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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매슈 휴스, 윌리엄 J. 필포트 지음 | 생각의나무
제1차 세계대전

매슈 휴스, 윌리엄 J. 필포트 지음 생각의나무 / 2008년 6월 / 251쪽 / 23,500원

교전국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 대륙의 평화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5대 강국들 사이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국가 간 긴장은 각종 국제회의에서 해결되었고, 이러한 체제는 소위 '유럽 협조체제'를 낳았다. 그 결과 '빈체제'가 19세기 중반까지는 효과적으로 작동했으나 그 이후에는 강대국들 사이의 작은 전쟁이 중부 및 남부 유럽 대륙을 휩쓸었으며 이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어 오던 세력균형이 붕괴되고 말았다.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1871년 사이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은 유럽 대륙의 신흥강국의 되었다. 독일의 독립과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수상은 신생국 독일의 안보를 위해 기존의 세력균형을 부활시켰다. 바로 여기에서 소위 '동맹체제'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신중한 외교적 노력에 의해 유지되는 인위적인 균형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수상이 조심스레 유지해오던 유럽 대륙의 외교적 세력균형은 독일 제국의 세계화를 꿈꾸던 민족주의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한 이후 무너졌고, 이로 인해 결국 유럽은 대규모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자 국제사회는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하였다. 첫 번째 문제는 식민지 점령으로 분할된 아프리카의 영토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상업진출을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인데, 이는 대체로 독일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대결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국제적 긴장악화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문제는 이른바 동방문제, 즉 쇠퇴하는 오스만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강대국의 고민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단순히 변방 제국주의 국가의 쇠퇴라는 점 외에도 강대국 사이의 갈등의 불씨를 포함하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각각 터키 제국에서 자국의 자본주의 팽창을 강화하려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과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민족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강제로 합병한 사건은 러시아에게 외교적 수치였고, 이후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 펴져 있는 소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1912년과 1913년에 투르크 민족과 그리스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 슬라브 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발칸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세르비아 세력의 강화를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는데, 이는 세르비아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받아 자칫 자국 영토 내 슬라브계 소수민족들이 봉기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긴장은 1914년 6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시프(Gavrilo princip)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한 계산된 모험을 시작했고, 독일의 지원을 보장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즉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위 지도, 자주색 부분)를 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전통적으로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 역할을 해온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관련국들은 즉시 유사시에 대비한 동원령을 발령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제1,2차 발칸 전쟁과 달리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제3차 발칸 전쟁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악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 전쟁에 유럽 모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대립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상호 밀약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1914년 유럽 대륙에 제1차 세계대전을 몰고온 여러 가지 원인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1910년대에 본격화된 발칸 반도의 민족적·정치적 갈등과 긴장,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 합병, 프랑스와 러시아의 야망, 제국주의 세력의 도전으로 인한 영국의 불안, 유럽 각국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산업화) 및 정치적 변화(선거권을 가진 대중의 등장) 등이 독일의 극단적 민족주의와 안보위협에 대한 불안감과 결합하였으며, 그 결과 1914년 7월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의 전쟁목표 : '9월 계획'

독일 수상 베트만홀베크(Theo von Bethmann-Hollweg)는 '9월 계획(The September programme)'이라는 독일의 전쟁목표를 1914년에 발표했다. '9월 계획'에 따르면 독일은 유럽 대륙에서 영토확장과 경제적 지배라는 두 가지 목표를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폴란드와 러시아 동부지역, 그리고 발트 해 연안 국가들을 합병하고 나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민족자결을 주창하는 다수의 위성국가(아래 지도, 자주색 부분)들이 생겨날 것인데, 이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러시아에게 부과할 예정이었다. 한편 서부전선에는 룩셈부르크와 롱위-브리에(Longwy-Briey) 철강지대와 내륙의 운하도시들(앤트워프, 제브뤼헤, 오스탕드 등)을 포함해 프랑스와 벨기에의 주요 경제중심 지역이 독일의 경제권에 통합되어 장차 독일의 경제력이 영국-프랑스 연합세력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독일 제국 중심의 경제권에서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경제연합에 통합될 예정이었는데, 이 연합체가 완성되면 동서로는 대서양에서 폴란드까지 펼쳐질 것이며, 남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터키까지 포함될 예정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대륙에도 독일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식민지 지역들은 중앙아프리카의 경제핵심지역에 통합되어 독일 산업발전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중심지역으로 성장할 것이었다. 한편, 독일은 대서양과 홍해 연안을 통제함으로써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국제항로를 독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조치를 통해 독일의 경제력은 확장되는 반면, 영국이 독점해 오던 경제와 상업 패권은 도전받게 될 것이었다.



