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역사
황밍허 지음 | 시그마북스
법정의 역사
황밍허 지음
시그마북스 / 2008년 10월 / 558쪽 / 20,000원
제1장 법원
고대 중국의 법정봉건시대 중국의 사법제도는 사법권이 하나의 독립된 권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군주전제의 도구로 작용했었다. 즉 권력의 견제와 균형은, 제왕의 통치술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권력으로 권력을 통제'하는 서양의 분권제도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전문 법원이나 법관도 없었기에 지방의 관청이 행정기관이자 사법기관 역할을 했다. 현령이 재판을 주재하면 원고와 피고는 대당(大堂) 앞에 놓인 두 개의 돌 위에 꿇어앉아 재판을 받았다. 현령은 탁자 위의 붉은색 죽간과 초록색 죽간을 이용하여 죄의 경중을 가렸는데, 형벌은 속칭 곤장이라고 불리는 '태(笞)'와 '장(杖)'이 가장 많이 행해졌다. 당조 이전에는 곤장을 맞는 부위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아서 매를 잘못 맞아 즉사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자 당태종 이세민이 침혈도(針血圖)를 참조하여 혈이 비교적 적은 엉덩이에 곤장을 치도록 한 것이 관례로 굳어졌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모진 고문을 받다 보면 온갖 억울한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었다.
굴욕과 충돌, 저항, 그리고 동화 한 국가의 주권이 온전하다면 국가의 사법권은 마땅히 해당국에 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회심공해(會審公 )제도로 사법적 모순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열강은 통상 항구에 조계지 설치를 요구하고 자체적인 행정, 재정, 군대와 경찰 등의 권한을 행사했으며 독립적인 사법권까지 갖추었다. 게다가 조계지 내 중국인의 재판에 대해서는 외국 영사와 중국 관리의 공동재판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회심공해제도였다. 회심공해제도는 매우 중요하고도 복잡한 경험이었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들 제도를 단지 굴욕이라고 받아들일 경우 그 안에 들어있는 진정한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 제도의 이면에는 양국의 서로 다른 법률문화가 충돌함으로써 빚어진 모순과 저항 그리고 융화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회심공해는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우선 이제까지와 달리 지방관 한 명의 판결로 재판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재판관이 동등한 판결 권한을 가졌다. 또한 소송 당사자는 무릎을 꿇고 심문에 답한 필요가 없었으며 변호사가 대신하여 소송을 도왔다. 그리고 태형과 고문 기구를 이용해 자백을 받아내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따라서 회심공해에 참관한 많은 중국인들은 서양의 법치를 숭앙하게 되었고,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회심공해제도는 많은 문화적 충돌을 야기했다. 광서제 31년(1905)년에는 한 관리의 아내가 하녀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조계지의 경찰들이 노예매매로 오인하여 구속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양국 군대의 충돌이 야기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중국은 사법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마침내 1926년 상하이의 사법권을 되찾은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회심공해라는 사법적 기형아를 몰아내게 되었다.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다 모든 문명이 우매함에서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법치사회 역시 중세의 종교재판소라는 암흑 터널을 거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정신세계를 옭아매는 사법적 족쇄로 작용했다. 즉 정교하게 제정된 법률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법률의 진정한 목적은 공평과 정의, 그리고 인간적인 배려라는 의미 있는 교훈을 후세에게 던져주었다. 그 교훈은 권력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사고방식인 삼권분립도 탄생시켰고 이러한 발전은 미국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국 초기 연방법원의 사법권은 입법권을 지닌 의회와 행정권을 장악한 대통령에 비해 그 힘이 미약했다. 그러다가 1800년대 초반 연방법원이 위헌심사권을 갖게 되면서 미국의 사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는 강력한 장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미국의 법률제도 중에서 '특별검사법'이라는 특수한 존재는 '권력으로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장치라 할 것이다.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사건을 수사한 콕스(Archbald Cox) 검사는 닉슨 대통령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녹음테이프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닉슨은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콕스의 파면을 명령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그 명령을 거절했다. 그러자 닉슨은 법무부 차관에게 콕스의 파면을 명령했는데 차관에게서도 역시 거부의사를 들어야 했다. 화가 단단히 난 닉슨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과 차관, 콕스 검사의 직위를 해제해 버렸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결국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현행 검찰조직으로부터 독립되어 대통령까지 수사할 수 있는 특별검사법'이라는, 특수한 장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특별검사의 위력에 혼쭐난 대통령은 빌 클린턴일 것이다. 클린턴은 르윈스키와의 '지퍼게이트' 사건으로 법정에 서야했고 수사 보고서가 인터넷에 공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법 앞에서 만민이 평등해야 함은 한낱 구호가 아닌, 제도의 형식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의 '금고아(삼장법사가 손오공의 머리에 씌운 띠)'로 불리는 특별검사제도는 권력을 견제하는 훌륭한 제도라고 할 것이다.
