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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서양미술사 1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 361쪽 / 17,000원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서


이미지는 보통 형태와 색채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소묘와 채색의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소묘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들은 먼저 신체 부위들 사이에 적절한 비례를 찾으려 했다. 아름다움이 수적 비례에 놓여 있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믿음이었다. 이 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론을 사용했는지 살펴본다. 우리의 여행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출발하여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리글(Alois Riegl, 1858~1905)의 말대로 '솜씨'가 아니라 '의지'다.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양식은 그저 각각 다른 '예술의지'를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파노프스키의 비례론은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살아 있는 생물, 특히 인간 신체의 비례관계에 관한 이론'이다. 비례론의 관점에서 양식에 접근하면 예술사에 등장한 양식들의 바탕에 깔린 예술의지들을 객관적으로, 그것도 수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기술할 수 있다.



이집트의 장인들은 조상(彫像)의 제작에 있어 '카논(Kanon)'을 사용했다. 아득한 고대에 인체에 대한 실측을 통해 제정된 카논이라는 신체 비례의 표준이 있어 이집트의 장인들은 모델 없이도 조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인체를 묘사할 때, 이집트인들은 먼저 모눈을 그린 후 그 위에 신체 부위를 배분했다.(이집트 예술의 후기 카논의 묘사. 좌측 사진) 자세와 각도, 위치에 따른 신체 길이의 변화는 무시했다. 평면을 모눈으로 모듈화하고 정해진 수치에 따라 형을 만드는 방식. 이런 몰(沒)개

성적인 제작에서는 장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스 예술가들도 물론 '카논'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인체의 묘사에서 신체의 길이는 모델의 자세와 시선의 각도,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리스 조각을 보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쪼그리고 앉은 비너스>(기원전 200~150년경. 우측 조상)를 보라. 방금 목욕을 마친 듯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면서 일어나려는 여신의 우연한 동작을 포착했다. 이집트에서라면 이런 기묘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스의 조상은 예로부터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이러한 차이는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인들이 영원불변하는 내세를 지향했다면, 그리스인들은 변화무쌍한 현세를 긍정했다. 시간의 영원성을 지향하는 이집트 사회의 보수성은 혁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신체를 늘 불변적이고 필연적이며 획일적인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게다가 이집트는 전제군주의 나라였다. 예술에서 개개인에게 창작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양식의 변화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며 개별적인 감각의 세계를 존중했기에 자세와 각도, 위치에 따른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집트 조상의 제작 방식이 '기술'에 속한다면, 그리스의 그것은 '예술'에 속한다.



서양의 중세에 들어오면 비례론에 대한 또 한 번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다. 그 흔적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오네쿠르(Villard de Honne-court)의 앨범(1235년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양피지 앨범은 중세의 장인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먼저 자와 컴퍼스로 기하학적 도형을 그린 후, 그 추상적 프레임에 구상적인 형태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몸통과 사지는 별 모양의 프레임, 또 머리 부분은 동그라미와 십자가를 이용해 처리하곤 했다. 쉽게 작업하기 위해서였다. 이미지들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었다. 현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중세인들은 가시적 세계의 생생한 묘사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르네상스에 오자 다 빈치는 인체에 대한 관찰과 측정으로 비례론을 경험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흔히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고 불리는 다 빈치의 펜화(1487년. 우측 그림)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아름다움을 자연스러움과 동일시하며 실제 인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이상적 비례에 도달하려 한 노력의 결과를 보여준다. 손마디, 손가락, 손바닥, 팔의 아랫부분, 팔 전체 등의 길이를 황금분할(대략 1: 1,618에 해당하는 비율. 아름다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속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가 끝나자 비례론의 예술적 호용은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회화에 대한 시대의 관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회화의 본질을 사물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에서 찾게 되자,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례론이 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바로크는 어차피 형보다는 색에 주목하는 시대였다.



