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한국사
박선식 지음 | 베이직북스
위풍당당 한국사
박선식 지음
베이직북스 / 2008년 9월 / 400쪽 / 15,000원
Chapter 01 상고시기 전설적 전쟁이야기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 한반도와 일본은 거의 붙어 있었으며, 중국의 동쪽 해안과 한반도 사이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무렵 동북아시아 인류 사회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전설적 설화가 치우와 황제 헌원의 격돌 이야기로 시작된다. 치우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영역을 확보하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탁록벌까지 갔을 테고, 그곳에서 황제 헌원의 세력과 대대적인 무력충돌을 벌였을 터이다. 이후 한민족 역사의 또 다른 신화로 거론되는 단군왕검의 이야기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꽃피워졌던 것이리라. 결국 우리 한국사의 시원이라고 불리는 고조선 역사의 이미지는 모든 이가 행복하기 위한 길과 세상을 찾아 나서는 모험과 고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군의 전쟁이야기고조선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이후의 글에서는 고조선 시기를 단군제정치체의 시기로 통칭하고자 하는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바탕으로 서기전 8~7세기경 단군제정치체 시기의 대외 출병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런데 서기전 723년경, 서기전 667년경 왜지 공략 작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고 그 바탕은 어디에 있었을까? 짐작컨대 부루 임검대부터 대략 두밀 임검대까지 우리의 선인들은 서북방 및 서남방족들과의 무력대결에서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그 축적된 군사적 기술력을 해양부문으로 돌린 게 아닌가 싶다.
한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서기전 10세기경부터 약 500~600년 동안을 이른바 '대단군조선의 전성시대'로 이해하였고, 그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고자 서기전 5~6세기경의 인물인 불리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불리지는 『태백일사』의 〈가섭원 부여기〉와 〈고구려국본기〉에도 나타나는 인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조선상고사』의 불리지는 여러 가지로 대단한 활약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조선의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직예와 산서, 산둥 등지를 정복하여 대현 부근에 한 나라를 세워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불리지국'이라 일컬었다 한다. 물론 직예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그리고 신채호는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검은 원숭이, 담비, 여우, 삵 등의 털가죽 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상업을 크게 번성시켰다고 아울러 밝히고 있다.
우리는 신채호가 자신의 저서인 『조선상고사』를 통해 밝힌 불리지의 활약시대가 위서 논쟁에 휩싸여 있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등에서 보이는 왕성한 대외출병 시기와 맞물리는 시기임을 되짚어 보아야 하는데, 거론된 저작물들의 내용을 고스란히 나열한다면, 단군제정치체는 서기전 8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도록 해상작전을 펼쳤으며, 서기전 6세기경에는 북방의 지역인 빈기지간 등으로 출병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서기전 8세기경에서 7세기경에 이르기까지 해상작전을 벌인 정치체제와 서기전 6세기경에 빈기지간으로 출병한 정치체제가 똑같은지 여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일단 뭉뚱그려 단군제정치체의 범주 안에 드는 세력들로 보고자 한다. 한편 북애자의 『규원사화』, 계연수의 『환단고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통해 짐작되는 상고시기의 대외출병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과 함께 새로운 점들을 일깨워준다. 물론 이러한 역사서가 정녕 위서인지, 어떤 부분이 첨삭되었는지를 살피는 작업도 가열차게 진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Chapter 02 눈부신 고구려 그리고 열전의 삼국시대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위만조선의 몰락 이후 한군현에 대항하면서 성장하였고, 마침내 4세기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요서지역에 두 개의 군현을 설치했다거나, 5세기에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활동을 펼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그리고 신라가 왜의 땅 명석포 방면으로 정벌전을 펼쳤다고 전승되는 설화 따위는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새로운 문명의 주도자로 우뚝 서겠다고 작정한 당시 선조들의 소망이 담긴 사건들로 이해된다. 또한 발해의 무왕대에 이루어진 등주 땅 공격과 마도산에서의 당군 공격 따위는 그 뿌리가 고구려의 문화적 역량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북아의 강자로 거듭나려던 고구려 후예들의 웅혼한 민족정신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뒤흔든 고구려13세의 고구려 왕자 담덕, 태자의 자리에 오르다 / 고구려 청년 영웅 담덕, 거란을 정벌하다담덕이 태자에 오르기 전, 385년의 6월에 고국양왕은 군사 4만 명을 움직여 요동을 들이치는 작전을 폈다. 당시 고구려군은 요동과 현토를 각각 공략하여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오는 등 대단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연나라의 모용농에게 요동과 현토를 다시 빼앗기는 등 혼전 양상을 거듭했다. 그런데 고국양왕의 치세에 태자 담덕이 군사 활동을 주도했다는 신채호의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가 벌인 "석현 등 성의 회복" 전투와 "나려족의 격퇴" 전쟁은 바로 고국양왕 말년, 태자 담덕 때의 일이라 했다.
