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페르시아 전쟁사

헤로도토스 지음 | 시그마북스
페르시아 전쟁사

헤로도토스 지음

시그마북스 / 2008년 8월 / 447쪽 / 16,000원

제1권 제국의 주인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와 메디아의 키루스

페르시아 전쟁의 최초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페르시아 학자들은 처음 전쟁을 유발한 장본인이 페르시아만과 그 주변에 살았던 페니키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중해로 이주해 살면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의 아르고스 성에서 장사를 하던 중에 물건을 고르던 그곳 여인들을 갑자기 배에 싣고 가버렸다. 그중에는 아르고스의 공주도 있었다. 이에 분노한 그리스의 크레타인들이 페니키아의 공주를 납치함으로써 복수극은 피차일반인 셈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그리스인들이 콜키스의 공주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양 지역 간의 납치극이 수차례 더 계속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지역 간의 악화된 감정이 페르시아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는 BC 1000년경, 북방 아리아인이 오늘날의 이란지역을 침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리아인은 이곳에서 부족을 이루어 살았고, 그 중 메디아와 페르시아가 가장 강성했다. 메디아인은 서북부로 진출해 신바빌론과 연합했고, 페르시아인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티그리스강 유역에 정착해 살았다. 그리고 BC 559년 메디아에 속해 있던 아케메네스족의 키루스 왕이 페르시아 열개 부족을 통일한 이후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제국이 되었다. 한편 그리스 문명의 기원은 에게(Agean) 문명으로, 전기 크레타문명과 후기 미케네문명으로 구분된다. 이 문명은 아케아인, 이오니아인, 에올리아인, 도리아인으로 이루어졌으며 BC 1000년경까지 부족공동체를 유지하다가 BC 8~9세기경부터 폴리스(Polis)를 형성하였다. 폴리스가 발전하여 형성된 도시국가들 중 가장 일찍 성장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로서 각기 독자적 정부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 지역들을 정복해 조공관계나 혹은 우호관계를 맺은 최초의 이방인이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였다.



리디아는 아시아의 서부에 있는 나라로 상업과 무역에 뛰어났으며 특히 사금이 다량 발견되면서 서양 최초로 화폐를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크로이소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지역을 점령해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리디아를 번성시켰다. 그의 통치 시절 신바빌론을 제외하면 리디아에 대적할 국가가 없고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오늘날 터키의 서부지역)는 각지에서 온 학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런데 메디아의 키루스 왕이 힘을 키워가자 크로이소스는 스파르타와 동맹관계를 맺고 카파도키아(시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이에 키루스의 군대가 강력하게 맞서 크로이소스는 일단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자 페르시아 군대가 리디아의 사르디스로 진군했고 성곽 부근에서 양측의 군대가 다시 맞서게 되었다. 크로이소스가 기마부대를 앞세우자 키루스는 낙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접전하기도 전에 리디아 진영에서 갑자기 동요가 일었다. 낙타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말들이 놀라 날뛴 것이다. 결국 리디아 군대는 성안으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고 2주 만에 페르시아 군에 완전히 함락되고 말았다.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는 더욱 세력을 팽창하여 BC 540년에는 동부이란 지역과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당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던 바빌론을 함락하면서 3천 년을 이어온 메소포타미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키루스 왕은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키루스 왕은 바빌론 함락으로 서쪽을 안정시키자 이번에는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카스피해 동쪽 광활한 초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마사게타이족을 먼저 쳐야 했다. 이들은 오랜 유목 생활을 한 덕분에 전투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대의 급습으로 많은 전사들이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포로 가운데는 마사게타이족의 통치자인 토미리스 여왕의 아들도 있었는데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버렸다. 이에 격분한 마사게타이족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자 키루스 왕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결국 키루스 왕은 이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토미리스 여왕은 그의 머리를 피가 가득 찬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녔다고 한다.



