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서
스티븐 쇼어 지음 | 시그마프레스
벽을 넘어서
스티븐 쇼어 지음
시그마프레스 / 2008년 5월 / 317쪽 / 13000원
인생의 편린새소리 때문에 6시 반에 잠을 깼다. 귀가 아프다. 새소리가 내 고막을 긁어 대고 있는 것만 같다. 아침을 먹고 면도할 시간이다. 아니 나는 면도를 하지 않는다. 면도칼로 수염을 깎으면 너무 아프다.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골라야 한다. 무슨 옷이든 상관없다. 그렇지만 양말은 구멍이 없어야 한다. 그런 양말을 신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강렬한 혼란이나 충격을 준다. 나갈 준비가 끝나면 자전거를 탄다. 나는 운전 면허증을 취득했고 차를 가지고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자전거를 이용한다. 이런 것을 자극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뱅글뱅글 도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보통 첫 수업이 시작되기 2시간 전 쯤 학교에 도착한다. 이 시간 동안 수업을 준비하고 연구 과제에 관련된 일을 하며 동료들과의 교제를 나눈다. 수업 시간이면 나는 안면실인증(상대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내가 자폐를 가지고 있고 안면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경영대 학장과 학생들에게 알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한 그런 사실을 알려 줬다가 괜히 나에 대해 쓸데없는 선입견을 가지게 될까 봐 망설이게 된다.
수업을 끝내고 나면 자폐를 가진 아이에게 음악치료를 한다. 아이는 5살인데 전반적 불특정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고, 언어장애를 지녔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피아노를 쳤고, 아이 어머니는 아이 손에 북채를 쥐어 주고 박자에 맞춰 북을 치게 했다. 이 후 세 번 만났지만 아이와 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의사소통이 없었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한 방에서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와 같은 병렬적인 행동은 자폐 아동이 보이는 놀이의 특징이다. 나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음악활동을 구조화하고 과제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불현 중에 아이는 이것을 이해했다. 그는 내가 하는 대로 채를 들고 작은 북을 네 번 친 다음 채를 내려놓았다. 나는 드디어 아이와 의사소통을 한 것이다.
음악치료가 끝나고 집에 오면 4시 30분쯤 된다. 아내는 벌써 집에 와 있다. 우리는 서로 꼭 껴안고 입맞춤으로 인사를 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매일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나의 생활에 예측 가능성과 안정감을 더해 준다. 저녁을 먹고 나서 보통 10분에서 1시간 정도 저녁잠을 잔 다음 내일 할 일을 준비한다.
어린 시절 나는 1961년 9월 27일 셋째로 태어났다. 로빈 누나는 나보다 네 살 위였고, 마틴 형은 두 살 위였다. 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형은 지적장애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생후 6개월을 전후해서 나는 말하는 소리를 낼 수 있었고, '엄마'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발달은 멈추고 말았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소아과 의사를 찾았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체아는 아닌 것은 알겠는데…. 자폐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를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자폐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내가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또 하나 늘었다는 좌절감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폐의 손아귀 안에서
돌이 지난 후에 행했던 E-2 질의서(아동과 관련된 정보 획득을 위해 개발된 질의서)에 따르면 나는 밝은 빛이나 색채 및 특이한 소리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손을 들어 안아 달라고 하는 요구를 나타내지도 않았으며, 요람 안에서 앞뒤로 몸을 흔드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또한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작은 소리에는 곧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네 살 때까지 나는 말을 하지 못했고, 갈아 만든 이유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1964년 초 나에 대한 공식 진단은 '정신병적 행동과 강한 자폐 성향'이라고 나왔다. 전문가들은 늘 긴장감에 가득 차 있는 우리 가족과 새롭게 장애 진단을 받은 형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맙게도 어머니는 심리적인 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위탁 기관으로 보내자는 그들의 권고를 거절했고, 나는 계속 집에 있게 되었다. 1년 뒤쯤, 물론 그들은 내가 '아주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를 유치원에 보내고 치료 교육을 제공하는 계획에 동의했다.
