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강영계 지음 | 멘토프레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강영계 지음
멘토프레스 / 2008년 9월 / 357쪽 / 14,000원
1. 예수 이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인물 마르크스 파리, 브뤼셀, 런던으로 이어지는 망명생활, 혁명의 열정은 계속된다
마르크스는 스물다섯 살부터 스물여덟 살에 이르기까지(1843-1846) 휴머니즘의 완성과 사회개혁을 위해서 가장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독일을 떠나서 비참한 망명생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가 주장한 유물론적인 역사이론에 기초한 계급갈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상 때문에 독일, 프랑스 등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을 준비함으로써 앞으로 전개할 유물론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데모크리스토는 감각적 사물들의 수다성(數多性)과 변화의 기초에는 통일적이고 유사하며 불변하는 영원한 존재자인 원자(아토마)가 있는데, 이것은 물질적이며, 이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자연계(물질계)의 가장 근원적인 구성요소라고 주장함으로써 원자론을 정립시켰다. 이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적 원자는 나중에 마르크스의 물질적 생산관계에 적용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자연세계의 근원물질은 원자이고 나선형의 운동이 무거운 원자를 가벼운 원자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렇게 해서 세계형성이 진행되었으며 결국 세계는 서로 다르게 형성된 원자의 혼돈된 덩어리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또한 윤리적으로 화해, 우정 그리고 정신적 선의 향유를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로부터 유물론적 원자론과 휴머니즘을 배웠다. 원자론과 유물론적 원자론을 토대로 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천상과 지상의 신들을 환상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자기의식'을 최상의 신성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기의식'은 종교의 환상을 벗어나 감각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할 때 유물론적 입장을 가지는 의식을 말한다. 그의 '자기의식'은 현실세계에 대한 철저하고도 냉철한 의식이다.
마르크스는 1845년 봄 프랑스 정부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거처를 옮겼으며, 거기에서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를 보살펴주었던 엥겔스를 만나게 되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사상을 같이했고,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후원했다. 마르크스는 이즈음에 청년헤겔학파로부터 결별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헤겔의 관념론적 이성비판을 마르크스가 초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관념적 이성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철학의 과제가 종교비판이라는 것에도 반대했다. 헤겔에 의하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정신이나 이성과 같은 관념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 현실의 참다운 주제는 신적 절대정신이나 이성과 같은 그릇된 관념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식'을 소유한 인간이다. 헤겔에 의하면 관념적인 절대정신이 전개하는 국가의 법과 정부가 경제적 삶의 현실을 결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에게 정면으로 반대하여 경제적 삶이 정치적 현실과 관념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 사상을 받아들이지만 신적 절대정신은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현실의 국가와 법, 정부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삶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1846년 봄에 발표한 『포이어바흐 테제』에서는 자신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드러나 있다. 포이어바흐에게 있어서 참다운 학문은 인간학적 유물론뿐이며 이것은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신학은 상상의 산물이고 철학은 가장 허구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고 철학을 신학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이며 허구적이라고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을 수용하는 점을 보면, 마르크스는 관념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전통철학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적 절대정신과 아울러 포이어바흐의 추상적인 감각, 감정 및 인간학 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이었다.
과학적인 정치경제학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 부르주아 사상을 뛰어넘어라! 마르크스는 영국, 프랑스, 독일 및 미국의 정치 경제적 위기와 크고 작은 전쟁을 주시해왔는데, 그가 보기에 사회의 위기와 전쟁은 모두 사회혁명과 직결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정치 경제적 사회위기를 직시하고 사회혁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참다운 학문은 유물론적 역사 이외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관념적 사고가 끝나는 현실적 삶에서 현실적인 실증학문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현실적 실증학문은 바로 사회의 유물론적 역사이론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적대관계를 역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소유하며 이 바탕 위에서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성립한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일정한 단계까지 발달시킨다. 그러나 생산력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잉여가치에 의한 계급갈등이 심해져서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상품가치에서 임금을 뺀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인데, 바로 잉여가치가 노동착취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자기의 노동가치를 찾고자 하므로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이론의 근거이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이론은 후에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개념들 중에는 '노동과 상품'이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이중성을 분석한다. 노동은 가치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상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생산방식은 신비스럽게 포장되어 마치 자본가가 자비심을 가지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내면적인 실제관계는 은폐되어 있다. 이런 현상을 표면현상이라고 한다. 표면현상은 항상 현실관계를 은폐시키기 때문에 표면현상을 과학적으로 몰고 들어가서 현실의 내면을 통찰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 정치, 경제학,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정치, 경제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과학적 공산주의를 정립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물신 숭배(특정한 물건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 물건을 숭배하는 것)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자신의 주체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인정할 때 상품가치의 진정한 원천은 노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사실은 단순한 과학적 진리문제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상품의 물신 숭배는 내면관계를 보지 못하고 표면만 바라보는 객관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일찍부터 자본주의 붕괴를 부르짖고 노동자의 해방을 외친 것은 오직 노동자만을 위한 천국을 실현시키자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본가든 노동자든 한 인간 주체로서의 인간이 직접 노동하고 노동과 상품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상과 행동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오직 해석하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사회개혁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사회개혁에 의해서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각 개인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기에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을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소외시켜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를 