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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3 :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3: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 410쪽 / 13,000원

갈 곳을 모르고 헤매는 조선의 운명




단발령으로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상황에서 아관파천이 단행된다. 서울 주

재 러시아공사관은 친러파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1896년 2월 11일 아침 7시 30분, 고종을 여인복장으로 변장시키고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겼다.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끌고와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지만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온 이후 모든 국사를 러시아제국의 국기가 게양된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비해군 160명의 호위 아래 행했다. 러시아공사 웨베르(Karl. l. Waeber)는 조선의 국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들어서자마자 이른바 '을미사적(乙未四敵)'으로 불리는 김홍집·유길준·정병하·조희연 등과 장박을 포함시킨 다섯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해 '잡아 죽이라'고 지시했다. 물론 친러파의 명령이었다. 김홍집, 정병하는 피살되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 인해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박정양 내각이 새로 들어섰다.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칙을 연이어 발표했다. 단발을 개인 의사에 맡긴다는 조칙이 내려졌다. 강요된 단발이 낳은 효과는 무시 못 할 것이었다. 개화파의 뒤를 이어 단발의 편리함과 자유로움을 알게 된 일부 조선인들 가운데는 자진해서 머리를 깎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단발은 신분제도의 약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단발령은 부정되기보다는 흐름을 이어가는 쪽이었다.



송우혜는 아관파천에 대해 "당시 고종으로서는 일본에 머리 숙여 아부하고 철저하게 굴종하면 무사히 옥좌를 지키면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사 안일한 굴종 대신 위험천만한 저항을 택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호위병도 딸리지 않은 궁녀의 가마에 몸을 싣고 궁궐을 탈출한 것이다.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는 파국을 각오해야만 감행할 수 있는 비상작전이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 본질을 보면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의 군주가 자국이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정국 운용의 주도권을 쥐고 '오랑캐(러시아)로서 오랑캐(일본)를 제압하는(以夷制夷)' 전술을 선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으로 러시아공사관을 습격하여 모두 도륙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즉각 러시아와 일본의 전면전이 발생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일본으로서는 일절 손을 댈 수 없었다는 점을 냉철하게 계산한 전술이었다."

아관파천은 일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를 갈았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전국민에게 러시아를 가상적으로 삼아 10개년 계획의 군비확장에 착수함을 알렸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조선이라는 먹이를 놓고 일어난 것일 뿐, 두 나라는 목적을 위해선 언제든 타협할 수 있는 관계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된 1896년 6월, 러시아에선(러시아와 일본은 겉으론 으르렁대고 싸우는 것과는 달리) 한반도를 놓고 비밀협상을 벌이게 된다. 송우혜는 이 비밀협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양국이 조선을 38도선에서 분할 점령하자'는 제의가 이때 처음 나왔다. 이로부터 50년 후 실제로 한반도는 그렇게 분할되고 말았다. 얼마나 무서운 역사의 교훈인가.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은 1896년 5월 24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간 날로부터 불과 100여 일 뒤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민영환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축하사절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러일 비밀협상에는 깜깜이었다. 국제 외교의 비정함을 서릿발처럼 보여준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등장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의 창간 배경은 이렇다. 서재필은 공적으로 아관파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박정양 내각은 <독립신문>에 협조적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최준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양 내각도 전 내각에 못지않게 신문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로는 국모 명성왕후의 시해사건과 같은 일대참변을 당했어도 이를 즉각 온 국민에게 알릴 수가 없었고 또 하나의 여론을 일으킬 수 없었음은 몸소 체험한 데서 기인된다. 둘째, 미국 시민권을 가진 서재필에게 약속한 것(<독립신문> 창간을 위한 국고금지출 승인서가 작성된 것은 친일파 김홍집 내각 때였다)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것은 보수파들도 미국과의 우호친선관계를 두텁게 하려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서재필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국문 3면과 이를 축약한 영문 1면()의 <독립신문>을 창간(1896년 4월 7일)하였다.(폐간은 1899년 12월 4일)