형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 집 라디오는 항상 클래식 음악 전문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또한 나와 대화를 나누거나 놀이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다. 내가 어머니를 인식하지 않는 듯 보였음에도, 어머니는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들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계속 노력을 기울였다.
퍼트넘에서 네 살이 되던 해인 1965년 가을, 나는 퍼트넘 아동센터의 치료교육 유아원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당시 퍼트넘 교사들은 학생의 발달 사항을 부모와 토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영진은 교사들이 부모의 말이나 질문을 정확히 해석할 만큼 충분한 정신분석적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그날 자기 아이가 점심을 먹었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선생님은 이 질문을 아이에게 엄마보다 더 나은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따라서 경영진은 좋은 뜻이었지만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 전체를 보더라도 부모의 참여로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들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 반에는 데이비드, 폴, 로베르티토,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의 아이가 있었다. 폴은 감정을 느끼는 재능과 함께 과장되게 연기하는 능력이 있었다. 데이비드는 말을 할 수 있었고, 나는 놀이를 할 수 있었고, 로베르티토는 '우리 모두가 아기였을 때와 같은 아이'였다. 나는 무엇이나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경향이 아주 심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상대의 말이나 움직임, 그리고 가끔은 감정적인 특징까지도 따라서 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를 흉내 내는지를 나 자신이 알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알 수가 없었다.
6개월 후 나는 비전형적 자폐, 그리고 정신병적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그냥 '신경계통'으로 분류되었다. 다음은 퍼트넘 아동 센터의 평가 결과이다. "그가 가진 큰 어려움은 자신과 사물 간의 분리화를 하는 것이다. 또 어머니와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인간임을 인지하는 것인 듯하다. 이 부분이 올해 치료 교육을 받으면서 스티븐이 가장 발전한 분야인 것 같다. 현재 그는 정신병적 아동이라기보다는 신경 계통에 문제가 있는 아동처럼 활동을 하고 있다."
유치원 시절퍼트넘을 떠난 나는 브라이턴 시에 있는 유대인 지역사회 센터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캐런이란 여자 아이와 친하게 지냈는데, 매일 유치원에서 집으로 데려다 주던 차 안에서 그녀를 때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때리면 캐런은 당연히 울었다. 아마도 이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외에는 때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 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앨리슨이라는 친구도 기억이 난다. 내가 손가락으로 앨리슨의 배를 콕 찌르면 앨리슨은 "하지 마"라고 했는데, 길게 늘여서 하는 그 말이 들어보면 참 재미있었다. 내 의사소통 능력은 다른 사람과 쉽게 대화를 나눌 만한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다. 문제가 되는 이런 행동들은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시도였던 것 같다.
자폐를 가진 사람들은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의 전부 또는 일부가 자극에 민감하거나 둔감하다. 어떤 감각들은 너무 높이 켜져 있어서 과부하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어떤 감각들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단계의 정보를 환경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한다. 더구나 전달받은 정보가 왜곡되어 있거나, 방해 전파로 가득 차 있기도 해서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신뢰하기 힘든 정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는 발달장애를 발생시키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젖은 느낌이 얼굴이나 손에 남아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음식을 먹고 나면 항상 휴지로 손과 얼굴을 훔쳐 내야 했다. 이 난관을 극복할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날 바비큐 닭 날개를 먹고 있었는데, 바로 그 전에는 커다란 수박 한 조각을 해 치웠다. 당연히 내 옷과 몸에는 여러 가지 음식 찌꺼기들이 묻어 있었다. 지저분해진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그토록 기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내 얼굴에 묻어 있던 음식물 찌꺼기가 주는 감각 과부하보다 더 강했던 것 같다.
불균형적으로 입력되는 감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다른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가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이었다. 도로에서 자전거타기를 배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나와 자전거를 우리 집 잔디밭에 올려놓았다. 잔디밭의 울퉁불퉁한 느낌이 내 신체에 대해 더 잘 알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로 인해 자전거 위에서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섯 살에는 도로에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는 내가 특별히 흥미로워하는 분야 중 하나가 되었다.
