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사회 위대한 사회
강남호 지음 | 비즈프라임
잘사는 사회 위대한 사회
강남호 지음
비즈프라임 / 2008년 10월 / 313쪽 / 13,000원
1부 교육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사회를 만든다
교육은 문화 복제의 첫걸음이다"좋은 교육은 좋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특히 가정교육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문화 복제를 시작하는 재창조의 방안이다. 가정은 인간을 생물학적·문화적으로 복제하는 복제공장이며 새롭게 진화를 모색하는 재창조의 인큐베이터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결정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유대인들이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차지한 이유는 그들의 독특한 가정교육이 밑받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 어머니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은 우리나라 어머니들에 비한다면 하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는 40위~50위권을 넘나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사실은 우리의 교육이 기본적인 가치와 내용면에서 부실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밥상머리에는 놀라운 교육의 비밀이 숨어 있다. 유대인은 밥상 앞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의 노고에 대해 감사드리고, 아버지가 아이들을 축복한다. 그 밥상에는 예절이 있고, 가정교육이 있고, 예배가 있다. 일본의 가정교육의 핵심은 '다닌니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절대로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시험성적을 묻거나 몇 등인지를 묻거나 아니면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지 않는가. 또는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핀잔과 잔소리를 식탁에 진상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위대한 사회를 위한 위대한 인간교육의 장을 마련할 때이다. 특히 가정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의 가정교육은 개인이나 집안의 출세나 영화에 집착해 왔고 자기 자신의 안위나 행복에 연연해 왔다. 오로지 개인출세와 부귀영화를 지향하고, 가정과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한풀이 교육의 패러다임은 이제 폐기 처분해야 한다.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게 하며 주입교육의 노예가 되게 했던 교육구조와 교육환경을 전격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자유와 정의, 인내와 상호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위대한 사회에 대한 이념과 가치를 교육과정에 합체시켜야 한다.
교육은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도량이다한국의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오면, '얘야! 오늘 많이 배웠니?, 뭘 배웠니?, 선생님께서 잘 가르치시던?' 질문 공세를 편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엄마들은 아이에게 오늘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는지, 선생님의 질문에 어떤 답을 했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이 사실은 교육의 방향이 한국과 이스라엘에 큰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의 방향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하는 주입식 교육이라면, 이스라엘의 교육은 창의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하게 하는 교육인 것이다.
논어에 보면 "배우되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두워지고, 생각하되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워진다"(學而不思 則網, 思而不學 則殆)는 구절이 있다. 배우는 것이 중요하되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 배움은 완성될 수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아니하면 그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우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요, 생각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을 생각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창조의 장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입식 교육관에 길들어 왔다. 주입식 교육은 남의 것을 보고, 남의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며, 남의 결정과 행동을 모방하게 한다. 자기 자신의 독특한 기준이나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자아상실'이라 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교육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자신의 기준을 설정하는 능력을 배양시킨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지, 나의 행복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자신만의 개성과 존재의 의미 그리고 가치기준을 설정하는 관점과 능력을 배양시킨다. 주입식 교육에는 소망이 없지만, 생각하는 창의적 교육에는 무한한 소망이 있다.
정보화사회 이후의 미래사회는 상상력이 주도하는 꿈의 사회가 될 것이다. 산업사회를 자본이 지배한 사회, 정보화사회를 지식이 지배한 사회라고 한다면, 앞으로 펼쳐질 미래사회는 상상력이 지배하는 꿈의 사회가 될 것이다. 상상력은 규격화와 표준화를 거부하며, 암기나 모방, 획일화와 서열화를 거부하며, 풍부한 교양과 다양한 경험, 그리고 자유분방함에서 싹트고 자생할 뿐이다. 우리가 가야할 교육의 지평은 창의력을 고양시키는 '생각하는 교육', '상상력을 배양하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너희는 결코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죽어야 하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 가르침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교육의 탈바꿈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끊임없는 도약이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이란 기존의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극복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과 발전을 위해 도전하고 모험하는 실험정신의 결정체이다.
