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 2007년 11월 / 393쪽 / 13,000원
갑신정변의 유산갑신정변의 유산 하나는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이다.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 시 수구파의 실력자인 민영익은 칼을 맞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이때 민영익의 치료를 맡은 사람이 의료선교사 알렌이었다. 알렌은 여기서 실패하는 날에는 한국에서의 선교가 영원히 끝장날 수도 있다는 압박을 받고 기도하면서 민영익을 수술했다. 민경배는 "이 극적인 장면"을 "과학과 기독교 그리고 미국의 이상이 한국에 그 피와 골수 속에서 새 활력을 환기시키는 역사의 동력으로 환영받기 시작한 때의 모습"으로 보면서 한국 근대사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묵시록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 의미는 근대사를 넘어서 먼 훗날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이때가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알렌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알렌은 1884년 9월부터 미국공사관 폐쇄로 서울을 떠날 때까지 처음 5년간은 의료선교사, 이어 7년간은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마지막 8년간은 공사로 지내게 된다.
갑신정변의 또 하나의 유산은 한성조약과 톈진조약이다. 갑신정변은 한일 간의 외교문제이기도 했다.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를 선두로 2개 대대의 병력과 일곱 척의 군함을 즉각 동원하여 갑신정변 때 일본공관이 소실되고 일본인이 사상(死傷)을 당한 것에 대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피해보상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피해보상을 하라니 한마디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 서울에서 한일 간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다. 그 주요 내용은 일본에 대한 사죄, 배상금 지불, 공사관의 부지 제공 등 굴욕적인 것이었다.
갑신정변은 청일 간의 문제이기도 했다. 1885년 4월 청(이홍장)과 일본(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으로부터 모두 철수할 것과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통고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톈진조약은 일본이 청나라와 정면으로 충돌할 경우 아직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타협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2개 중대 병력으로 2500여 명의 청나라 군대를 철수시켰고 언제든지 조선 문제에 다시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문서로 보장받은 일본 측이 사실상 승리한 외교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에서 청의 우월권은 사라졌고 일본은 청과 대등한 관계로 조선을 넘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청이 더 큰 힘을 쓰고 있었다. 조선을 먹잇감으로 삼는 열강들의 이해득실을 따져야 하는 건 서글픈 일이지만 이는 개화기 내내 지속되는 조선의 처지였다. 어느 쪽의 입지가 더 강해졌느냐에 따라 국내 정치마저 큰 영향을 받는 상황이 한 세대 기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 '기회주의'는 그 누구도 비난하기 어려운 처세술의 기본이 되어갔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개신교의 활약, 거문도 사건 알렌에 이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장로교 목사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이름 원두우 1859~1916)와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일본 상선 미쓰비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에 상륙했다. 미국을 출발한 지 5개월 만이었다. 함태경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은 한국기독교사에서 영원히 기억돼야 할 역사적인 날"이라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들 서구 선교사의 의료 및 교육 선교를 통해 서양 문화와 기독교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고 했다.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의 조선인 집을 사들여 내실의 방 하나를 지성소로 꾸며 첫 예배처로 삼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정동예배처'로, 나중에 한국감리교와 정동제일교회의 태동지가 되었다. 또 이곳에서 한국선교회가 창시됐으며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의료 선교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은 시의(侍醫) 자격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해 고종황제에게 병원 설립을 요청해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원이 바로 1885년 4월 10일 문을 연 광혜원이었다. 광혜원은 4월 26일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제중원(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오늘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뿌리가 되었다. 제중원은 갑신정변 때 개화파 인물로 타살당한 홍영식의 재동 집을 수리해서 만든 것이었다. 알렌은 훗날 "우리가 그 집을 인수했을 때는 방마다 핏자국이 있었다. 그 집을 잘 수리했더니 환자들이 수백 명씩 몰려왔고 최초의 한 해 동안에 1만 명 이상을 치료했다"고 썼다.
조선의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사들은 속속 서울로 들어와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2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기에 이들 사이에는 치열한 갈등과 싸움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각자의 선교관도 달랐고 조선 정치권과 연계되는 바람에 그쪽의 정파 싸움이 그대로 선교사들 내부에 옮겨온 점도 있었다.
