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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 스토리

알렉산더 워커 지음 | 북북서
오드리 헵번 스토리

알렉산더 워커 지음

북북서 / 2008년 9월 / 550쪽 / 19,800원



가족사에 얽힌 비밀


오드리 헵번은 평생 자신의 유년시절을 숨기려고 애썼다. 아버지의 배경과 그로 인해 겪은 비극 때문이었다. 사실 오드리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 조셉 빅터 안톤 헵번 러스턴은 진실을 숨기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존 조셉 러스턴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벨기에의 선박회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였다. 그런데 회사 사장이 죽자 그 미망인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이사벨라는 자신이 메리 스튜어트의 두 번째 남편 존 헵번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시 돈 많은 오스트리아 여성과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둘 사이에는 네 아이가 있었는데 이들은 속물적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들은 생모 대신 이사벨라 헵번을 자신들의 친어머니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멀게나마 왕가와의 인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셉 러스턴은 헵번 러스턴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헵번 러스턴이 사용할 자격이 없는 이름 '헵번'은 딸 오드리가 사용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조셉 러스턴은 여러 면에서 불투명했다. 그는 매력적인 용모와 화려한 말재간으로 사교클럽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또한 숫자에 강한 재능을 이용하여 국제투자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남태평양과 동인도 제도에서 벌인 사업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무렵 그는 1년 동안 자바의 명예 영사로 재직하다 해직되었는데, 이때 오드리의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오드리의 엄마 엘라 반 힘스트라는 남작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네덜란드의 귀족 태생이었다. 1920년대 초 러스턴을 만났을 때 그녀는 신혼여행 중이었다. 엘라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젊은 귀족과 결혼했고 수리남에 총독으로 파견되어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러스턴을 알게 되었다. 이때 러스턴은 부인과의 이혼을 고려 중인 상태였다. 엘라는 네덜란드로 돌아왔으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지만 이혼을 선택하고 러스턴이 있는 자카르타로 갔다. 그리고 1926년 9월 7일 결혼식을 올렸다.

엘라와 러스턴은 벨기에의 브뤼셀에 정착했다. 그리고 1929년 5월 4일 오드리가 태어났다. 조셉 러스턴은 브뤼셀에서 영국은행의 지점장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영국은행의 지점은 없었다. 이에 대한 의문은 그의 의심스런 활동과 결부된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을 지원하는 정보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점은 그가 점점 파시즘과 결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스턴 부부는 점점 우익 성향의 정치 철학에 빠져들었다. 엘라에게는 먼 유대인 친척도 있었으나 초기 히틀러의 사상은 자신의 가족이 속했던 지주와 귀족 계급에게 먹혀들고 있었다. 엘라와 러스턴은 둘 다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주 다퉜다. 오드리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커지면 식탁 밑으로 숨은 적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이런 경험은 오드리가 결코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절제력이 강한 사람이 되게 했다.



오드리에게 부모의 다툼보다 더 큰 두려움은 이혼이었다. 1935년쯤 엘라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온 날,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과 오드리의 유모 그리고 남편이 함께 침대 위에 있었다. 이 남자를 선택하기 위해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고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던 엘라의 낭만적인 기질은 환멸감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부부간에 격렬한 고성과 몸싸움이 지나간 후에 헵번 러스턴은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오드리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이후 조셉 러스턴은 나치당과 관련된 일에 본격적으로 임하다가 1940년 7월 체포되어 5년 동안 수감생활에 처하게 되었다.



