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마틴 폴리 지음 | 생각의나무
제2차 세계대전
마틴 폴리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6월 / 255쪽 / 23,500원
불안한 평화유럽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치러진 30년 전쟁의 마지막 장으로 규정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가 전쟁의 발발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해석이다. 특히 유럽의 강대국이면서도 지리적으로 한정된 독일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동쪽의 슬라브족을 희생시키며 팽창하고자 했던 독일 황제와 히틀러의 공통된 야심이 이러한 이론을 그럴듯하게 만든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 측이 제기한 또 다른 이론은 전쟁이 끝난 이후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 이론은 전쟁이 히틀러의 편견과 야망(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연합국의 유화정책)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평화정착을 위한 전후 처리는 특히 독일 내에서 강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전장에서의 패배가 아닌 국내 특정 계층의 '배후중상(stab in the back)'(독일 내에 잠복한 비독일적 요소, 즉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유대인들의 방해로 독일이 패배했다는 주장-옮긴이)에 의해서 부과된 징벌로 여겼다.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독일인들이 조국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의 영토 상실과 비무장화 그리고 전쟁 배상을 요구하였지만, 독일이라는 국가를 온전히 보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강대국 중의 하나로 남을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너그러운 처리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192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경제적 원조에 힘입어 신생 독일 공화국은 번영을 누렸으며 국제사회에 복귀하였다.
대공황은 국제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며 유럽에 긴장을 불러왔다. 미국 주식시장과 뒤이은 금융 산업의 붕괴는 미국 경제와 긴밀한 유대관계에 있던 유럽 경제와 은행들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실업률을 증가시켰다. 또 유럽 각국은 금본위제도 폐지 등의 보호주의 경제정책과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실업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존의 외환 질서가 붕괴하자 세계 경제는 침체되었고, 결국 과거의 적대국이나 새로운 국제질서는 비난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이념과 권력에 근거하여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극단적인 운동이 전 유럽에 등장하였다. 이는 민주주의를 제약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많은 국가들이 독재 체제로 바뀌었다. 오직 소련만이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와 이어진 공업화 계획의 실패로 인해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이에 반대하거나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축출되면서 소련의 사회계층은 사라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독일은 1923년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극우나 극좌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전쟁에서의 패배와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도입된 민주주의는 그 뿌리가 대단히 약했으며, 결국 대공황의 돌풍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소련이 대공황을 피할 수 있었던 점을 강조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공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강한 지도력을 갖춘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Nazi)은 위대한 독일의 역사적 전통을 대변하며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의 원상회복과 독일 민족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며, 독일이 직면한 문제들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치즘을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로 보았고,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바로 보수주의자들의 지원이 필요 없어졌으며, 공포를 자아내는 비밀경찰과 집단수용소에 의해 유지되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7월에는 '장검의 밤(Night of Long Knives)'이라고 불리는,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나치 돌격대에 의한 숙청을 통해 육군을 손에 넣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서거와 동시에 히틀러는 스스로를 총통이라 칭하며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초기에 대부분의 외국 정치가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조치들을 회복하려는 히틀러의 시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정해진 10만 명 이상으로 육군을 증강하고 공군을 창설하였을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히틀러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점점 야심찬 계획을 실현해나갔다. 히틀러가 야심찬 계획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였다. 프랑스는 독일 동쪽의 국가들과 이미 방어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특히 나치보다 더 믿지 못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협정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국내의 혼란에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는 점점 더 수세적인 마지노선(Maginot)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수행할 의지도 없고 준비도 부족했던 영국은 '유화정책'으로 히틀러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가장 결정적인 유화정책은 히틀러가 비무장화되어 있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병하였을 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들을 독려하여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아래 지도, 초록색 부분)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독일 민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 아래 지도, 주황색 부분)의 양도를 요구하였다. 체코 정부는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지만, 이와 반대로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1938년 9월 뭰헨에서 히틀러와 협상하여 주데텐란트의 합병을 용인하였다.
이러한 히틀러의 팽창정책은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영국은 외교정책의 급격한 전환을 하고 피동적이지만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재무장을 시작하였다. '유화정책'은 결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 적이 없었다. '생활권'(독일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영토 범위-옮긴이) 확보라는 히틀러의 목표는 단순히 독일 민족의 재통일을 넘어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 통치하의 유럽, 1940~1941년독일이 점령한 유럽 대륙은 크게 독일 제국의 영토, 위성국이나 동맹국, 그리고 점령지(아래 지도)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었다. 제3제국(1933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독일 나치 정권의 공식 명칭)에 즉각적으로 통합된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일 영토였거나 독일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등은 전쟁 이전에 합병되었으며, 폴란드 회랑과 알자스-로렌 그리고 벨기에의 몇몇 지역이 전쟁 발발 이후에 합병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의 비시 정부,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는 내부적인 자치 정부가 허용되었으며, 독일이 외교권과 군사작전 권한을 보유하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적 인적 자원을 착취한 지역들이다. 마지막 범주는 독일군 및 동맹국 군대에 의해 직접 통치된 지역으로 경제적 착취와 강제 노동이 강요되었으며 유대인, 집시, 그리고 정치적 적대세력과 같은 '불순한' 요소들이 색출당한 지역이다. 여기에는 그리스, 알바니아, 세르비아, 중부 및 동부 폴란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가 포함되었다. 특히 폴란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의 세 지역에서는 인종청소 및 독일인 이주정책이 실시되었다.