제2권 나일강의 선물



번성한 제국

바빌론과 더불어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국가가 이집트였다. 이집트의 역사는 나일강에서 기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요와 문명, 경제적 번영과 강대한 권력 모두 나일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집트는 워낙 토질이 비옥해서 특별히 노동을 하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나일강이 범람하면 저절로 관개가 이루어졌는데 강물이 빠져나가면 씨앗을 뿌리고 돼지가 그 위를 밟게 한 후 수확을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풍요를 바탕으로 이집트는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으며, 당대 사람들의 지혜는 모두 고스란히 문화유산으로 남겨졌다. 웅장한 건축물과 다양한 문자뿐만 아니라 과학과 수학 또한 발달하여 세계 최초로 별자리와 태양을 이용해 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밖에 신(神) 12명의 이름을 처음 정하고 최초로 신전과 제단을 건설했는데, 그리스의 신화도 대부분 이집트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이집트인은 최초로 종교 규율을 정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가축을 신성하게 생각하여 동물마다 전문 사육사를 지정하고 소원을 빌 때는 각 신에 속하는 동물을 찾아 기원했다. 특히 소는 신의 소유로 여겨 제물로 바쳤는데, 암소는 이시스 여신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어떠한 경우에도 도살할 수 없었다. 한편 돼지는 청결하지 않은 동물로 여겨져 길에서 돼지와 부딪치기라도 하면 곧바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돼지 사육사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도 않았다. 이집트에서 가장 재미있는 동물은 고양이다. 이집트에서는 화재가 나도 아무도 불을 끄려고 하지 않는다. 집안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지키기는 데 혈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양이가 죽으면 모든 가족이 눈썹을 밀고, 죽은 고양이를 미라로 만들어 지정된 매장소에 묻는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을 믿었다. 그래서 미라를 제작하고 화려한 무덤에 안치해 보관했는데 이러한 내세관은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에서는 가족 중에 어른이 죽으면 상반신을 드러낸 후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슴을 치고 통곡한다. 이렇게 애도하는 것이 끝나면 미라 제조 기술자에게 시체를 맡긴다. 미라 제조는 가격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뉘는데 그중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최상위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콧구멍에 특수 제작된 갈고리를 넣어 뇌수를 꺼내 약품으로 뇌를 씻어준다. 그러고 나서 배에 구멍을 내 오장육부를 꺼내 야자수와 빻은 향료를 넣어 뱃속을 청소하고 뱃속에 몰약과 계피, 유향 등 향료를 채워 넣고 봉합한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면 천연 소다에 시체를 70일간 넣어두는데 이렇게 하면 근육이 용해되어 뼈와 피부만 남게 된다. 그리고 70일이 지나면 시체를 다시 한 번 씻기고 품질 좋은 아마포로 온몸을 싸맨 후 그 위에 고무를 바른다. 그리고 사람 형태의 목관에 넣고 묘실 벽에 똑바로 세워 안치한다.



이집트는 초대 파라오 민왕에서부터 모두 341명의 왕이 있었다고 한다. 3세대를 대략 100년으로 계산하면 약 11,340년 동안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왕 세토스가 무사 계급을 냉대하여 무사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열두 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 통치되게 되었다. 통치권을 장악한 12명의 장군은 이집트의 미래에 대해 신탁을 청했는데 '앞으로 청동 술잔에 술을 바치는 자가 이집트의 제왕이 될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데 술잔 하나가 부족했다. 마지막 차례였던 프사메티코스는 급한 김에 쓰고 있던 청동 투구를 벗어 술잔을 대신했다. 신탁을 떠올린 장수들이 프사메티코스를 소택지로 추방해버리지만 결국 권좌를 차지하여 54년 동안이나 이집트를 통치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잇다가 5대에 이르러 반란군들에 의해 추대된 평민 출신 아마시스가 왕위를 잇게 된다. 아마시스는 이집트 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해 2만 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를 통치했다.



제3권 왕 중의 왕



키루스 왕은 수많은 국가를 정복하면서도 현지의 문화와 관습을 최대한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 덕분에 페르시아는 다양한 부족을 통합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루스의 뒤를 이은 아들 캄비세스는 정복국의 문화를 짓밟는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는 에디오피아 원정에 실패하자 정복국인 이집트에서 화풀이를 했다.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암소 아피스를 칼로 찌르고 축제에 참석한 주민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또한 신전에 들어가 신상을 불태워버리고 작은 죄를 빌미로 귀족들을 땅에 거꾸로 묻기도 했다. 캄비세스의 만행은 자신의 혈육에게도 가해졌다. 그는 자신의 친동생 바르디아 왕자가 왕위를 찬탈할 것으로 여기고 암살했다. 이를 왕비가 안타깝게 여기자 그녀도 살해해버렸는데 그녀는 자신의 친누이이기도 했다. 이렇듯 캄비세스가 점점 미쳐가듯 만행을 저지르자 내부에서 모반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캄비세스 왕가의 재산을 담당하는 마구스 계급의 두 형제는 캄비세스의 재산을 빼돌렸다. 그런데 형제 중 동생은 캄비세스가 죽인 친동생 바르디아와 이름이 같았고 생김새도 비슷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마구스의 바르디아는 형벌에 의해 한쪽 귀가 잘리고 없다는 점이었다. 마구스의 형은 동생을 바르디아 왕자로 내세워 시리아에서 왕으로 옹립했다. 얼마 후 캄비세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마구스 바르디아가 페르시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민심을 얻기 위해 병역과 납세를 면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지만 성 밖 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각 도시국가의 대신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바르디아는 캄비세스의 비(妃)들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중에는 귀족 오타네스의 딸도 있었다. 의심을 가진 오타네스가 딸에게 왕의 귀를 살펴보게 하니 그의 귀가 없다고 알렸다. 오타네스는 곧 귀족 여섯 명을 모아 가짜 왕을 몰아내기로 했는데 그중에는 히스타스페스 총독의 아들 다리우스도 있었다.



