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두 얼굴
양둥핑 지음 | 펜타그램
중국의 두 얼굴
양둥핑 지음
펜타그램 / 2008년 6월 / 544쪽 / 16,000원
현대 중국을 이끌어 온 두 도시 베이징이 우뚝 솟은 궁전들과 수많은 역사적인 유적을 지니고 있는 고도(古都)의 도시라면, 상하이는 서태평양에 위치한 모던한 도시로 베이징 사람들이 보기에 어딘지 기이한 데가 있는 '마도(魔都)'로서, 혈통을 알 수 없는 혼혈아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후 상하이와 베이징은 그 운명이 극변했다. 베이징은 고도라는 찬란한 역사의 자취를 지우고 현대적인 풍모를 지닌 도시로 변모했다. 상하이도 늙은 미녀의 흔적을 벗고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단장함으로써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베이징과 상하이, 여전히 이 두 도시는 중국의 두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1장. 근대와 함께 시작된 두 도시의 경쟁
중국의 북방과 남방 오늘의 상하이와 베이징의 관계에는 유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 '혁명의 남방'과 '보수의 북방'이라는 대립과 충돌은 남방을 대표하는 상하이와 북방을 대표하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현상이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특성이다.
동서에서 남북으로지리환경은 도시 문화의 기본적인 색깔을 결정한다. 남과 북의 다른 자연 환경은 필연적으로 남북 간의 문화 차이를 형성했다. 북방은 대체로 춥고 건조하고 황량한 자연환경이어서 강인하고 담대한 인간성을 연상시키며, 남방은 온난 습윤하고 넉넉한 자연환경이 온화하고 맑은 인간성을 연상케 한다. 이와 같은 지역의 차이는 인문 지리학, 지연, 정치학, 지역 문화 이론, 인류 생태학, 도시 생태학 등 많은 학문이 존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에서의 북방 문화와 남방 문화의 차이점은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유가(儒家)는 북방 문화의 주류였고, 도가(道家)는 남방 문화의 기질을 드러낸다. '예의염치(禮義廉恥)'의 '교화(敎化)', '인애(仁愛)'와 '중용(中庸)'의 '수신(修身)'을 존중한 공자, 맹자의 사상이 유가를 대표한다면, 소요(逍遙), 자유, 초탈, 표일(飄逸)을 추구하는 노자, 장자의 사상은 도가를 대표한다.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隨;589~618년)와 당(唐;618~907년)의 시대가 이어지자, 정치, 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북방의 장안으로 제한됐지만 경제, 특히 식량 공급은 남방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당의 인구는 755년 5191만 명에서 760년에는 1699만 명으로 격감했지만, 반면 남방의 인구는 급증했고, 남방의 경제 발전 속도는 북방을 능가했다. 북송 시대가 되면서 전국의 경제 중심은 완전히 강남으로 이동했다. 그 후 금의 침입으로 북송 왕조가 붕괴되면서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금 왕조(1115~1234년)와 강남의 임안(臨安;항저우)을 수도로 한 남송 왕조(1127~1279년)가 남북으로 대치하는 시대가 됐다. 송 황실의 남천에 의해 중국 문화의 중심은 완전히 남쪽으로 옮겨갔고, 이로부터 북방 문화는 붕괴한 반면 강남 문화가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베이징성과 상하이시다시 원(元)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1272년 2월 베이징 땅을 수도로 정했다. 마침내 베이징은 그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맞은 셈이다. 베이징은 이제 중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이 됐다. 그 뒤 베이징은 원, 명, 청 세 왕조를 거치며 640여 년 동안 중국의 수도였으며 베이징이라는 이름은 명대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베이징이 수도가 되면서, 그동안 동서가 서로 맞서던 형국은 남북이 서로 맞서는 형국이 되어, '남북의 대치'가 역사를 움직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광대한 중국의 수도이자 정치 중심이라는 지위를 가진 베이징은 중국 각 지방, 각 민족 사람들, 나아가 외국인들도 모여드는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주변 대도시와 비교하면 상하이는 서구와의 통상을 통해 도시의 규모로 발전된 서구적인 도시였다. 1832년 6월 20일 아침, 영국 동인도회사 광저우 지사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rmherst)호가 상하이 항에 입항한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는 태평양을 향해 가슴을 열게 된 것이다. 1846년, 영국이 먼저 상하이의 와이탄 서쪽 땅을 점령하고 조계(租界)를 만들었다. 그 뒤 20여 년간, 상하이에는 중국의 도시 역사 속에서 다른 예를 볼 수 없는 특유한 조계 제도가 형성됐다. 대 상하이는 이때부터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가운데 번영을 계속했고, 독특한 상하이 문화를 발전시켰다.
경파와 해파의 대치 대상하이의 등장과 해파 문화
해파 문화는 일종의 신흥도시의 문화였고,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 다시 말해서 정통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해파 문화의 발생은 전통적인 고도(古都)와는 다른 새로운 도시 사회, 도시 문화의 탄생을 의미했다. 상하이는 커다란 용광로처럼 전통적인 사고와 오랜 습관들을 한데 모아 녹이고, 이를 새로운 사상으로 개조해낸 융화의 용광로였다. 상하이에 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고 융화하는 속에서 근대도시 문화에 동질화되어 감으로써 독특한 상하이인으로 변화되어갔다.