춤추는 작은 아가씨

엘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네덜란드의 아름헴에 있는 가족의 영지로 갔다. 오드리는 이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39년 오드리의 열 번째 생일 바로 전에 전쟁이 발발했다. 반 힘스트라 집안은 독일군에게 재산을 몰수당했고 엄마는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드리의 이복 오빠 중 한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하지만 오드리의 발레 수업을 계속되었다. 엘라는 카드브리지를 가르쳐 번 돈으로 오드리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집회금지와 등화관제 등의 규제로 오드리의 발레 수업도 중단되었다. 오드리는 밤이면 등화관제 커튼 뒤에서 다 떨어진 발레 슈즈 대신 슬리퍼를 신고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모자를 벗어 거둔 돈의 일부는 생활비에 보태졌고 나머지는 레지스탕스의 자금으로 지원되었다. "나는 거의 진정한 어린이가 아니었어요." 그 시절에 대한 그녀의 결론이다. 오드리는 친구도 거의 없었고 십대에서 흔히 일어나는 즐거운 일도 없었고 안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기차역에서 화물 기차에 실려가는 유대인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오드리 또래의 아이들도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전쟁은 점점 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할머니, 삼촌, 숙모까지 한집에서 살게 되면서 하루를 한 끼 식사로 연명해야 했다. 게다가 판사였던 삼촌이 게슈타포에 연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연합군의 공격이 있고 난 후 보복의 표시로 처형되었다. 1944년 9월,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독일군의 가혹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오드리 가족은 폭격을 피해 떠나는 10만 명의 피난 행렬에 합류했다. 그중 3천 명이 탈수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오드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아른헴에서 멀지 않은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곧 온갖 종류의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몰려와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오드리는 먹을 것을 찾아 아른헴으로 갔다가 폭격이 심해져 몇 주 동안이나 지하실에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거의 기다시피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빈혈과 부종에 황달까지 앓고 있었다. 이때부터 오드리는 길고도 지독한 병마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녀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묘하고도 감동적인 인과응보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쟁 전에 엘라에게는 마이클 번이라는 영국군 장교 친구가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연락이 끊겼고 마이클은 해군특공작전 중에 포로가 되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엘라는 영화 속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독일이 만든 선전 뉴스 속에서 독일군에 붙잡혀 가는 마이클을 보게 된 것이다. 엘라는 너무 흥분해서 옆에 앉은 독일군 장교에게 "저 사람은 마이클이에요!"라고 영어로 말했다. 그날 밤 엘라는 영화관으로 몰래 들어가서 번이 등장하는 장면을 잘라내 적십자사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마이클은 음식물이 담긴 소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온 마이클에게 엘라는 중병에 걸린 오드리를 위해 페니실린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페니실린은 고가의 신약이었다. 마이클은 생각 끝에 몇 천 개비나 되는 담배를 보내주었고 엘라는 그것을 암시장에서 팔아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드리는 훗날 기자회견 중에 '전쟁 기간이 어떠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해방은 영국 담배 냄새가 난다"고 말하곤 했다. 마이클 번이 보내준 영국담배 덕분에 얻은 그녀의 소중한 해방을 의미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충고

오드리는 엄마로부터 엄격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훈련은 불가능은 없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력으로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의 키였다. 열여섯 살이 되자 그녀의 키는 5피트 7인치(거의 170센티미터)나 자라서 발레를 하기에는 너무 컸다. 당시 오드리는 지도 선생님의 추천으로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 학교인 램버트 학교의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는 것과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차이는 달랐다. 오드리는 최고의 발레리나와 자신의 실력을 비교했고 프리마돈나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드리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녀는 모자 판매 회사의 모델 일을 하거나 여행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이트클럽 시로스에서 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재즈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점점 쇼 비즈니스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순회공연을 떠나는 것과, 뮤지컬 코미디에 응모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그녀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히트작 『하이 버튼 슈즈』(1948)의 오디션을 선택했다. 그리고 3천 명의 응모자 가운데 최종 선발된 열 명에 포함되었다.



오드리는 『소스 타타르』(1949)라는 뮤지컬 코미디에서도 배역을 맡았다. 오드리는 이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이 여자 배우에게 필요한 곡선미와 풍만한 가슴이 없는 것을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걱정했다. 양말을 돌돌 말아서 가슴속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소스 타타르』를 제작한 세실 란도는 양말을 옷 속에 넣었든 안 넣었든 오드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교계 전문 사진작가에게 오드리를 보내 잡지에 실릴 사진을 찍도록 했다. 이로 인해 오드리는 화장품 광고 사진도 찍었으며 반나절 일한 대가로 4파운드를 받았다. 그리고 란도는 25파운드를 챙겼다. 란도는 『소스 타타르』가 공연 중일 때도 오드리에게 일을 시켰다. 그로 인해 오드리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시로스 카바레에 가서 쇼를 두 개나 더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어린이를 위한 쇼를 하느라 일주일에 여덟 번씩 낮 공연도 해야 했다.



