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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 394쪽 / 13,000원

제1장 천주교 박해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충돌은 바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그 대응은 박해로 나타났다.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는데,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17세기경 조선에 소개된 천주학은 당시엔 종교라기보다는 서양 문물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래서 서학(西學)이라 불린 천주학은 18세기 후반 영조 말엽부터 종교화되기 시작했으며 주로 실학자들이 신앙운동에 앞장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권철신 · 정약용 · 이벽 · 이승훈 등이 있었으며, 이중 이승훈은 1784년 최초로 조선 땅에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하지만 이승훈과 더불어 초기 천주교도들은 훗날 신유박해의 참화로 모두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정조는 공식적으로는 천주학을 사학(邪學)이라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지만 탄압보다는 교화주의를 추구했었다. 다시 말해서 유교, 즉 정학을 분명히 하면 사학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의 의식이 전통적인 성리학적 유교주의에 위배됨으로써 조정은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는 데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다. 조선은 예로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해온 나라다. 그런데 1791년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 고을의 양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도 드리지 않고 장례를 치른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이 이를 옹호하고 나서자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이것이 '신해박해'다. 이때의 사건은 양반 신자들이 대부분 동요하여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왕만 바뀌면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정조가 세상을 뜨고 열한 살 먹은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정순대비는 노론벽파의 거두로서 정치적 반대파인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다. 이 참화로 300여 명이 처형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 정약용도 척족들을 잃는 참화를 겪고 그 자신은 18년 동안 유배에 처하게 된다. 순조 이후에도 '천주교'는 당쟁의 도구가 되었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재위 1834~1849)의 생모가 풍양 조씨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와 세력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천주교를 대상으로 기해박해(1839~1841)가 일어났다. 이때 처형된 사람 중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에 체포되어 스물여섯의 나이로 순교했는데, 이를 병오박해라고도 하나 기해박해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이렇듯 조선 내부에서 천주교 박해가 거듭되는 동안 대외 정세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일본 역시 서구 열강과 잇따라 조약을 맺고 있었다. 주변정세가 그러했던 만큼 1850년대부터는 조선 연안에도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했다. 이양선(異樣船)은 '이상한 모습을 한 배'라는 뜻으로 조선인들이 보기에 서양의 배는 마치 태산과 같았다. 이양선들은 탐사만 하고 돌아가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남기고 간 물품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847년의 여름, 전라도의 신치도라는 섬 근처에서 프랑스 군함이 침몰했다. 그러자 섬의 관원들은 건져낸 물품들을 재빨리 창고에 넣고 문을 굳게 잠궈버렸다. 그런데 창고 안에서 '똑딱똑딱' 하는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주민들은 서양도깨비가 출몰했다며 공포에 떨다가 회의를 통해 용하다는 무당을 데려왔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무당이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나자 며칠 뒤 똑딱 소리가 멎었다. 시계의 태엽이 다 풀림으로써 서양도깨비가 사라진 것이었다.



서구문물을 이렇게 두려움으로 접하고 있을 즈음, 안동 김씨의 세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의 가렴주구로 삼정은 극도로 문란했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삼정은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구휼미제도인 환정(還政, 환곡)을 의미했다. 그런데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지방관들은 세원확대를 위해 각종 수탈과 학정을 자행했다. 결국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농민봉기가 줄을 이었는데, 1860년대는 굶주린 백성들이 제일 먼저 쌀 창고에 들이닥쳤던, 이른바 '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의 후손이었던 이하응은 안동 김씨의 견제를 벗어나기 위해 기행을 일삼으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병상련을 겪고 있던 조대비(신정왕후)와 접촉하여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었다.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고종 원년(1864), 섭정을 맡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갑자유신(甲子維新)을 선언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안동 김씨가 쥐고 있던 비변사 개혁을 시작으로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찬했으며, 그간 차별받던 사람들을 중용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각 관아에 배치했다. 그는 '사색평등(四色平等)'을 내세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해체하기 시작했는데, 각 당파의 뿌리는 각지의 서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색평등은 서원 철폐로 이어졌다. 서원은 원래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교육기관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치외법권 지역으로 군림하면서 엄청난 폐해를 낳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영조 대에 30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했으나 아직 600여 개는 남아있었다. 1871년 대원군은 679개소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겨두고 모두 철폐시켰으며 납세의 의무를 지웠다.