해파 문화는 시민의 토양에서 길러졌기 때문에, 시민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학술의 향상, 예술성의 추진, 사회 비판과 교화 등을 지상의 가치로 한 베이징의 엘리트 문화(경파 문화)와는 달리, 해파 문화는 상층과 하층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접점을 가진 시민 문화였던 것이다. 엘리트 문화와 세속 문화를 양극단으로 한다면, 해파 문화는 그 사이에 있는 넓은 중간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하이의 지식인이 창출한 해파 문화의 가장 큰 공헌은 아(雅)와 속(俗) 양쪽이 함께 즐길만한 우수한 대중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해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을 것이다. 해파에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바다와 같은 도량과 기백이 있다.
경파의 탄생과 경미의 성숙 이끈 베이핑 시기경파의 특징은 '관(官)' 주도형 문화라는 것이다. 경성은 관계(官界)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중앙 관료인 '경관(京官)'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왕조의 통치 중심으로서, 베이징의 도시 사회와 문화의 양태는 정치권력 및 관계 생활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중국의 왕조 문화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유학儒學)의 일체화, 그리고 교육제도(과거제도)와 임관 제도의 일체화를 특징으로 했다. 이 때문에 베이징은 정치의 중심과 문화의 중심을 고도로 겸비한 장소가 됐다. 이와 같은 관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문화가 엘리트 문화인 경파 문화인 것이다. 이 경파 문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건축, 원림 공예, 옥기, 칠기, 유리 공예, 조각 등은 물론 온실재배, 금붕어 양식 기술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예와 취미 산업이 활발했고 연극, 서화(書畵)와 같은 문화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베이징에는 관계와 학계 외에도, 라오베이징인에 의한 민간 사회의 인정 넘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베이징의 하층 문화에 해당하는 '경미(京味) 문화'이다. 베이징의 서민 문화로 발효되고 자리 잡은 경미 문화는 전통 시대에 이미 '경파 문화'와 대립하는 형태로 등장하여, 1920~1930년대 베이징 시기에 더욱 더 성숙했다.
2장. 혁명이 바꿔 놓은 도시 풍경
신베이징의 빛과 그림자
거대한 베이징성의 죽음1949년 1월 31일, 국민당군의 푸쭤이 장군이 공산당군에 대한 무력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에 공산당군은 평화적으로 베이징에 임성함으로써 베이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베이징은 22년간 상실했던 수도로서의 전통과 영광을 완벽하게 회복했다. 그와 동시에 요 왕조의 남경, 금 왕조의 중도, 원 왕조의 대도, 명·청 황조의 베이징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 베이징에서 사상 다섯 번째의 대규모 수축이 시작됐으며, 이 수축 과정에서 량쓰청이 기초한 '량청법안(梁陳法案)'이 제안되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었다.
1950년, 베이징의 운명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신베이징의 건설자들은 량쓰청을 중심으로 한 보호파와 해체파로 나뉘었고 대학생, 간부, 일반 시민들까지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사상 유래 없는 격론이 벌어졌다. 베이징의 해체파는 '성벽은 고대의 방어 시설로 제왕 통치의 유적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했고, 베이징의 성벽은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기 때문에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이징 보호파는 '비록 이들 건축물은 제왕들을 위해 존재했지만, 모두 고대 노동 인민이 창조한 걸작이며, 오늘날 이미 인민대중의 것이 되었으니, 민족의 기념물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며, 성벽을 둘러싼 해자를 이용해 녹지 공간을 만들고, 성벽은 시민의 휴식처, 오락 장소, 전망대를 만들어 공중정원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베이징의 역사성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결과는 해체파의 승리였다. 중국 공산당국은 1954년부터, 지안문을 시작으로 해체를 시작했다. 성문은 차례차례 헐렸고, 끝내는 숭문문, 서직문도 무너졌다. 이어 안정문, 조양문, 영정문 등이 사라져 갔다. 베이징엔 본래 47개의 성문, 전루 및 각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양문과 덕숭문의 전루, 그리고 동남각루 등 고작 세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일찍이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던 둘레 23킬로미터의 내성, 내성 남쪽 둘레 14킬로미터의 외성, 그리고 둘레 9킬로미터의 황성 등 명대의 성벽이 거의 다 사라졌다. 이렇게 고도(古都)로서의 베이징은 숨을 거둔 것이다.
북방의 특대도시 신베이징의 탄생신중국의 상징은 베이징이고, 신베이징의 상징은 천안문 광장이다. 천안문 광장만큼 신중국에서 베이징이 갖는 정치 중심의 의의와 문화적 가치를 말해주는 곳은 없다. 신베이징의 건설은 중국 굴지의 문화의 중심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의기충천하여 진행되었다. 신중국의 성립에 따라 정치의 중심이 된 베이징은 또한 중국 최대의 문화의 중심이 된 것이다. 공산당국은 혁명과 행정의 강력한 힘을 동원하여 전국의 문화 자원을 베이징으로 집중했다.