학교의 경이로움과 공포나는 여섯 살에 공립학교 부설 유치원에 정식 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부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거의 불행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차이를 빨리 알아챈다. 그리고 다른 면이 있는 반 친구들을 심하게 괴롭힌다. 이는 아이들이 나를 귀찮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날마다 학교가 끝나면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2학년 때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내가 읽기를 못하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님은 당황했다. 집에서는 내가 신문을 읽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얼마나 이해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읽기를 좋아했었다.
3학년 때 학급전체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특별한 교실로 간 적이 있었다. 수학은 어려웠다. 구구단을 외울 수 없었다. 마침내 나는 어떤 학생에게 1달러나 주고 구구단 연필통을 샀다. 나는 이 기구를 사용해서 곱셈과 나눗셈을 풀었다. 나중에는 구구단을 다 외울 수 있었으므로 연필통 구입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기구는 보조 공학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나 그 이후로도 읽기 이해(reading comprehension) 숙제는 매우 어려웠다. 나는 '얼마나 잘 읽었는가?'라는 부분을 가장 싫어했다. 5학년 때 '지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제목의 숙제 때문에 정말 화가 났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읽기 이해 숙제에 지구가 거대한 거북이 등의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말 어리석어 보여서 무척이나 화가 났었다. 지금은 나이가 더 들고 보니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인디언의 전설 중 하나였다.
내가 12살 때 어머니는 퍼트넘 아동 센터의 재닛 브라운 박사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어머니는 내가 6학년에서 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흥밋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과학에는 관심이 있고 잘하기는 했지만 읽기는 아직도 어려웠고, 반 친구들과 사회적 교류를 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중학교 때는 사정이 더 나아졌다. 그 이유는 내가 음악실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폐와 함께 찾아온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해 오던 심리치료를 마침내 끝낼 수 있었다. 상담이 자폐를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자폐가 내 심리 상태에 미쳤던 영향을 다루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선생님들을 진실 된 사람으로 보게 해준 부모님에게 감사드린다. 그것은 부모님이 선생님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가능했다. 한 선생님은 우리 집에 와서 피아노를 쳤고, 어떤 선생님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가족처럼 지냈다. 그 선생님은 형의 중학교 특수교사였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익숙해져서인지 나는 특수학급에 자주 들러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에게 판매할 수프를 만드는 일을 돕곤 했다. 특수학급을 돕고자 하는 노력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는데, 자원봉사자로 학생들에게 트롬본을 불어 주었다.
중학교 마지막 해에 나는 학교 음악실에서 트롬본 연주를 배웠다. 트롬본 연주는 너무 좋았다. 음역이 아주 좋았는데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부족한 중요한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트롬본은 정확한 음을 내야 하는 위치에 슬라이드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근육의 공동 작업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동이 자폐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음악은 다른 모습으로 의사소통을 돕는다. 중증 자폐 아동의 경우 음악은 의사소통의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스퍼스 증후군이나 고기능 자폐를 가진 아동들에게 음악은 이미 가지고 있는 음성을 이용한 의사소통 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해 준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집단치료 수업을 들었다. 처음으로 창피함을 경험한 곳이 바로 이 수업이었다. 토론을 하는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 있어 하는 주제가 나오면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내 생각이나 활동을 다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내가 이런 활동을 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나를 더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두려워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내 또래가 아니거나 같은 문화권이 아닌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또래 아이들보다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았던 누나의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냈다. 이 사람들은 나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고 더 흥미롭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른들과도 아주 쉽게 친해졌다. 이런 일은 중·고등학교까지 이어졌고, 나중에 직장에서도 그랬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문화에 대한 기대심리 때문인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두려움보다는 경이로움고등학교는 중학교 때보다 더욱 나아졌다. 반 친구들은 사람들의 다른 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나는 음악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선생님의 음악이론 시간의 체계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분은 시간이 나면 내게 트롬본 부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나를 좋아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한 번은 상담 선생님에게 내가 좋아하는 다른 선생님으로 담임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상담선생님은 옮기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냥 그러라고 하기보다 "음악이나 무엇이나 선생님과 대화를 할 만한 소재를 만들어 보지 그러니?" 하고 권했다. 나는 권고를 따르기로 하였다. 플루트를 가져와서 담임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연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