전인권은 <독립신문>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이 신문이 존재했던 기간의 특별함'에 주목했다. 그는 "독립신문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증대하고 일본의 영향력은 제한을 받는 등, 한반도에서 국제 열강의 힘이 새로운 균형을 이루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조선 사회 전체가 회생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다하던 시기였으며, 그 같은 노력은 '만민공동회'라는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현으로 귀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지금도 작동되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의미의 근대적인 정치 지형이 짜인 시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독립신문>의 순한글 제작과 띄어쓰기는 매우 혁명적이었다. 정용화는 한글 전용에 대해 "<독립신문>에 이르러서 한국은 비로소 근대 국민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신문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한글을 보급함으로써 대중적으로 공동의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공동체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독립신문>은 '사실'과 '뉴스'를 앞세운 신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전의 신문들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일 뿐,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엔 철저한 계몽신문이었다. 초당파적이며 공정하고 올바르게 보도하는 것을 사시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논설을 제1면에 게재하면서 강력한 주장을 하는 등 시종일관 '의견 신문'을 지향하였다. 민족의 독립정신과 인권신장을 강조하였으며 외국 열강의 부당한 침투에 대해 공격적인 논조를 펼쳤다. 청·러시아를 배격하였고 미국과의 유대는 강조하였다. 일본에 대해선 '이중적이며 복합적'인 자세를 취했다. 상하귀천을 배격하였고 정부 관리의 비리나 정부 시책의 잘못은 물론 계몽적인 관점에서 일반 대중의 그릇된 것도 비판하였다. 대중교육의 중요성과 여성교육의 필요성도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의 선진성은 미국에서 성장한 서재필로 인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의 형편을 잘 모르고 수준을 뛰어넘는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는 서재필의 말은 그 선의를 이해한다 해도 좀 지나친 감이 있다. <독립신문>이 시대를 앞서간 개혁·진보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주문을 한 점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서구를 이상향으로 미화하며 토착적 전통을 냉소·혐오·멸시하는 주변부 개혁지향적 엘리트의 세계인식을 '자기 오리엔탈리즘' 또는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하는데 <독립신문>의 일부 주장에 대해선 그런 혐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언론이 서구적 틀과 사상의 기준으로 한국 사회를 보면서 계몽을 시도하는 건 과연 오늘날엔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도 같이 다루는 게 공정할 것이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3개월 후 서재필의 주도하에 창립되었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자강혁신·자유민권의 세 가지 목표를 내걸고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독립 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독립'이라니, 당시 조선은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말인가? 그러나 '독립'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1896년 당시 일반 민중의 삶의 영역에도 일본인·청인들의 횡포가 매우 심했으며, 이들에겐 조선의 공권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대한제국 시대의 개막



고종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 환궁 요구에 따라 아관파천 약 1년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간 것은 러시아를 비롯하여 미국·영국 등 경운궁을 에워싼 외국 공사관의 보호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조야(朝野)는 칭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을 상소했다. 고종은 여덟 번을 물리친 뒤 아홉 번째 상소를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사진: 황제 복장을 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국호도 이날부터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뀌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을 아우르는 '큰 한'이라는 뜻에서 '대한'이요,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뜻에서 '광무'였다. 고종은 황제에 오른 다음 달인 11월 22일, 2년 2개월간 미뤄왔던 명성왕후(민비)의 국장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으로 지난 세월의 아픔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새로 탄생된 대한제국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뒤를 이은 또 한 차례의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 황실 중심의 근대화정책 추진이었다. 이를 광무개혁이라 부르는데, 광무개혁의 이념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을 근본으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이었다. 당시 갑오개혁으로 인해 폐지된 옛 제도와 새로운 제도의 갈등과 부조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성하면서 구본, 즉 옛 체제를 기본으로 새로운 제도를 참작해 나간다는 의미였다. 광무개혁은 <독립신문>까지 껴안는 개혁은 아니었다. 조병식이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1897년 11월부터 <독립신문>의 탄압은 더욱 격화되었다.