색과 빛의 황홀경

소묘가 끝났으면 채색을 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서구의 미감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고대인들이 형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면 중세인들은 무엇보다도 색채와 광채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중세의 예술은 우리를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저 높은 곳에 있는 초감각의 세계로 고양시킨다. 그것을 감상할 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아래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

중세인의 눈은 현세보다 내세에 맞춰져 있다. 그 시절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 바탕에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표현해야 했다. 문제는 그 초월적 빛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세의 장인은 그 과제를 재료로 해결했다. 즉 값비싼 재료의 찬란한 색채와 광휘를 그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공예는 온통 번쩍 이는 황금, 은은하게 비치는 은빛, 형형색색의 보석, 몽환적 효과를 내는 다양한 색깔의 희귀한 염료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빛의 상징주의는 건축에도 있다. 로마네크스 양식을 대표하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우측 사진)을 보자.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면이 온통 금박으로 번쩍거리며 초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색깔에만 상징주의가 있었던 게 아니다. 중세인은 우리보다 자연을 한 꺼풀 더 깊숙이 보았다. 그들은 자연 속의 모든 대상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 의미를 결부시키기를 좋아했다. 마치 소풍 나와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중세인은 자연 속에 신이 감추어놓은 뜻을 찾기를 좋아했다. 바로 이 상징의 취향이 중세 예술의 문을 여는 열쇠다.

어떤 의미에서 '실제(reality)'란 합의된 세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한 실재지만, 중세에 그것은 유일한 실재도, 중요한 실재도 아니었다. 중세에 '합의된' 진정한 실재는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였기에, 가시적 세계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는 현대 예술이 처한 상황을 닮았다. 카메라의 등장 이후 현대 예술에서도 재현은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아순토는 여기서 중세 예술과 현대 예술 사이의 평행선을 본다. 실제로 둘은 닮았다. 가령 중세 예술이 가시적인 것을 넘어 비가시적인 세계를 드러내려 했다면, 현대 회화 역시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파울 클레)하려 한다. 중세 예술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형식(빛과 색)에 담아 전달했다면, 현대 예술에서도 '내용은 형식 속에 침전'(아도르노) 된다.



중세가 저물어가면서 현실에 대한 관념도 바뀐다. 사람들은 서서히 감각적인 현세가 유일한 세계라 믿게 된다. 이에 따라 사물을 초월적 의미와 연결시켰던 중세의 상징적 사유가 물러가고, 그 자리에 사물과 사물의 현실적 연관을 찾는 근대의 인과적 사유가 들어서게 된다.



자연을 내다보는 창문

'부활'이라는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인의 미감은 고대 그리스 취향으로 돌아간다. 이 장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의 저서를 토대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서구 미술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게 된다. 알베르티가 중세의 미론을 무너뜨려 나가는 것을 주목하라.



중세에 예술은 그저 기예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장인들이 형을 만드는데 적용한 기하학적 프레임은 그저 '쉽게 작업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 불과했다. 그들이 연출한 화려한 색채 효과 역시 빛의 신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그저 주문자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에 더 가깝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지적 교양을 갖춘 화가들은 이제 자신들의 작업에 이론적 표현을 주려고 한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이 새로운 정신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예다. 창작을 이론으로 뒷받침하려는 화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예술은 비로소 정신노동으로 인정받는다. 기능공에 불과했던 장인들이 어느새 교양인으로 부상한다.



중세 예술이 초월적 세계를 가시화하려고 했다면, 르네상스 '화가의 임무'는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었다. 알베르티는 회화를 '자연을 향해 난 창(窓)'으로 규정했다. 회화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효과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알베르티에 따르면 화가는 '평면적으로 관찰한 어떤 물체를 화면이나 벽면 위에 선으로 그리고 색을 입혀야' 하는데, 그렇게 그려진 물체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적당한 시점에서 보았을 때 마치 부조처럼 돌출하여 실물을 방불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묘사에는 놀라운 힘이 깃들어 있다. "회화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 주고, 이미 몇 백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격현전(tele-presence)의 능력을 알베르티는 '신적인 힘'이라고 부른다. 이 힘이 무서운 사람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가령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수인 카산드로스는 대왕의 초상 앞에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케다모니아의 아케실라오스는 후세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제 얼굴을 그리거나 새기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회화의 본질을 환영 효과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회화의 환영주의가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베르티는 화가라면 때로 자연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고전 예술의 원칙은 이렇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창술경기에서 한 눈을 잃은 몬테펠트로 공작을 그릴 때, 눈이 성한 쪽을 취해 초상을 프로필로 처리했던 것이다.(<우르비노 최초의 공작 페드리고 다 몬테펠트로> 1472년. 우측 그림) 회화는 실물을 방불케 하는 '가상'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동시에 그것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 미학은 모사의 생생함만 추구하는 자연주의와는 구별된다.