교육의 역할은 우리가 갖고 있는 패러다임을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윤리적 패러다임으로 검증하고 교정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주관성과 독단의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 플루다크 영웅전, 테세우스편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도적의 이야기는 주관성과 독단의 위험을 경고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걸려드는 여행객을 모두 잡아다가 자신의 쇠침대 위에 결박한 다음 그들의 신장이 침대보다 짧은 경우에는 몸을 늘려서 침대에 맞도록 하고, 반대로 신장이 침대보다 길 경우에는 침대에서 벗어나는 부분을 잘라내어 침대에 맞도록 한다. 프로크루스침대는 주관성의 함정과 독단의 위험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에는 주관성의 함정이나 독단의 위험뿐만 아니라 우리를 노예화함으로써 우리를 가두어버리는 수많은 속박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선입견, 편견, 욕망, 감정, 상식화된 지식을 오직 참교육을 통해 이 패러다임의 상자 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권위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어떤 논리, 활자화된 교과서나 책자에 인쇄된 내용, 언론매체에 공표된 내용들에 대해서는 논리적 비판이나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들어온 인식에 대해 세뇌되는 경향이 있다.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여도의 죄(餘桃의 罪)'라는 이야기는 감정이입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옛날 위나라의 위왕은 미자하라는 신하를 매우 총애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위왕의 감정이 변하게 되고 위왕의 마음속에 미자하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생겨나게 된다. 결국 왕은 누명을 씌워 미자하를 죽이고 만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인간은 생존욕구, 소유욕구, 그리고 존재욕구의 노예이다. 이제는 과감히 노예 문서를 찢어버리고, 자유의 영역으로 비상해야 한다.
교육은 참지도력을 만드는 담금질이다위대한 사회는 참된 리더그룹과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지기의 리더십과 통합의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이끌어 내는 지기의 리더십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들의 잠재능력을 오묘한 화음으로 엮어내는 융합과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구성원들에 대한 희생과 봉사, 그리고 실천으로 신뢰받는 섬김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그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지도계층에 대한 도덕적 의무에서 싹이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극동 연구가 헨리 노먼(Henry Norman)은 일본이 동양의 다른 국가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규칙이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장군이 나폴레옹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국의 이튼스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 전투에서 이튼스쿨을 졸업한 사람들이 90%이상 전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본의 리더그룹에는 사무라이 정신이 배어 있고, 영국의 리더그룹에는 귀족정신이 배어 있다. 조선왕조에서 성공한 지도자로서 평가받는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은 모두 지도자로서의 중요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상과 이념을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는 지도계층을 교육을 통해 양성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통해 지도자계층을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잘사는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지향형 리더그룹을 양성해 왔다.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이나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거나 역사의식에 투철한 리더그룹보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편법과 임기웅변, 그리고 온갖 권모술수에 능한 양아치형 리더십을 칭송하고 찬양해 왔다. 이제 더 이상 동네 뒷골목의 골목대장 같은 보스십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위대한 사회를 위해 위대한 리더그룹과 위대한 리더십을 배양해야 한다.
2부 문화는 인간의 생존방식이며 삶의 양식이다
명예를 존중하는 문화 명예란 자기의 도덕적 · 인격적 존엄에 대해 자각하고 타인의 그것에 대해서도 승인 · 존경 · 칭찬하는 것을 의미한다. 명예를 존중하는 문화가 없는 사회이거나 그 뿌리가 흔들리는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지탱해주는 질서문화가 정글의 법칙이거나 아니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흠모하는 명예집단과 지고의 선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명예문화가 부실하다. 명예의 전당이나 명예에 대한 존중이나 명예로움을 찬미하는 것보다는 명예훼손이나 명예회복 같은 허황된 명예직위에 집착하는 문화가 주류를 형성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위대한 업적을 남겨 미국인의 지속적인 존경을 받아온 사람들을 다양한 분야마다 명예의 전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리고 있다. 일본은 무사도 정신이라는 명예존중문화가 여전히 일본 리더그룹의 정신문화를 형성하는 하나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선비정신이라는 고품질 인간정신을 실천해 왔다. 이제 명예와 의리를 목숨처럼 존중하고 실천했던 원초적인 선비정신은 그 가치를 재평가하고, 순수한 명예존중의 정신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일제에 의해 짓밟힌 우리 역사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고, 우리 선조들의 품위를 고양시켰던 고귀한 명예정신, 충절과 의리로 융합된 선비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한국전쟁의 혼란과 군사독재권력의 횡포로부터 유린되고 왜곡되었던 불명예의 리더십을 정제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폭력정치가 어용으로 몰아간 사회 각계각층의 리더그룹에 대한 명예와 도덕성도 재건해야 한다. 우리의 존엄과 품위의 탑, 인간존중의 명예정신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위대한 명예문화를 창출하고 받들어야 한다.
