개입한다면 미국은 당장 일본 편에 가담하겠다고까지 했다. 훗날 발굴된 비밀문서들은 미국과 영국의 일본 지원이 당시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2007년 4월 서울대출판부가 발간한 미국의 여성사학자 캐롤 쇼의 책 『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당시 일본의 전쟁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미국의 사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자국 식민지였던 필리핀(1899년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식민지) 시찰 명목으로 육군장관 윌리엄 테프트를 일본으로 보내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이자 임시로 외상도 겸하고 있던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게 했다. 이 밀약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 한국인으로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망언들이 오갔다. 2007년 한승동은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망언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정부를 방치해둘 경우 또 다시 타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말려들게 할 것이니,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1910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당시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됨)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가쓰라-테프트 밀약 논쟁을 살펴보자. 2005년 10월 열린우리당 의원 김원웅은 주미 대사관 국정감사에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불행이 시작됐다"면서 "국제법상 범죄행위인 이 밀약에 대해 미국에 항의하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한미관계의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눈감아 주고 적극 개입한 것 역시 잘못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모든 게 미국의 탓이라는 주장이다. 아무리 국내에서 반미(反美)가 '남는 장사'고 그래서 '미국 때리기'만 하면 박수 받는 세상이지만, 이런 주장을 마구잡이로 할 때 국제 사회가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루스벨트가 주도한 포츠머스조약이다.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협상 대표단은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해군기지인 포츠머스에 도착해 1년 넘게 끈 러일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회담(1905년 8월 8일~8월 29일)을 시작했다. 포츠머스 회담의 핵심은 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포츠머스조약은 전쟁 당시에는 일본을 지지했지만 전후 일본이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걸 경계한 루즈벨트의 노회한 외교술의 승리였다. 한국만 먹고 떨어지라는 식이었다. 포츠머스조약(9월 5일 조인)은 한국엔 재앙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송우혜는 한국의 고립무원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제국은 왜 그토록 참혹한 대우를 받았던가.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의 국제 사회가 한국 국민은 나약하고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기보다 전쟁 마당에 나와 있는 커다란 전리품으로 취급해버린 것이다. 포츠머스조약을 통해서 이처럼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정착 왜곡된 한국인의 이미지는 대한제국 멸망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우리 민족의 운명에 가혹한 족쇄로 작용했다."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왕현종은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20세기 세계사에 문명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반면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미미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학교 교과서를 보면, 러일전쟁의 원인을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 대립으로 보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것으로 결론짓는 데 그치고 있다. 그나마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러일전쟁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전혀 기술하지 않고 있다. 러일전쟁 전후의 일본 침략정책에 대한 이해를 충실하게 갖기 어려운 것이다. (중략)러일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기억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불러들인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기억은 우려할 만하다. 반면 러일 전쟁에 대한 우리의 깊이 있는 기억이 없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동아시아 공통의 역사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균열은 이렇게 두 나라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정재정은 "러일전쟁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국제 사회는 땅따먹기가 횡행했던 제국주의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중략) 그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제 정세의 격랑에 적절히 대응함은 물론이고, 이를 뒷받침할 정도의 민족역량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고 했다.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입국으로 체결되었다. 1905년 9월 5일에 조인한 포츠머스조약에 대한 비준안을 교환한 날인 10월 16일로부터 불과 23일 만에 이토 히로부미가 보호조약 체결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 대한제국에 입국했다. 이토는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일본군사령관 등과 함께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한국 대신들을 회유·협박하는 작업을 벌였다. 송우혜는 "대신들의 협력에는 상당한 보상이 약속되었고, 협력하지 않는 대신에게는 멸문의 협박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이토가 한국에 들어온 지 불과 여드레 만인 1905년 11월 18일 오전 1시경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보호조약 또는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토는 일본군을 출동시킨 가운데 8명의 대신 중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5적'의 찬성을 근거로 과반수가 넘었기에 양국의 합의로 조약이 성립되었다면서, 양국 대표로서 외부대신 박제순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가 서명한 조인서를 만들게 했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일본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한국의 외교관계 및 그 사무 일체를 감독 지휘하고, 외국 재류 한국인과 그 이익도 일본의 외교 대표자나 영사로 하여금 보호하게 한다. 둘째,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을 실행할 임무는 일본 정부가 맡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못하도록 한다. 셋째,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 서울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어 자유로이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갖게 하고,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방에 통감 지휘하의 이사관을 두게 한다. 넷째,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이 협약의 조항들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 다섯째,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등이었다. 다섯째 조항은 한국 대신들의 요구로 추가된 것이었으나,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외무성이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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