이탈리아의 선전 포고로 인해 지중해 지역도 새로운 전구가 되었다. 이는 영국의 이익에 대한 분명한 위협이 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영국 해군이 특정 지역을 공격하여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연합국에 대항해 형성한 동맹)의 경제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였다. 지중해 지역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부족은 이미 비시 정부(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비시에 세운 친독(親獨) 정권)에 프랑스의 지중해 해안 지역을 넘겨준 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940년 중반에 남동 유럽에 대한 히틀러의 정책은 지중해와 인접한 지역(유고슬라비아·그리스·알바니아) 등을 이탈리아가 지배하게 하고 독일은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년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 내의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이후 전면 수출 금지 조치로 확대하였는데, 여기에는 석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수출 재개 조건은 명확하였다. 즉 일본군이 중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수출 금지 조치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1941년 8월에 열린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독일이 더 큰 위협이지만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취해 최대한 일본을 저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불행하게도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군은 중국을 굴복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철수할 의도가 없었지만 장제스에 대한 추가적인 압박을 가하지 않고서 승리를 거두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고노에(近衛文磨)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중국 사태가 해결된 후에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외교적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지만 미국의 정책을 바꾸진 못하였다. 10월에 전쟁성 장관이던 도조(東條英機) 장군이 고노에 총리 후임으로 총리가 되었다. 도조는 외교적 협상을 계속하는 한편, 협상의 마감시한을 11월 말로 정하였다. 그는 이 시점이 지나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미국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은 일본이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들은 매직(Magic) 작전으로 암호화된 일본 외교문서 송수신기(암호명 퍼플 purple)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의 공격 대상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11월 25일 미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은 태평양의 모든 미군 기지에 전쟁 대비 경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연락 체계도 미비하여 일본은 완벽한 기습 공격을 할 수 있었다.
12월 7일 일요일 새벽 나구모 중장이 이끄는 6척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였다. 미 태평양 함대는 1940년 4월부터 전쟁 억제 목적으로 진주만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함대는 좁은 항만 때문에 어뢰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일본 조종사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두 번에 걸친 공격으로 미 해군 함선 18척이 침몰하였고, 완파 2척을 포함하여 모든 전함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항공모함은 훈련 중이어서 공격받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187대의 미군 항공기를 파괴했는데, 대부분 태업에 대비하여 활주로에 집결해 있던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 총 사망자는 2,403명이었다. 음모론자들은 루스벨트가 일본의 공격 의도를 알고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고립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태평양 함대에 대한 공격을 묵인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공격으로 인해 즉각적으로 영미 간에 대일본 동맹이 형성되었다. 처칠은 미국이 마침내 참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으며 이제는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개연성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있어 적은 일본이었다. 그런데 12월 11일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그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전쟁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대전이 되었다. 히틀러가 대미 선전포고를 한 것은 미국의 자원을 분산시켜 일본의 승리를 돕고(일본이 승리하면 영국과 소련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독일 잠수함 부대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바뀌어 1942년에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성공하지 못하자 장기적으로 미국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전쟁에 쏟아 붓게 되었고, 이로 인해 히틀러는 일본처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전시 미국 1940년 12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미국의 공헌은 종종 무기 생산의 측면에서 설명되곤 한다. 미국은 8만 6,000대의 전차, 30만 대의 항공기와 6, 755척의 군함을 생산한 반면, 추축국 전체의 생산량은 전차 5만 5,500대, 항공기 15만 7,000대 및 군함 1,400척이었다. 이러한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전시 노동위원회'와 '전시 동원청' 등의 기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효율적으로 조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물가와 임금은 법적으로 통제되고 있었지만, 노동력 징집이나 생산시설의 국유화 또는 전국적인 공공사업의 통제 계획은 없었다. 대신에 정부와 각 부처들은 기업을 통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기업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정부의 새로운 부서에 고용되었다. 따라서 미국이 전쟁 중에 발휘한 어마어마한 생산능력은 대부분 일반 기업에 의해 달성되었다. 예를 들면 카이저 조선소는 무장상선을 만들었으며, 포드 자동차의 윌로우런 공장은 폭격기를 생산하였다.(아래 지도) 기업들은 세금 혜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자는 정부에 의해 재정상의 보증을 받았다.
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뉴딜 정책(1933년대 불황 시 루즈벨트가 미국정부의 경제정책을 일신할 의도로 사용한 정책)이 직면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며, 이것은 곧 다른 참전 국가들과 달리 미국에서는 전쟁이 번영의 시기였음을 의미한다. 연합군과 자국 군대의 끊임없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기업들은 공장 가동 시간을 하루 24시간으로 늘렸다. 이미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복무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전쟁 이전에는 취업이 힘들었던 계층, 특히 흑인들이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숙련공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들 역시 더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었고, 선전 캠페인은 이전에는 일한 적이 없었던 중년의 중산층 여성들을 노동력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또한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가져왔다. 흑인들은 고립된 남부를 떠나 북부와 서부로 이동하였으며, 브라세로(bracero) 협정으로 20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북부로 유입되었다. 인종적으로 다양한 집단의 유입으로 인종 갈등도 일어났다.
진주만 공격(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대한 일본의 공중 기습공격, 1941년 12월 7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으로 미국인들은 전쟁을 지지하며 하나로 통합되었다. 미국의 공헌은 종종 생산적인 관점에서 조명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160만 명의 남녀 군인 및 연합군 중 최대 규모의 해군과 무장상선 그리고 전략 폭격 부대를 보유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맨해튼 계획(제2차 세계대전 중 이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 계획)의 결과물인 원자폭탄은 미국의 산업 및 과학적 노력의 가장 큰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