칭찬하고 감사하는 문화한국 이민자들의 자립이 일본인들의 자립에 비해 30년이나 늦고 성공률도 15%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그 원인은 한국인의 집단생활에 '독 속의 게'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 속에 많은 게를 잡아 넣어두면 제각기 독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게가 기어오르는 게를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진다. 이런 현상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게도 독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된다. 즉 '독 속의 게' 현상이란 시기, 질투 모략하는 파행적인 문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왜 시기하고 질투하며 모략을 즐기는 것일까? 이것 또한 우리의 역사성과 문화적 성향이 낳은 우리 사회의 부산물이다. 한국의 역사는 한이 그 저변에 짙게 깔려있다. 수직적인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에서 지배계급의 착취와 핍박의 잔혹한 행위들이 자행됨으로써 피지배자 계급은 억눌림과 설움의 과부하로 인하여 한의 퇴적층을 겹겹이 쌓아갔다. 이와 같은 한의 문화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시기와 질투와 모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한의 문화가 아니라 은(恩)의 문화가 역사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 일본은 외침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었으며, 일본 내부적으로도 중앙정부 중심의 강력한 통치체제가 부재함으로써 지배 권력의 착취와 핍박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은 꼬봉은 오야봉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오야봉은 꼬봉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기사도 문화, 곧 은의 문화를 성립시켰다. 수직적 주종관계가 은혜를 서로 공유하는 화(和)의 문화로 귀착된 것이다.
이효계 숭실대 총장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원칙이 사라졌으며, 치유할 수 없는 깊은 권력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으며, 정신적인 비만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리현상은 선 아니면 악, 동지 아니면 적,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사고를 숙주로 삼고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선주의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다. 칭찬의 문화는 없고 비난의 문화만 있다." 이제 우리는 가난과 혼란을 통해 야기됐던 한의 문화를 극복하고, 풍요와 행복을 위한 은의 문화를 꽃피워야 한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모략에 찌든 악습의 문화를 구축하고 감사와 은혜, 그리고 칭찬으로 고양된 양질의 문화를 싹틔워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충만할 때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웃음으로 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로 속삭일 수 있다.
절제하고 멀리 보는 문화 지도자의 자질 중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은 보물 같이 소중한 능력이다. 멀리 내다보는 거시안적 관점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어제 한 말을 오늘 바꿔치기하고, 작년에 내세웠던 정책을 올해 폐기 처분하는 이랬다저랬다, 오락가락하는 누더기 정책풍조가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인내하고 기다리는 절제력이 통찰력의 바탕에 든든하게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조급성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결정된 정책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이며 정당한 과정이나 절차를 무시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과 그 결과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말초적이고 만성결과주의적이며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문화적 특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 이유를 분석하면,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는 민족적 특성 때문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민족적 속담이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은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성취한 문화적인 결과에만 집착하고, 그 과정에는 무관심했던 결과지향주의 때문이다. 또한 빈발(頻發)하는 외침의 역사가 만들어낸 위기의식이 즉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보자는 미시안적인 문화를 배태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민족의 밑바탕에 잠재하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종교성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인 속성은 주술적인 행위를 통해 엑스터시에 도달하고자 하는 굿판 문화를 낳게 했으며, 굿판 문화는 냉철한 이성을 통해 상황에 대처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사태를 처리하고자 하는 폐단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