한편 거문도 점령에 의한 각축전(청·러시아·영국)을 살펴보자. 조선은 청의 압력이 점차 심해지자 청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 찾던 와중에 러시아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5년 양국은, 러시아가 영흥만을 조차하는(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 대가로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담당하게 한다는 소위 조러밀약을 모색했다. 그러나 세계 전략 차원에서 러시아에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방해를 함으로써 이 방안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영국의 방해공작은 '거문도 사건'으로 나타났다. 1885년 5월 15일 영국 함대는 '동양의 지브랄터'라고 할 만큼 요충지인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를 점령하고는 포대를 쌓아 요새화했다. 영국은 점령 사실을 청과 일본에는 즉시 통고한 반면 조선 정부에는 한 달이 지나서야 알렸다. 그것도 청국 정부를 통해 한국에 통보함으로써 청의 대한(對韓) 종주권을 인정해준 것이다. 조선 정부는 외교 고문(묄렌도르프)을 거문도에 보내 항의했지만 무시당했다.
청은 1885년 11월 7일 조선에 주재하는 청의 대표 진수당을 원세개로 교체하면서 원세개를 조선의 감국(監國), 즉 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으로 임명했다. 원세개는 외교관의 특권을 이용하여 인삼을 밀수함으로써 엄청난 치부를 했고 인사(人事)에도 간여했다. 원세개는 '조러밀약 사건' 이후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오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러시아가 조선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속이고 있으니 조선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란 오직 '상국(上國)'뿐이다. 조선은 못 쓰게 된 배와 같고 병이 골수에 들었으니 위안스카이(원세개)는 배 만드는 장인의 임무로 조선을 위해 탄식하며 훌륭한 의사로서 반드시 좋은 약을 보내줄 것이다." 러시아는 영국이 철퇴한 후라도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 지 22개월 만인 1887년 2월 27일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조선에겐 큰 충격이었다. 조선은 앞으로 서양의 저 사나운 오랑캐들의 불법적인 공격과 점령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유길준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보고 '중립론'(1885)을 작성하여 조선의 당면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안한 것도 바로 그런 불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중립화론은 햇빛을 보지 못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정치학 논문'이라는 기록만 남기고 말았다. 훗날의 역사가 말해주지만 조선이 처해있는 독특한 지정학적 상황에선 중립국화도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조선의 문제는 힘 이전에 그런 문제의식조차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으로 <한성주보>의 창간을 들 수 있다. 갑신정변 뒤 권력을 주도한 민씨 척족 정권은 그 동안 정부가 펼쳐왔던 개화정책을 중단시키고 억압했지만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 시무개화파(여기서 시무(時務)란 '곧 당시(時)에 당연히 힘써야 될 일(務)'을 뜻하는 것으로 온건개화파를 일컬음)가 정변 뒤 청국의 후원을 받아 정부의 요직을 점하면서 민씨 척족세력의 권력독점에 제동을 가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의도하던 개혁을 조심스레 펼쳐나갔다. 그런 개혁 가운데 하나가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한성순보: 개화파의 아성으로 여겨져 갑신정변의 희생물이 됨>가 폐간된 지 14개월 만인 1886년 1월 25일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으니 그게 바로 <한성주보>다.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의 국민계몽사상을 이어받긴 했지만 근대 신문을 개화의 무기로 사용하려던 개화파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봉건 군주에 충성하는 것을 우선시한 보수적 성격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동시에 진전된 의식을 보여준 것도 있었다. 산업의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과 현실적인 세계정세관을 보여준 것을 꼽을 수 있다. 서구 열강의 침략적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성주보>의 수명은 2년 6개월을 넘지 못했다. 경영난과 더불어 당시 민씨 일파와 수구파로 구성된 조정은 위축되어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려던 여러 제도마저 없애게 되었다. 1888년 <한성주보>가 사라지면서 조선은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까지 약 8년간 근대적 신문을 갖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근대교육을 평가함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건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1885년 11월 아펜젤러는 조선주재 미국대리공사 폴크(George Foulk)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 배재란 당시에 흔히 쓰이던 배양인재(培養人才)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는 교명까지 하사받았다. 배재학당은 1887년 3월에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교사(校舍)를 신축했는데 그 비용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보낸 4000달러로 충당했다. 아펜젤러는 이 새 교사의 반지하실에 산업부를 두어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첫 연례보고서(1888~1889)에서 "배재학당의 목적은 조선 학생들에게 서구의 과학과 문화, 교육과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현재의 조선의 학교체제의 본질적인 특성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 목적에 따라서 비록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를 전달매체로 삼고 있으나 중국 고전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중국 고전과목을 공부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기는 1880년대에 들어서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1887년 4월 경복궁의 건천궁(왕의 침전)에 처음으로 100촉짜리 전구 두 개가 점등되었다. 