대원군은 집권 초반의 개혁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경복궁 중건을 강행했다. 경복궁은 이태조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270여 년간이나 버려둔 채로 있었다.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엄을 살리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지만 그 부작용이 너무 컸다. 농번기임에도 수많은 농민이 동원되어야 했고, 자금 조달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일종의 의연금으로 거둔 원납전(願納錢, 자원하여 바치는 돈)은 점차 벼슬아치와 부호들에게 강제 배당됨으로써 '원망하며 내는 돈'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100배의 가치를 가지는 당백전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또한 서울 도성문 출입에 통행세도 징수되었는데 한짐 당 2~4푼씩 부과되는 문세를 군인들이 공공연히 착복하여 국고에는 3분의 1분량밖에 입고되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 사상 처음으로 양반에게도 군포세를 납부하도록 한 호포제는 양반 측의 내재된 불만을 터트리는 계기가 되어 공공연한 정치적 반대를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원군 때도 서학, 즉 천주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경주에 사는 최제우(崔濟愚)가 서학에 대항할 학문으로 동학(東學)을 창설했다. 몰락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최제우는 10여 년 이상 백목(무명베) 행상을 하는 등 전국을 떠돌았으나 주문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시천주(侍天主)의 원리는 온갖 차별과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가슴속으로 쉽게 파고들었다. 이러한 동학에 지식층 인사들이 가담하고 귀천이 없이 어울리자 양반 유생들이 동학배척운동을 벌였다. 결국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죄목으로 효수(梟首)형에 처해졌다. 역설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고 그들을 구제할 수 없는 무능을 인식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바로 여기서 망국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통상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두만강 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자 러시아는 조선에 집요하게 통상 요구를 해왔다. 특히 1864~1865년에 집중된 통상요구는 대원군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무렵 승지를 지낸 천주교도 남종삼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이이제이(以夷制夷)방어책을 건의했다. 즉 프랑스와 수교를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방책이었다. 대원군은 남종삼의 소개로 조선에서 활동 중이던 베르뇌 주교와 만난 자리에서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1월 베이징 사신 이홍민이 보내온 편지가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반대원군세력들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강경파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선 이해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불우한 시절에 천주교와 접촉이 있었거니와 그의 부인과 딸도 천주교도였다. 하지만 그는 정권을 보존하기 위해 일종의 '결백 콤플렉스'를 발동시키게 된다. 곧 모든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베르뇌를 비롯하여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각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 이것이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병인박해가 병인양요를 야기했고 이것이 쇄국정책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1866년 10월 15일, 톈진에 있던 프랑스의 극동함대사령관 로즈는 조선에서 프랑스인 주교 및 선교사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부를 공격했다. 이들은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에 못 이겨 곧 후퇴하지만 강화부에서 약탈한 각종 무기와 수천 권의 전적(典籍), 국왕의 인장,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까지 함께 가져갔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이러한 프랑스의 만행에 대해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이항로가 상소를 올려 비난하고, 서양 물건을 모두 찾아내 불태울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궁중에 있는 모든 서양 물건이 대궐 뜰에서 불태워지고 전국의 시장에서 서양 물건을 찾아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병인양요로 인해 악화된 대외감정은 1870년대 초까지 연속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1866년 8~9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면호가 북쪽 연안에 접근하였다가 현지 관민들의 화공(火攻)을 받고 침몰했다. 이런 가운데 곤궁한 살림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민란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 1868년 8월에는 정덕기가 『정감록』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켜 처형되었고, 다음해 3월과 8월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1871년에는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봉기했다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렇듯 세상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한 미국 탐사선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6월 1일 강화 해협에서 조선군과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다. 당시의 충돌로 사망한 조선군은 250여 명이나 되었다. 그중 100여 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졌는데, 당시 조선군은 한여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솜 아홉 겹을 놓은 두꺼운 무명갑주를 입고 있었다. 방탄을 위한 것이었으나 너무나 불이 붙기 쉬운 차림이었으니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에 비해 미군의 사상자는 너무나 가벼웠다. 전사자 세 명, 중상자 다섯 명 경상자 다섯 명뿐이었다.



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최인진은 신미양요 때 찍은 약 50여 점의 사진이 미국의 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 보면 맥주병과 미국 신문을 들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이 있는데, 당시 주민들은 미국 군함을 방문해 함께 술도 마시며 수화로 친교를 나누었고 맥주병을 신기하게 여겨 소중하게 신문지에 싸가지고 돌아가는 등 분위기가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갑자기 조선포대에서 발사된 포탄이 미국군함의 성조기를 불태웠고 이에 분노한 미군의 상륙으로 대대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하튼 조선은 미국의 조약체결 요청에 끝까지 응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한 달 후 미군이 철수하자 조선조정에서는 이를 미군의 패퇴로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 대원군은 '화약(和約)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우게 했다. 또한 전국의 먹 제조업자에게 명하여 먹의 뒷면에도 척화비의 내용을 음각하게 했다.



제4장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흥선대원군은 획기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으나 그로 인해 양반 세력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민비와의 관계 악화는 여러 면에서 제약을 가져왔는데, 이제 스물두 살이 된 고종은 친정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듯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1873년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을 기해서 하야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무렵, 천황제 통일국가를 수립한 일본이 대륙팽창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1871년 9월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일본은 1874년 11월, 조선 정부에도 국교수립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조선 정부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자 다음해 봄 운양호(운요호) 등 군함 세 척을 파견하여 부산에 함포 사격을 했다. 그렇게 시위를 하고 돌아가더니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초지진에 다시 나타나 포격과 살육행위를 하고 무기를 노획하여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식수를 얻기 위해 강화도에 접근했는데 조선 측이 포격을 가해 응전했다'면서 그 보상의 대가로 수교를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른바 1876년 2월 27일 맺어진 강화도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권리만 규정했을 뿐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서 안영배는 "조선은 통상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조선 측 대표로 조약체결에 참석한 판중추부사 신헌은 일본 측이 통상과 관련해 일본의 화폐제도를 설명하려하자 "사대부는 덕치(德治)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 같은 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며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또 노동을 모른다는 증거로 길게 기른 자신의 손톱을 일본 측 대표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태진은 일본 외무성과 우리 측의 기록을 들어 반박한다. "강화도조약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은 총 13개조의 조항을 제시했는데, 조선 정부는 이중 일본에 대한 최혜국조관을 거부하고 나머지 12개조 중 9개조에 대해서도 수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약체결의 전 과정은 신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국왕이 조정회의를 통해 주도한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 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근대에 대한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1876년의 개항을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견도 있다. 신용하는 한국 근대사의 시작은 이전까지의 폐쇄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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