제2장 재판관
국왕과 법관인류 최초의 재판은 신의 뜻을 빌어 분쟁을 해결하는 신탁재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탁재판이 가지는 불공정성을 점점 깨닫게 되면서 인간이 판결을 내리는 재판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전문성의 결여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나자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재판관 제도가 수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발단은 1608년에 있었던 제임스 1세와 커크 대법관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제임스 1세는 평소 총명하기로 널리 알려진 군주였다. 그는 어느 날 산책 중에 왕실법원 앞을 지나게 되자 갑자기 재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자신의 총명함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커크 대법관에게 법관이 쓰는 가발과 법복을 한번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커크 대법관은 국왕의 요청을 거절했다. 제임스 1세는 당황함과 불쾌함으로 얼굴이 빨개졌으나 곧 평정을 회복한 채 자신의 재판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커크 대법관은 예의를 갖추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법률은 자연적 이성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법관이 심리해야 하는 사안들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 자유와 직결되기 때문에 체계적인 사법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재판권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제임스 1세와 커크 대법관 사이의 대화 또는 논쟁이 어떻게 결론 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제임스 1세가 법관이 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권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제약이다. 전제왕권사상 아래에서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국가 권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한 일부를 양보하여 공공관리 기능을 갖도록 만든 정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국가는 계약에 의하여 성립되며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따라서 국왕과 왕실의 행위 역시 법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왕권신수설을 뒤엎는 과정에서 야기된 충돌은 수십 년 후 내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격변 속에서 영국의 법원은 근대 법정으로 가는 진전을 이루었으며 커크 대법관의 말은 법관 전문화에 있어 최초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문적인 법률 훈련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출신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법관이 될 수 없었다.
베일에 가린 재판 : 형조비장, 중국 법정의 보이지 않는 법관
중국의 관리들은 오랜 기간 동안 수하에 비장(裨將)이라는 관리를 두었다. 비장은 공문서 작성이나 세무 담당 등 각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관리들로, 오늘날로 치면 두뇌집단이나 컨설턴트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법률 지식을 갖추었던 형조비장은 지방관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청조 200년 동안 '대청률' 조문은 이미 1,800조에 달했으며, 형사(刑事)와 해부(解剖)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까지 필요했으니 경전만 달달 외어오던 일반 관리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조정은 지방관의 치적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으로 사법쟁송을 삼았다. 따라서 법률지식을 갖춘 형조비장이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방관이 재판을 주재하면 형조비장은 병풍 뒤에서 쪽지를 건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알려주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지방관이 지레 앞서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러면 홀연 막 뒤에서 '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났다. 이때 지방관은 비장의 의견이 다름을 알고 부랴부랴 잠시 휴정할 것을 명하게 되는데 본당 아래 꿇어앉아 있는 죄인이 상급 지방관의 수양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비장은 사회적 산물이기보다는 경제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봉건 사회에서 글을 읽는 모든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에 오른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1차 시험에 합격한 100명의 수재 중에 겨우 세 명만 합격할 정도였다. 집안이 넉넉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삶을 연명하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은 어느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춰 비장이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관청문화에는 각종 구호와 이론으로 드러나는 명시적 규칙 외에, 관청의 생리를 조절하고 이끄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다. 비장은 지방관이 부임한 지역의 현실생활과 마찰을 일으킬 때 이러한 암묵적 묵계를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비장은 조정으로부터 봉록이 없고 지방관으로부터 적은 보수를 받았기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암묵적 규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지방관은 그러한 행위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제3장 소송 당사자
피고 바구미중세 법정에서는 동물도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특히 살인죄로 기소된 동물은 통상적으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공중 앞에서 재판을 받고 징벌을 받아야 했다. 동물에 대해 진지하게 심문을 벌이고, 그 동물의 변호권까지 존중한다는 것은 무슨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지만 여기에서 중세 유럽인들의 법적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1531년 프랑스의 바톨로메 차시니라는 변호사는 학술 논문을 통해 '동물 역시 선악을 구별할 수 있으며, 말이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어느 정도의 지혜와 변별력을 가지고 있으니 동물도 잘못을 범하면 마땅히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중세의 보편적인 관념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돼지 수십 마리가 처형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동물뿐만 아니라 쥐와 좀, 바구미 같은 작은 동물들도 종종 피소되었다는 것이다.