1960년대에 유명한 역사가 프리츠 피셔(Fritz Fischer)는 독일의 '9월 계획'에는 팽창주의 정책에 관한 모든 것이 정교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이미 전쟁 전부터 독일 내부에서 유행하던 세계화 정책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독일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기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프리츠 피셔의 주장은 이후 역사학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직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볼케르 베르그한(Volker Berghahn) 같은 역사가는 독일의 세계화 정책 실패로 1914년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를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안정된 지위와 국제적 위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가능할 때 독일은 미래에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이 없던 당시 상황 때문에 독일이 전쟁을 택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독일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야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를 자국의 적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파놓은 덫에 걸려 패배와 치욕을 당할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제1차 세계대전

대륙 전체가 대부분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마자 거의 동시에 전쟁에 휘말렸다. 아프리카 대륙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연합국 국가가 독일 식민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연합국과 독일은 자국에서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지 않고 대신 식민지 자원과 인력을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아프리카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제국주의 일면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전투원과 노동자로 동원되었으며, 이 중에서 20만 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사망했다. 유럽인의 인종차별주의적 시각 때문에 아프리카인이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은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한편 아시아의 신흥강대국 일본에게 독일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나, 1902년 이후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중국 해안에 자리 잡은 독일군의 해군기지 칭다오 항을 탐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해군이 참전할 것을 희망하며 독일이 마리아나(Mariana), 캐롤라인 제도(Caroline Islands),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사모아(Samoa) 등 태평양 지역에 건설한 기지를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영국이 유럽 지역에 집중하고 일본이 중립을 취하는 동안, 독일의 칭다오 해군 기지는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해군의 지원을 받은 칭다오 기지의 독일군 사령관은 물자와 인원을 기지 안으로 피신시킨 상태에서 6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과 영국-인도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공성전으로 맞선 독일군에게 공군력까지 동원해 타격했으며, 결국 전투물자가 고갈된 독일군은 11월 7일 항복했다. 또한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협력하여 독일이 태평양 지역에 건설한 식민지 미크로네시아와 뉴기니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태평양 지역에서 독일 식민지가 정리됨으로써 영국과 연합국이 유럽 지역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신흥강국이던 일본이 점차 태평양과 중국 대륙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이프르 전투 : 독가스 사용

1915년 독일군의 유일한 서부전선 대공세는 4월 22일 시작되었다. 4개 사단으로 캐나다군 및 프랑스 군이 방어하는 이프르 돌출부 북부 측방을 타격하는 대공세에서 독일군은 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동부전선에 대한 공격도 병행했다. 이 공격에서는 통상적인 포병의 포격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원통에서 나온 염소가스로, 이 새로운 무기는 프랑스군 및 캐나다군 사단의 참호를 가로질러 확산되었다. 비록 가스 사용이 처음은 아니었지만(프랑스군과 독일군 양측 모두 제한된 효과를 내는 최루가스를 이미 사용했다) 이프르에서 독일군이 시도한 가스 공격은 전장에서 독가스가 전술적 충격을 가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산업화된 전쟁의 새로운 영역인 셈이다.