BC 552년, 마구스의 형제를 처단한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여 앞일을 의논했다. 오타네스는 반드시 독재를 중단하고 대중의 권리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두정치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무례하고 충동적인 대중에게 많은 권력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다리우스의 의견은 또 달랐다. 그는 과두정치를 하느니 차라리 독재를 견지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뛰어난 통치자라면 백성의 삶을 부유하게 할 것이고, 적을 상대로 계책을 세울 때도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가 훨씬 적을 것이라는 거였다. 결국 다리우스의 의견이 채택되고 한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다음날 일출 후 가장 먼저 우는 말의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이었다. 다리우스에게는 매우 총명한 마부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다리우스는 마부를 불러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고 "너라면 방법을 알 것 같구나"라고 얘기했다. 마부는 빙그레 웃더니 다리우스의 말을 끌고 성 외곽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다리우스의 말이 평소 무척 좋아하는 암말이 묶여 있었다. 다음날 새벽, 다리우스와 여섯 명이 교외로 말을 타고 나갔을 때, 지난 밤 암말을 묶어 두었던 자리가 점점 가까워 오자 다리우스의 말이 갑자기 울어댔다. 게다가 때마침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쳤다. 그러자 다섯 명은 말에서 내려 다리우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해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국왕이 되었다.



제5권, 6권 다리우스의 창끝이 가리킨 곳



이오니아의 난

다리우스 재위시절 페르시아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보유했다. 그런데 BC 500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아오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갑자기 독립을 선언했다. 그 중심에는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페르시아를 상대하기에 무리라고 생각하고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파르타 는 원정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자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네 민회에 출석해 출정 이유와 승리할 경우 얻을 재정적 이익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의 지원 함선이 밀레토스에 속속 도착했다. 이렇게 결집된 이오니아군은 먼저 리디아의 사르디스를 제압했다. 하지만 이오니아군의 한 병사가 사르디스의 가옥에 불을 지르면서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르디스의 집들은 대부분 마른 갈대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에 불은 삽시간에 시내 전체로 퍼졌고 결국 키벨레 신전까지 태워버린 것이다.



다리우스 왕은 사르디스에서 일어났던 소식을 보고받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미 페르시아의 속국인 이오니아는 반란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아테네라는 국가가 반란에 동참한 것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다리우스는 시종에게 하루에 세 번 아테네를 잊지 말라는 경고를 해주도록 했다. 그리고 사령관들을 임명하여 그리스로 출정하도록 했다. 페르시아는 밀레토스에 전에 없는 철저한 응징을 내렸다. 밀레토스의 모든 남자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페르시아 본토로 끌고 갔다. 밀레토스는 이오니아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로, 역사상 최초로 철학 학파를 탄생시켜 '이오니아의 꽃'으로 불렸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다리우스는 매일 복수를 다짐했던 아테네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기병이 행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라톤 지역에 진을 쳤다.





마라톤 전투

아테네의 전투 대형은 날개를 활짝 편 새와 같았다. 적의 진영을 충분히 감쌀 수 있도록 중앙부에는 열(列)을 몇 개만 배치하고 양 날개 쪽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날개의 선두는 군사 장관이 지휘를 맡고, 다음으로 각 부족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진은 열이 열 겹으로 이루어졌다. 제일 앞 열에는 2미터에 달하는 장창과 방패를 든 군사들이 배치되었고, 그 뒤를 따르는 군사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활과 초승달 모양의 검을 지녔다. 전투가 시작되면 제1열이 적의 기병을 막고 나머지 아홉 겹의 열이 적에게 화살을 퍼붓는데 제2열이 먼저 적을 향해 활을 쏘면 나머지 여덟 겹은 조금 후퇴해 45도 각도 허공으로 활을 쏘아 올렸다. 적에게 화살 비도 치명적이었지만 이로 인해 적이 교란되면 모두 검을 꺼내들어 적진으로 돌격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는 이러한 전투 형식에 맞춰 아테네 군과 1.4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 진영의 뒤는 바다였다.



아테네 군사들은 무기를 등 뒤에 감추고 점점 속도를 빨리해 페르시아 진영으로 돌진해왔다. 기병도, 궁수도 없이 오직 보병만 돌진해오는 아테네군사를 보고 페르시아 군사들은 그들이 멸망을 자초한다고 생각하며 여느 때처럼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적은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스 군이 순식간에 페르시아의 장창 부대를 뚫고 대열 안쪽으로 파고들자, 페르시아군의 양 날개가 붕괴되면서 완전히 포위당한 형세가 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철수 명령을 내리고 뒤쪽 바다에 정박해 둔 함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아테네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 군을 계속 추격해 적선 일곱 척을 나포했지만 나머지 함대는 재빨리 도망쳤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군 사망자 수는 모두 6,400명에 이르렀고,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