1950년 새해가 되자 『소스 타타르』의 속편 『소스 피칸테』가 막을 올렸다. 이 연극은 실패했지만 그녀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세실 란도는 『소스 피칸테』로 손해 본 것을 만회하기 위해 순회공연을 준비했다. 하지만 순회공연 역시 망했고 오드리는 비로소 란도를 떠나 영화에서 단역을 맡게 되었다. 담배 파는 소녀 역할이었는데 출연 시간은 20초였으나 영화주간지 《시네마》에 '곧 대단한 스타가 될 것'이라는 기사와 함께 실렸다. 하지만 얼마 후 오드리 헵번은 가장 값비싼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영국의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인 어소시에이티브 브리티시사와 장기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단역에만 출연해오던 오드리는 일주일에 12파운드와 1년에 한 작품을 보장하는 조건이 감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중한 경리들이었다. 그들에게 오드리는 자신들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회사를 흑자로 만들어주는 돈벼락이 되었다.

1951년 5월, 오드리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연극 『지지』(1951)의 주인공 역을 제의받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파라마운트에서 『로마의 휴일』의 공주역도 제안받았다. 파라마운트는 브리티시와 달리 스타를 키우는 회사였다. 그들은 오드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브리티시 측에 7편의 영화에 출연시키는 대가로 거액을 지불했다. 그들의 추측은 맞아 떨어졌다. 1953년 8월 말, 『로마의 휴일』이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 개봉되자 세계가 오드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로마의 휴일』에 앞서 무대에 올랐던 『지지』또한 성공적이었다. 연극이 개봉되자 각 잡지는 그녀에게 호평을 쏟아냈다. 그중 한 기사의 예를 들면 "그녀는 우유와 채소만 먹고 자란 소녀 같다"고 표현했다.



그녀 인생의 남자들

영화를 찍는 동안 오드리는 한 남자를 사귀었다. 제임스 한손은 삼십대를 목전에 둔 세련된 남자로서 영국 북부 명문가의 상속자였다. 만약 오드리가 브리티시와 영화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그를 만났더라면 그녀는 남자의 재산과 신분을 보고 결혼한 여배우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드리의 운명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결혼날짜까지 잡았으나 『로마의 휴일』과 『지지』의 일정으로 인해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로마의 휴일』의 일정 초과로 오드리는 영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사실 오드리는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을 하면 아내의 역할에 충실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브리티시사와의 계약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스타였다. 그녀는 한 남자를 위해 자기 일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1954년 오드리는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통해 오드리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친밀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디자이너 유베르 드 지방시였다. 지방시는 오드리보다 두 살 정도 많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키가 6피트 6인치나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긍심이 강해서 누구도 자기 체형의 결점을 숨기기 위해 디자인을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파리의 살롱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지방시는 체크 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은 그녀를 보고 자신의 스케치북에서나 볼 수 있는 깔끔한 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랐다. 또한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생 친구로 지냈으며, 지방시는 감독들만큼이나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53년 여름, 오드리는 파리에서 『릴리』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녀는 그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 세 번이나 파리로 돌아갔을 정도였는데 자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여주인공 레슬리 캐론의 연기와 용모에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드리가 그 영화에 집착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남자 주인공 멜 퍼러 때문이었다. 이 마르고 잘생긴 배우는 오드리에게 그녀가 어린 시절 탐독했던 동화 속의 왕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를 실제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1953년 여름 로마의 휴일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그레고리 펙이 그를 소개했다. 멜은 서른다섯 살로 오드리보다 열두 살 연상이었다. 그는 동화 작가이며 연극, 영화, 라디오 프로그램의 감독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가 이혼했는데 최근 첫 번째 부인과 다시 결혼했다. 오드리를 만났을 때는 세 번째 결혼에서 빠져나오려던 참이었다. 더욱이 연극 『온디네』에 함께 출연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남편과 아내

1954년 3월 25일, 오드리는 온디네 요정 의상을 그대로 입고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오드리는 토니상도 수상하게 되면서 미국에서 주는 주요한 상을 모두 다 받았다(영국에서도 몇 개 받았다). 그리고 1954년 6월 멜 퍼러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몇몇 지인들만을 초대하여 비밀 결혼식을 올렸는데 손님 중에는 오드리의 새 매니저 커트 프링스도 참석했다. 멜이 소개한 그는 독일 권투선수 출신으로 링 위에서 보여준 호전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출연료 협상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커트 프링스의 능력으로 오드리는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멜이 오드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멜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함께 주연을 맡은 『전쟁과 평화』의 촬영 도중 멜은 오드리에게 간혹 소리를 질렀고 오드리는 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감독을 맡았던 킹 비도는 멜이 그녀의 월급을 개인적으로 수금했다고 고백했다. 멜은 오드리와 결혼한 후 6개월 만에 그녀의 출연료를 스물네 배나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돈은 그가 사용함으로써 오드리에 대한 '보호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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