독일군의 가스 사용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신사적인' 전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스 공격을 실시한 다음 날 독일 제3군 아이넴(Karl von Einem)은 "전쟁은 이제 기사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졌다"라고 시인했다. 독가스 사용은 1899년 헤이그 조약에서 명확하게 금지되었다. 독일의 이러한 국제법 위반은 중립국 측의 반(反) 독일 정치전선에 '잔악행위' 목록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영구적인 전술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대응조치로 1915년 말에는 프랑스군과 영국군 모두 염소가스 공격으로 맞섰다. 전쟁이 진전되면서 양측의 화학산업계는 좀 더 개량된 화학가스 제공 경쟁에 나섰다. 독가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무기였다. 조용하면서도 심각한 손상을 일으키는 무서운 무기로 독가스의 광범위한 사용은 현대의 산업화된 전쟁에서 비도덕성과 치명성이 가능함을 예증하였다. 독가스 공격의 피해자였던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 사용을 금지시켰지만, 나치의 인종말살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훨씬 더 끔찍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유럽에서 연합국의 전쟁목표

독일과 달리 연합국은 개전 직후 특정한 전쟁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 이는 연합국 내 의견불일치와 중립국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개전 초기 연합국의 외교는 중립국을 연합국 측으로 가담시키려는 것과, 독일 동맹국에게 양보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동맹국 연합을 붕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외교는 종종 모순과 역효과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1915년 이탈리아를 연합국 쪽에 참전시키기 위해 연합국은 이탈리아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터키에 대한 영토보상을 제안해야 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단독 강화조약에 방해가 되었다.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목표는 신중한 협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함정과 같은 것이었다.



1916년까지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있을 영토재분배와 관련된 연합국의 비밀외교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유럽 이외 지역에 관심을 보였던 영국은 독일과 터키의 식민지를 차지하려 했다. 이는 소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고조시키던 프랑스와의 긴장을 초래했다. 1916년 여름 연합국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전후 희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영토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 경제 이익, 전쟁피해 보상 및 대국민 평화약속과 같은 구체화되지 않은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먼저 영국은 독일의 해군력을 붕괴시키고 독일의 식민지를 병합함으로써 해상 및 교역에서 독일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전쟁도발 능력에 대한 엄격한 제한과 막대한 재정적 배상이 중요했다. 프랑스는 독일의 서부전선에 있는 산업지대 루르와 자를란트(아래 지도, 노란색 부분)를 직접 병합하거나 이곳을 독일로부터 분리해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는 방법으로 통제권을 확보함으로써 유럽에서 독일의 경제력을 영구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다. 1916년 6월에 개최된 파리 회담에서는 연합국이 승리한 이후 동맹국에 재정적 배상과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자는 프랑스의 제안이 추인되었다.



연합국의 이런 새로운 움직임은 국제상황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우선 연합국은 1916년 1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과 1917년 8월에 교황 베네딕트 15세 등이 제안한 중재안에 대응해야 했다. 둘째, 전쟁에 대한 염증으로 국내적 갈등이 확산되어 연합국 정치지도자들은 좌익정치가처럼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윤리적' 의제를 중시해야 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1917년 2월 혁명 이후 '합병이나 배상 없는 강화'라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의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셋째, 단독 강화제안에 의해 연합국 내 경쟁국이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건에 대한 분명한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1917년 4월 세계평화라는 공공연한 전쟁목표를 주창하면서 연합국의 '연합세력'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나아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가 집권한 이후 레닌이 주창하는 '민주적' 강화에 대한 요구가 급속하게 확장되면서 교전국은 이에 대응해야 했다. 1918년 1월에 표명된 '14개 조항'으로 전형이 된 미국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적 의제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야망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벨기에의 독립과 알자스와 로렌의 프랑스 반환을 지지하면서도, 공해상의 자유와 소수 민족의 자결권과 같은 윌슨의 국제주의적 시각은 연합국의 국익에 저해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합국의 의견불일치는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후 파리 강화회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러시아의 붕괴

1917년 러시아가 붕괴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러시아의 경제체제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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