광무개혁과 독립협회의 역할은 어느 쪽에 더 의미와 무게를 두느냐를 놓고 훗날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은 오랫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으나, 1968~ 1973년에 김용섭은 토지문제, 김영호는 기술도입, 강만길은 상공업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들은 대체로 독립협회의 사상과 활동이 광무개혁의 뒷받침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1976년 신용하는 독립협회의 활동과 대한제국 정부가 완전히 이해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면서 광무개혁의 역사성을 부정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벌어진 강만길-신용하 논쟁에서도 강만길은 광무개혁의 의의는 평가한 반면, 신용하는 광무개혁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필자는 대한제국 멸망의 가장 중요한 '내부' 요인 중 하나가 대한제국성립 후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그리고 국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절호의 기회에 집권한 친러 수구파 광무정권이 '개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구국할 수 있는 개혁운동을 탄압해버린 것에 있다고 보고 있으며, 재야 개혁파의 '개혁운동'이 집권하여 '정책'으로 집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것이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한편 이 무렵엔 무엇보다도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전화의 개통이 이루어진다. 1897년에는 고종황제 침소와 정부 각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다. 왕실 전화과장 이재찬은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규태는 당시 전화를 거는 예절은 대단히 까다로웠다면 이렇게 말했다. "상투를 단정히 고쳐 세우고 덕진풍(德津風, '텔리폰'을 음역(音譯)한 말) 앞에서 두 손을 맞잡아 머리 위에 쳐드는 읍(揖)을 하고서 전화 딸딸이를 돌렸던 것이다. 상대방이 나오면 자신의 직함·품계·본관·성명을 다 말하고 상대부서의 판서·참판·참의의 안부를 물은 다음 전화받는 당사자의 부모들 안부까지 묻고서 안건을 말했던 것이다. 만약 궁내부에서 전화할 일이 있으면 절차는 더 복잡해진다. 벗어놓았던 관복·관모·관대로 정장을 하고 전화를 향해 큰 절을 네 번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엎드려서 수화기에 대화를 했던 것이다."



민권의식의 성장



독립협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은 1898년 크게 3차례에 걸쳐 열린 만민공동회였다. 민권의식의 성장을 보여준 제1차 만민공동회는 3월 10일 오후 2시 종로 네거리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독립협회 간부(서재필·이완용·윤치호 등)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이날의 집회엔 나서지 않고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의 젊은 교사와 학원(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웠다. 연사는 배재학당 대표(이승만·홍정후)와 경성학당 대표(현공렴)였다.(참고로 이승만은 서당에 다니다가 1894년,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개화파 이념에 다가섰다. 배재학당의 성장과 관련하여 하동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능력 본위와 평등사회의 구현을 꿈꾼 1894년의 갑오경장이 과거제도를 없애버리자 배재학당과 같은 학교들은 미몽에 사로잡혀 있던 유생들의 굳은 머리를 녹여 근대적 개혁가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하는 용광로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집회에는 주최측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그날 이후 대중 집회를 가리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된 이유가 된다.



이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만민공동회의 현실적 힘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러시아는 절영도(부산 영도) 대신 청국의 요동반도(랴오둥반도)로 해군기지를 이동하기로 결정했고, 3월 17일에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으며 노한은행도 철폐하였다. 이와 관련, 손세일은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건, 일본과 러시아가 한통속인 건 분명했다. 1898년 4월 25일 일본의 도쿄에선 일본 외상니시(西德二郞)와 주일 러시아공사 로젠이 새로운 러일 협정에 조인하였다. 이와 관련 노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가 일본과 일련의 협정체결과 함께 군사교관단을 철수시킨 것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사실상 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중략) '눈엣가시' 러시아군이 떠나자 일본의 한반도 점령 프로젝트 추진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만민공동회의 도전



제2차 만민공동회는 1989년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종로에서 12일 동안 철야집회를 하며 연좌법과 나륙법(연좌제의 일종으로 죄인의 아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제도)을 부활시키려는 수구 친러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 철야 투쟁은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었고, 결국 고종은 10월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파면시켰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정부수반으로 삼는 개혁파 정부를 탄생시켰다. 1898년 10월 28~29일 종로에서 열린 제3차 만민공동회는 '관민(官民) 공동회(관원과 백성이 합동으로 상론하는 것)'로까지 발전하였다. 10월 29일 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몇몇 대신들까지 참석한 자리에선 개혁 요구안인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드림) 6조'를 채택해 고종에게 건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내용은 "전제황권(專制皇勸)의 공고화,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체결 등은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 전국의 재정과 조세는 탁지부에 관장하고 예산 결산은 인민에게 공개, 모든 중범죄도 공판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시행,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서 임명, 장정(章程, 갑오경장 이후 새로 제정한 법률과 각 부의 장정을 정부가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간 것)의 실천"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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