한편 태자 담덕은 백제의 석현 등지를 친 후 같은 해 9월, 북으로 거란을 정벌했다. 당시 고구려군은 거란의 남녀 5백 명을 사로잡았고, 고구려국 사람으로서 사로잡혀 갔던 백성 1만 명을 설득하여 귀국케 했는데, 고구려가 펼친 거란 정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농경적 요지인 거란 지역을 고구려의 지배 아래 두었고, 거란인 5백 명을 비롯해 앞서 붙잡혀 갔던 1만의 동족까지 되찾아 국가 건설의 노동력으로 재편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그와 같은 대외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것은 태자 담덕이 일찍부터 갖춘 군사운용 능력의 소산이라 평가할 만하다.
광개토대왕, 남방대작전을 펼치다 / 고구려, 숙신을 정벌하다고구려는 서북방 정벌에 이어 대규모의 남방작전을 병행했다. 그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릉비가 뚜렷하게 사실을 전하는 바다. 그리고 고구려는 남방 대작전을 펼치는 와중에도 북방정벌을 병행하는 등 광범위한 군사작전을 펼쳐나갔다. 그 가운데 한 사례가 바로 398년에 이루어진 식신(숙신을 일컬음) 공격전이다. 능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군대 일부를 보내 숙신의 토곡을 시찰하고, 막 라성, 가태라곡에서 남녀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 결과 "이때부터 다시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여 (태왕을) 섬기겠다고 했다"는 능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광범위하게 벌인 대외 정벌의 결과로 조공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고구려, 연군과 후연을 정벌하다 / 고구려가 다시 동부여를 정벌하다고구려는 404년에 왜구를 격멸하고, 407년에 다시 후연을 정벌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형구씨는 《월간 중앙 WIN지》에 게재한 광개토대왕비문의 설문을 통해, 고구려가 벌인 407년의 정미년 전쟁의 대상국을 후연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능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410년에 다시 동부여를 정벌하기에 이른다.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능비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일찌감치 동부여를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고구려의 영도권으로 이끌려고 노력했음을 읽을 수 있다.
발해의 당과 북방족을 향한 전쟁
나ㆍ당 전쟁의 끝자락에서 발해가 일어서다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당의 제국적 야욕이 본색을 드러내자, 신라 조정은 이를 갈며 당군을 내몰기로 작정했다. 그런 가운데 670년(문무왕 10년) 3월 신라군과 고구려의 유민군이 연합한 10,000명의 전투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그 이북에 자리한 개돈양 지역에 진입하여 당군을 강타했는데, 이는 당의 조정에 보낸 신라의 경고성 군사작전인 셈이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지역의 패자를 꿈꾸던 당으로서는 결코 한반도를 지배할 호기를 놓치려 하지 않아, 신라와 당은 한반도 각처에서 드센 다툼을 벌였는데, 나ㆍ당 사이의 전쟁의 결과는 대체로 신라의 연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옛 고구려 땅은 여전히 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고구려의 부흥운동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당의 강점에 반발했다. 676년 무렵에 당이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현재의 요녕성 요양) 지역으로 철수한 사실이 그와 같은 점을 뒷받침한다. 한편 그 무렵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들고 일어나는 국면이 거듭되자, 당은 고구려 지배는 말할 것도 없고 북방지역 관리조차 힘겨운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당은 696년에 영주 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영주도독부를 완전히 폐지하고 멀찌감치 물러서더니, 이내 거란인들의 반당적 움직임에도 당황하는 형편이 됐고, 급기야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해 한반도에서 완전히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상황이 거듭되던 무렵, 옛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재건을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보충 설명하면 대조영은 말갈족의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유민과 자신의 고구려 유민부대를 연합하여 당나라에 분명한 입장으로 반기를 들었고, 이에 맞서 당은 이해고를 중심으로 하는 진압부대를 파견하여 양측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걸사비우가 무참히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대조영은 말갈 유민세력까지 더불어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은 당군을 천문령까지 유인하여 그들의 동선을 길게 늘어뜨렸고, 뒤이어 당의 주력부대를 맞아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어 당 주력부대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당시의 전투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당군의 지휘자인 이해고는 간신히 줄행랑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조영은 마침내 698년 무렵에 동모사자락을 근거지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대진국(발해의 국명)이다.