이는 경복궁 전체에 750개의 16촉짜리 전등을 설치하고 이에 필요한 발전설비를 갖추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김인숙의 글에는 점등식의 경험이 실감나게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대신들이 모여 잠시 후에 벌어질 '천지개벽'의 순간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곧 향원정 연못의 한가운데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우렛소리 같은 게 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봄밤이 눈부신 대낮으로 밝았다. 입을 벌린 채 허공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모습 위로 더 이상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출 수가 없게된 봄꽃들이 축제의 한순간처럼 꽃잎을 흔든다. (중략) 그러나 이 놀라운 빛이 어디로부터 건너와 무엇을 밝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첨단의 전등이 밝혀졌어도 난세는 여전히 그늘 속에 있었다."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 늘 새로운 문물이 문제였다. 1886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만연해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팔 시간도 없을 만큼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어나갔다. 죽어가는 환자들은 길이나 수구문 밖에 내버려졌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버려진 환자들을 병원에 데려와 치료해 생명을 건져내기도 했다. 이는 엉뚱하게도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사진약(사진기의 재료)을 만든다는 유언비어로 날조되어 퍼져나갔다. 유언비어는 1888년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제중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외국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약을 쓰기 위해서이고 제중원이 그것의 총본산"이라는 내용이었다. 서양인들이 아이를 훔쳐다가 솥에 삶아 먹을 뿐만 아니라 부인을 잡아다가 젖가슴을 베어간다는 이야기마저 해외로 퍼져나갔다. 가마꾼들이 제중원 의사의 탑승을 거부하고 성난 군중이 선교사 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가 유언비어가 사실무근임을 밝히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인천에 있던 프랑스·미국·러시아 함대 군인들이 서울에 입성해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써 보름 만에 진정되었다. 그러나 사진과 관련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는 미국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의 금융업자들로 하여금 조선을 완전한 미개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광산개발투자와 차관교섭이 중단되게 만들었다.
근대화는 조선을 '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 나아가게 했다. 그 원인이 된 것은 1880년대 후반,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와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로 인한 민생고 때문이었다. 당시 부정부패는 고위층에서부터 하위층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른바 양반들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동기자체가 문제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타국의 설관(設官)은 국무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 설관은 직업이 없는 무리(양반)를 구양(求養)코자 하는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개탄했겠는가. "(중략) 관직을 얻으면 살게 되는 것이요 얻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아첨을 그치지 아니하고 이름을 손상시키고 법을 해치며 수단을 가리지 아니한다. 구하는 자의 수는 관원보다 많아서 시국을 뒤엎거나 타인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사정이 그러하니 벼슬을 원하는 자들 간에 각자 목숨 거는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와 함께 민중에겐 또 하나의 '도적떼'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었다. 중간에서 일반 민중만 죽어가는 형국이었다. 조선에도 문제는 있었으니 그건 세계는 물론 일본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는 점이다. 1896년까지도 학부대신 신기선은 서양인들을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야수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였다. 조선 양반들의 주된 관심은 늘 서열이었다. 물론 서열 투쟁과 무관하게 지식을 많이 쌓은 선비도 많았지만 나라를 지키고 민생을 돕는 데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만 붙들고 늘어진 게 문제였다.
일본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높아진 조선 민중의 반일(反日)정서는 갈 길을 몰라 헤매다가 기독교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박정신은 "비서양,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이 '적'으로 뚜렷이 등장하는 역사적 전개는 개혁적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일본을 통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을 의지해서 나라를 개혁하려는 이전의 생각을 송두리째 저버리게 하였다"고 설명했다.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길 없는 '민족공동체'에서 보호와 위로가 주어지는 '교회공동체'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