전도시키고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궁극적인 소망이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러한 사회는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이자 동시에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이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Paris Commune, 1871, 3.18~5.28에 일어난 파리 노동자 봉기)에서 노동자 계급의 정부를 보았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영원한 사회적 노예화가 진행되는 한, 생산자는 결코 정치적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필히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파리코뮌은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지배하는 일종의 정부형태였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붕괴시키기까지만 임시과정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삶과 철학,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마르크스 사상의 궁극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참다운 행복이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노예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정치, 경제 현실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차이를 붕괴시키고 각자가 노동해서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으면서 어떤 구속이나 억압도 없이 주인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과학적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마지막 자본가까지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노동자가 되어 스스로 주인이 되기까지만 노동자의 독재가 필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과학적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형성되면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랐다. 일단 공산당 독재가 시작된 나라들에서는 공산당 독재가 임시과정이 아니라 불변하는 정치체제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공산당의 노동계급에 의해서 자본계급이 파괴되기는커녕 오히려 공산당원들이 또 하나의 사회특권층으로서 온갖 특혜를 누린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크스주의가 가져온 결과인데도 마르크스 자신은 정확히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 각자가 자기 힘으로 노동하여 노동산물을 자신이 소유함으로써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사회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기초인 생산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생산관계를 기초로 삼는 관념체계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꿈꾸던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는 불변하는 것으로 자리잡으리라고 믿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자기모순을 범한다. 어떤 특정한 사회를 노동자들이 지배한다고 하자. 원래 인간 자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노동자라고 해서 다 같은 노동자일 수는 없다. 노동자들 사이의 계급투쟁 역시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노동자들에 의한 공산당의 독재와 독재의 종식은 마르크스가 기대한 이상적 사회의 상태였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환상과 공상에 물든 종교와 관념철학을 붕괴시키고 물질적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간이 노동의 주인이 되는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목을 바꾸어서 마르크스 입장을 바라보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마르크스는 헤겔을 반대하고 관념이 아니라 감각이 참다운 대상을 알려준다고 믿는다. 즉 정신적 관념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이 참다운 물질 대상을 알려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감각, 경험, 물질, 생산관계, 노동 등은 모두 관념들이다. 물론 물질적 생산관계가 삶의 토대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유물론이다. 그러나 유물론이라는 단어가 관념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예수 이래로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신은 죽었다" 외치며 창조적 '힘에의 의지' 철학을 펼친 '초인' 니체
시와 음악에 뛰어난 니체, 25세에 대학교수가 되다! 청소년 시절의 니체는 음악 작곡과 시 창작에 천재적 소질을 보였고 종교적으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경에 대해 정통했으며, 경건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니체는 기독교와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은 프포르타에서 매우 수준 높은 논리학과 언어학 교육을 받게 되면서 이 교육 배경이 니체로 하여금 기독교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결정적인 이유는 니체의 우상이었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기독교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후일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허무주의의 산물로 인식했다.
니체는 라이프치히대학의 리츨 교수의 제안으로 언어학 모임인 '게르마니아'를 구성하고 이 소모임에서 매우 왕성한 연구활동을 함으로써 많은 지적 성과를 달성했다. 니체는 이 '게르마니아'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원천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성공적 연구의 결과로 대학이 제정한 학술상을 받게 되었고, 이 수상을 계기로 1869년 2월 바젤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면서, 바젤대학의 고전 언어학 객원교수가 되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우주의 원천을 바탕삼아서 창조적 인간, 곧 초인과 아울러 생동하는 긍정적 문명을 구성하려고 했다. 마르크스가 평등주의자였음에 비해 니체는 엘리트주의자였다. 마르크스나 니체 모두 종교를 근거로 삼은 환상 내지 상상의 문명을 거짓된 문명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관계를 기초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세우고자 했던 평등주의자였고, 니체는 왜소한 인간 곧 평균인을 전도(顚倒)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단하는 창조적 인간으로서의 초인(bermensch)을 부르짖던 엘리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
라이프치히 대학생활에서 니체의 두 우상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였다. 니체에게 바그너는 음악적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면, 쇼펜하우어는 니체의 영혼을 사로잡은 철학자였다. 니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 데에는 바그너의 역할이 크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니체의 우상이었던 바그너가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참다운 유일한 철학자로서 쇼펜하우어를 치켜세웠을 때 니체의 모든 신경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그너의 쇼펜하우어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니체가 우연히 헌 책방에서 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니체로 하여금 앞으로 예술가-철학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추겼을 뿐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면서 예술가-철학자로서 주옥같은 저술활동을 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넓은 의미로 쇼펜하우어 철학과 니체 철학을 모두 삶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을 '삶에의 의지'라고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수정하고 인간과 세계의 근원을 '힘에의 의지'라고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극복하고 미래의 철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주제는 표상과 의지와 구원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칸트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현상이고, 알 수는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근본 대상은 사물 자체, 곧 물자체(物自體)라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칸트의 이와 같은 이원적 입장을 정면으로 뒤집어엎는 사상이다. 예컨대 내가 있다고 하자. 감각이나 인식조건에 의해서 파악되는 '나'는 현상으로서의 '나'다. 그러나 나 자체는 감각이나 인식조건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를 직관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단지 세계의 피상적, 형식적인 모습이므로 그것의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