발해의 대당 군사작전 / 발해의 대당 군사작전, 등주와 마도산으로 공격을 감행하다
발해는 대조영 이후 무왕대에 접어들어 이중적인 당의 대외정책노선의 속내를 읽고, 좀더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며 강경한 대외적 군사노선으로 맞대응키로 했다. 그리하여 무왕의 아우인 대문예를 전선의 책임자로 세우고 흑수말갈을 타격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문예가 무왕의 대당 강경노선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자, 무왕은 대문예를 소환하고 예정대로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다. 그러자 대문예는 당에 투항하여 발해의 대외노선을 폭로했고, 당은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주변정세가 미묘하게 돌아가자, 발해 무왕은 깊은 고민 끝에 아예 당을 먼저 치고자 작정했고, 장문휴를 중심으로 발해 수군선단을 급히 당의 등주로 향하게 했는데, 등주는 당의 물산이 집중되는 곳일 뿐 아니라, 당의 군사적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732년 9월, 싸늘한 가을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발해의 수군선단이 당의 등주에 상륙했고, 창검을 번득이며 당의 군사거점을 들이쳤다. 당시 발해의 군사작전은 격렬하고도 신속하게 추진돼 당의 등주 지역 군사책임자인 등주자사 위준이 이끄는 당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발해 수군은 소기의 전투 목적을 달성하자 발 빠르게 철수하여 갈복순을 중심으로 하는 진압부대를 급히 보낸 당 조정을 헛걸음치게 했다.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의 〈오승자전〉에 따르면, 발해군이 당나라를 침공하여 성읍을 도륙하고, 많은 유민과 실업 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냈다고 전한다. 따라서 당나라 조정은 발해군이 물러난 후 등주 지역을 회복코자 힘겨운 복구조치를 펼쳐야 했고, 복구비용을 대기 위해 따로 예정된 자금 지출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한편 장문휴 선단의 수군기동작전과는 별도로, 발해 무왕의 친정 작전이 펼쳐졌다는 견해 역시 주목되는 점이다. 『신당서』의 〈오승자전〉에 따르면 "발해의 대무예(무왕)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하는데, 당 조정이 방어에 급급할 때,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을 기습한 작전은 당나라에 위협적인 위기의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오승자전〉에 따르면, 오승자는 발해군에 맞서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한다. 도대체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당의 오승자 부대가 400리에 걸쳐 석축 참호를 만들었던 것일까? 당시 발해군은 전통적인 고구려의 기마전술을 바탕으로 기동적 야전능력이 월등했으리라 여겨진다.
Chapter 03 고려의 대외출병과 자주적 노선발해를 무너뜨리고 북방의 강자로 떠오른 거란이 마침내 남침하면서, 고려인들은 실용적 군사기술의 유용성에 더욱 집착했고, 장성의 축조를 비롯하여, 수질구궁노나 팔우노와 같은 강력한 쇠뇌무기를 개량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김단과 문정에 의한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북벌이 가능했을 테고, 마침내 윤관과 오연총에 의한 역진 정벌은 물론, 고려말기에 요동을 공격하는 4만 9천여 원정군을 편성할 수 있었으리라. 비록 요동 정벌이 이성계의 회군으로 미완에 그쳤으나, 그간 축적된 강한 군사력 개선의 효과는 마침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치는 정벌로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고려의 북방족 압박과 그 전개과정
고려 북진정책의 걸림돌이 된 거란고려는 건국 후 대체로 태조대의 호족 연합의 결과로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혜종대부터 왕권 계승에 따른 경쟁이 발생하여 초기의 안정구도는 쉽게 깨졌다.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의 대립은 혜종의 즉위 직후에 가속화되었고, 뒤이어 정종이 서경파의 후원을 받고 개경파를 짓누르며 즉위했는데, 정종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강력한 고구려 고토수복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그 때 북방에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몹시 강성한 위상으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당시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칸이 된 이후,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거란은 그를 정점으로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전개하고 있었다. 거란이 그처럼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세울 수 있던 데는 유목과 농경적 생활방식이 조화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경제 안정과 더불어 고도의 군사력을 이룬 거란의 존재는 중원의 후당에 이은 후량, 그리고 다시 그 뒤를 이은 후주 세력에게조차 위협적이었다.
한편 고려는 거란을 의식하여 후주와의 외교관계를 원만히 하고자 노력했고, 한편으로 자체 방어요새들을 정비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후 고려는 경종의 짧은 치세가 있은 뒤, 다시 성종의 치세를 맞이하여 좀더 내실 있는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했다. 또한 거란의 무력침공을 의식해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주력했는데, 당시의 송은 고려와 함께 반거란 동맹을 꾀하기에 이르렀고, 하지만 고려는 송의 군사협력 제의를 받고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러던 993년의 윤10월, 마침내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는데, 거란의 침공 이유가 황당하다. 거란의 주장은 고려가 고구려의 옛 영토 일부를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진짜 이유는 고려가 송과 정치군사적인 연계를 사전에 차단하고, 먼저 고려를 자신들의 영향권에 두려고 한 데 있었다. 거란군은 고려의 접경 부근부터 강공을 퍼부었고, 고려의 방어부대들은 투혼으로 맞받아쳤다. 변경에서부터 혼전 양상을 보이자, 고려 조정은 중신회의를 열어 서희를 주축으로 구성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