1587년 여름, 프랑스의 유명한 포도주 산지인 세인트 줄리앙스 지역에서 바구미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죄명은 재물손괴에 관한 것이었다. 농부들이 1년간 힘겹게 가꾼 포도나무를 바구미들이 모두 갉아먹어버린 것이다. 농민 측 대리인은 교회가 바구미를 축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바구미 측 변호사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에게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니 바구미의 행위는 하나님이 내리신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재판상의 공방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바구미들에 의한 피해는 계속되었다. 이에 원고와 피고 쌍방이 한 발씩 물러나도록 조정이 제안되었다. 즉 농민들이 한 구역을 지정하여 바구미들이 마음껏 포도나무를 갉아먹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바구미) 측 변호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바구미에게 제공한 구역의 토질이 좋지 않아 바구미 일가가 생존하는 데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결국 재판은 쉽게 판결을 내지 못하고 8개월 동안이나 진행되었는데, 재판의 판결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판결문의 마지막 장을 벌레들이 갉아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제4장 법정문화
중국과 서양 법정문화의 비교민본주의를 표방한 서양 법정과 달리 중국의 고대 법정은 '관본주의(官本主義)'로서 권위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법 관념의 차이는 서로 다른 법의 상징물을 선택한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양법정 앞에는 고대 그리스의 법의 여신의 조각상이 있다. 여신의 눈은 검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는데, 이것은 육안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신의 왼손과 오른손에 각기 쥐어진 '천칭과 검'은 공평과 징벌이야말로 법을 수호하는 수단임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중국의 법정 앞에는 '해치'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동물의 조각상이 있다. 머리에 긴 뿔을 가진 이 신물은 속칭 '일각수'라고 하는데,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 잘못이 있는 자는 즉시 뿔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서양의 법률 가치관은 법은 법이며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법은 사람의 감정을 초월하는 기술적 운용이다. 서양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절차는 결과보다 더욱 중요하다. 만약 절차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재판의 결과가 정의를 향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가치 없는 정의인 것이다. 서양의 법언은 이를 '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라고 비유한다. 즉 독을 품은 과실수의 열매는 제 아무리 탐스럽고 맛이 있다하더라도 역시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법률의 기능은 한계가 있다. 즉 완전무결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며 최대한 정의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중국인은 법정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절차 역시 뛰어넘거나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의 전통 희곡에서는 자신의 원한은 자신이 푸는 자력구제 방식이 자주 소재가 된다. 원수를 갚는 보복 방식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이러한 내용의 희곡을 보면서 감동을 받곤 했는데 훗날 현대 법치이념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이러한 가치관이 일종의 문화적인 아편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치오쥐의 소송
중국의 많은 법학자들은 법리나 자신의 관점을 설명할 때 치오쥐(秋菊)라는 영화 속의 여인 이야기를 즐겨 인용한다. 소설 『만가소송(萬家訴訟』을 영화화한 '귀주 이야기'는 1992년 작품으로 시대적 배경은 제2차 5개년 법률계몽 시기이다. 당시 법률계몽의 중점은 '행정소송법'이었다. 속칭 '국민이 정부를 고소하는 법'으로 불리는 행정소송법은 당시 반포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일반서민들에게는 아직 생경한 법률이었다. 따라서 '귀주 이야기'는 새로운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문화적 도구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귀주 이야기'의 주인공 치오쥐는 남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시골길을 걸으며 '죽어도 할 말은 해야 쓰겄슈'라는 말을 내뱉는다. 치오쥐의 남편 왕칭이 촌장과 말다툼을 벌이는 와중에서 사타구니를 걷어차였는데 이 일에 대해 사과를 받고 의료비를 배상받기 위해 소송을 벌여 나간 것이다. 그런데 촌장은 사람들과 대립하는 인물이 아니며, 대다수의 촌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촌장의 성품이 아니더라도 촌민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런 다툼은 덕망 있는 마을 어른들의 조정 아래 충분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