베이징을 진정으로 환골탈태하게 만든 것은 공업화에 대한 계획이었다. 1958년 6월, '대약진'의 열광 속에서 중공 베이징시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 당 중앙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위원회는 "베이징은 중국의 정치 중심과 문화 중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신속하게 근대적 공업기지와 과학 기술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라고 요구했다. 이와 같은 산업화 추진 계획으로 베이징은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59년 당 중앙이 '선 생산, 후 생활'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베이징의 공업화를 강화시키고, 거기다가 10년이나 계속된 문화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베이징의 발전은 폭발적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베이징은 마침내 '종합적 산업도시'가 되었다. 중국의 특대도시, 중국 북방의 최대 신흥 공업 도시, 신베이징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하이의 소시민
상하이 시민의 적응과 변질일찍이 자유경제를 구가해 온 대상하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신중국 성립 이후 계획경제 체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환경으로 상하이 시민은 당 권력에 순치 되어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 체제에 융합되고자 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오 주석의 좋은 학생' 커칭스와 같은 극좌 문인정치가가 상하이에 등장할 수 있었고, 극좌 문화가 거리낌 없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서양에 대해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 서구문화를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했던 상하이는 신중국 30년간의 쇄국정책에 의해 중국 내륙을 향한 작은 경제 기지로 축소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상하이의 도시 '소프트웨어' 측면, 즉 경영과 관리 행위, 가치관, 노동력의 자질과 시민의 정신 상태 등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1980년대 중반, 상하이의 신문은 상하이 사람들의 실태를 '상공업 정신의 실추', '경영 관리의 구태의연함', '극좌로부터의 속박'이라고 논파했다. 상하이 사람들은 똑똑하다. 그러나 이 '똑똑함'은 '현명함'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국가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탄력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왜곡된 경제 행위만이 그들에게 남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하이의 왜곡된 경제 행위의 배후에는 '극좌적'이라는 오랜 관습인 정치적 원인이 자리 잡고 있다. 사례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1986년 상하이의 어느 의류 회사는 그들의 티셔츠 도안이 미국 국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해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 사건은 '성조기 셔츠의 풍파'라 불렀다. 1989년 상하이 시장 주룽지(朱鎔基)는 이 같은 현상을 우려하며, "상하이의 경제를 운영하는 일에 나는 충분히 자신이 있지만, 상하이 시민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라고 개탄한 바가 있다.
토끼굴 속의 상하이 중산계급계획 경제 아래에서, 상하이 사람들의 생활환경, 생활 방식은 크게 변했다. 일단 도시에서 태어나면 '도시 사람의 신분'이 주어지고, '도시 사람의 신분'만 있으면, 최소한의 생활을 국가에서 보장했다. 바꾸어 말하면, '일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지만, 열심히 일해도 최소한의 의식주 이상은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굶는 사람은 없지만, 돈을 버는 사람도 없다"는 환경 속에서 상하이 사람들은 생존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실업과 해고의 걱정도 없어졌다. 사회주의 제도의 계획경제 아래에서, '철밥통', '한솥밥' 방식에 길들여진 신상하이인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행동양식을 만들었으며, 이 결과로 상하이인은 '상하이인'이라는 신분에 집착했다. 이러한 맹목적 우월감, 다른 성을 차별의 눈으로 보는 태도는 상하이 사람들의 인격의 폐쇄성과 편협함을 조장했다. 상하이는 세계의 상하이에서 중국의 상하이로 변했고, 결국은 '상하이의 상하이'로 변하고 있었다. 경쟁이 없어졌으니 기존의 '상충'이 소멸했고, 각 계층의 경제 격차는 거의 없어졌으며, 이런 평균화한 사회생활 속에서 돌출한 것이 '중산계급'이었던 것이다.
중산계급은 모호하지만 자극적인 명사로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어떤 때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 곧 화이트칼라들, 어떤 때는 기업가 계층을 가리켰다. 중산계급은 상하이의 특성이 만들어낸 계층으로서 곧 상하이 특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 중산계급이 만들어낸 문화는 도전을 좋아하는 상공문화나 걸작을 추구하는 예술 문화가 아니라. '시민의 생활 문화'였고, '가정 문화'였다. 이들이 표현하고 있는 인격 모델은 규범에 얽매어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지나치게 계산적이며, 집에서는 아내의 기분을 열심히 맞춰 주고, 억울한 기분에 울컥하는 사람들, 토끼굴 속의 소시민 상하이인의 모습인 것이다.
베이징의 신세대
'세대'의 탄생과 청년 문화세대 의식은 '제3세대'부터 자각되기 시작했다. 제1세대는 혁명 주체세력으로서 자신들이 만든 혁명 문화의 틀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자 하는 세대였다. 제2세대는 혁명 세대의 뒤를 잇는 세대로서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