엘 그레코, 신학적 가상현실

왜 시대와 문화마다 양식이 달라지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막스 드보르작의 저서에서 '마니에리스모'(화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영감을 얻기 위해 자연에 의뢰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전통 형식들을 재활용하는 데 의존하던 시기)에 관한 장을 취하여,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가 어떻게 회화의 묘사에 영향을 끼치는지 추적한다. 범람하는 물질주의에 반발하는 엘 그레코의 정신이 어떻게 현실 공간을 오늘날의 가상현실(VR)과 비슷한 곳으로 바꾸어놓았는지 주목하라.



화가로서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명성은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비롯된다. 크레타 출신으로 스페인에서는 그냥 '그리스인'으로 불렸던 마니에리스모의 거장. 그는 이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는 그 장소, 즉 톨레토의 산토 토메 성당에서 일어났던 어떤 기적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 좌측 그림)이란 이 작품의 화면은 크게 위아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단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매장 의식(儀式)을 보여준다. 백작의 사체를 입관하는 두 성자는 찬란한 복장을 입고 있어, 검은 상복을 입은 세속의 인물들과 시각적으로 구별된다. 상단은 백작의 영혼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상상'을 보여준다. 천사 하나가 구름 사이의 비좁은 틈으로 백작의 영혼을 집어넣는다.



하단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의식의 현실, 다른 하나는 기적의 환영이다. 저 놀라운 사건은 세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보는 것은 오직 두 사람, 성자들 바로 왼쪽의 어린 아이와 그 반대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신부뿐이다. 아이는 그림 밖의 관람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이적의 현장을 가리키고, 신부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놀라 두 팔을 벌린 채 놀라운 은총을 내려준 하늘을 바라본다. 아마도 아이는 천진난만함 때문에, 신부는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 그리고 신부의 눈이 향한 곳에는 세인이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죽은 백작의 영혼은 지금 그리로 간다. 감각의 눈으로 보는 물질적 세계에서 영혼의 눈으로 보는 초월적 세계로. 백작의 영혼이 향하는 길은 또한 르네상스에서 마니에리스모로 넘어가는 시기에 예술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엘그 레코는 왜 이런 묘사를 했을까? 당시의 세상은 물질주의로 범람하고 있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범람하는 물질주의가 화가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아예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엘 그레코는 미켈란젤로에게서 형태의 비(非)자연주의를 배웠다. 회화와 조각, 건축의 모든 영역에서 르네상스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자. 1499년에 제작된 바티칸의 <피에타>(좌측 조각)와 1550년경에 제작된 피렌체의 <피에타>(우측 조각)를 비교해보라. 르네상스 예술의 격률인 '자연의 모방과 형식의 이상화'는 사정없이 파괴된다. 엘 그레코는 또한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에게서 색채와 구성의 비(非)자연주의를 배웠다. 화가들의 눈은 더 이상 가시적 현실을 향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와 틴토레토를 거치면서 회화는 서서히 자연주의에서 벗어나고, 엘 그레코에 이르러 마침내 형태와 색채, 구성 모두 비현실적으로 변한 것이다.

다시 <오르가스 백장의 매장>으로 돌아가 보자. 엘 그레코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초현실의 비전이다.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환상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름에 난 좁은 틈새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교회와 세속에 범람하는 물질주의를 참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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