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간력
과화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삼국지 인간력
과화 지음 / 차혜정 옮김
스마트비즈니스 / 2008년 6월 / 272쪽 / 12,000원
제1장 조조 - 소인배의 모습을 한 진정한 군자삼국지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고르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조조를 선택할 것인데, 조조는 복잡한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어느 때는 몹시 잔인하고, 어느 때는 큰 관용을 보여주며, 또 때로는 소인배 같다가 어느 순간 군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이 조조와 유비를 비교할 때 '두 인물 중 누가 간신배인가' 하는 문제가 자주 나오는데, 유비는 외모로 볼 때 한실(漢室)의 정통을 이어받은 현명한 군자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자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생각을 줄곧 품고 있었다. 예로 유비는 어린 시절 뽕나무 밑에서 놀다가 친구들에게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개거(蓋車, 천자의 수레)를 탈 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유비가 어릴 때부터 천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조조는 유비와는 반대로 겉으로 보면 소인배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반듯한 생각을 가진 군자였다. 참고로 조조는 젊은 시절 여남(汝南)에 가서 관상을 잘 본다는 허자장에게 "그대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유능한 신하이고, 난세에는 간웅이 될 걸세"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조조는 신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조는 명분에 연연하지 않는 초탈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적어도 황제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로 조조가 헌제에게 손권과 유비가 각각 나라 한 쪽을 차지한 채 조정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며 처분을 내려달라고 하자, 헌제는 "위공께서 재량껏 하시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조조에게 황제가 되려는 야망이 있었다면, 헌제의 말을 빌미로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조조가 위(魏)나라 왕에 오를 때도 헌제가 진정으로 원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 조조 본인이나 그의 수하가 어떤 위험수단을 쓴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반면 유비는 한중왕에 오를 때 먼저 등극하고 나중에 상주하여 정식 비준을 받지 못했는데, 유비 자신도 뒤가 켕겼던지 "천자의 조서를 받지 못함이 지나쳤도다"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예절을 중시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의 서열을 숭상하던 봉건사회에서 이런 규칙을 어겼으니 어디 보통 큰일인가.
아무튼 조조와 유비의 행동을 비교해보면, 나관중의 "인의(仁義)의 씨를 세상에 뿌렸다"는 유비의 행동도 사실상 쇼에 불과하며,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즉 유비는 겉으로는 군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속으로는 소인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여포도 유비를 "가장 믿기 어려운 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이와는 달리 조조는 원칙적인 문제를 처리할 때 유비보다 훨씬 당당했으니 조조야말로 소인배의 모습을 한 진정한 군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여포 - 역사가 만들어낸 풍운아후한의 난세는 호걸들이 주도권을 다투는 투쟁의 역사인데, 그중에서 진정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유비가 자수성가했다지만 한실 종친이라는 후광을 입은 면이 많다. 반면 여포야말로 진정한 가난한 집 출신 호걸이라 할 수 있다. 여포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장 중 가장 개성이 뚜렷한 인물인데, 그는 맹목적인 충성을 거부하고 남의 밑에서 오래 있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으로 귀결되며 개인의 욕망과 기호에서 출발했다. 충절이나 부자의 정 따위에 속박당하지 않아 이성적인 '자유'와 '자율'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적의 처자식을 우대하고 존중했으며 자신의 처첩을 깊이 사랑했다. 예로 하비에서 포위되었을 때 진궁이 여포에게 계책 - 여포가 병사들을 나누어 둔성(屯城)을 나오고 진궁이 하비를 수비하며 협공을 하면 조조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는 계책 - 을 제안했다. 여포는 대단히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그런데 출발하려는 순간 애첩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계책을 포기하여 최후를 맞이하는 계기를 초래한다. 물론 여포의 지략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는 하지만, 유비가 처자식을 의복으로 생각하고 남의 부인을 가로챈 것에 비하면 여포가 훨씬 인간적이지 않은가?
일반인으로서 여포의 결점은 많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여포는 조조, 유비 같은 인물보다 모자람이 없다. 그는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연조비가(燕趙悲歌, 옛 중국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나라와 춘추전국 시대 조나라 선비들이 나라를 근심하는 우국의 충정이 깊어 비분강개한 슬픈 노래를 읊은 당시의 우국지사를 가리키는 말)'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니만큼, 유가사상을 이어받은 명사니 충의니 하는 덕목을 중시하지 않았다. 사실 이른바 명사라는 사람 중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튼 역사의 우연은 여포를 한 시대를 주름잡은 풍운아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그가 경성을 떠난 것은 성공하려는 큰 계획 때문이 아니라, 편안하게 자리 잡을 곳을 찾았던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당시 관동으로 도피한 원소, 조조처럼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목적 따위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비와 여포는 초반 경력이 비슷하지만,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한 사람은 냉대를 받았으며, 한 사람은 성공하여 삼국을 정립했고 한 사람은 강호를 떠돌았다.
제3장 유비 - 제왕술의 대가유비는 『삼국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인(仁)과 의(義)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인을 의복 정도로 생각하는 그의 생각을 비난하는 이도 있다. 내로라하는 고수를 둘이나 옆에 두고도 천하를 통일하지 못함을 탄식하는 사람도 있으며, 수많은 절세미인을 아내로 삼은 그를 부러워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그와 유방을 비교해 보자.
한나라를 연 고조 유방과 그의 먼 후손으로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는 비슷한 점이 많은데, 유방과 유비는 둘 다 제왕술(帝王術)의 대가였다. 유방이 한 발 앞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비야말로 중국 역사상 제왕술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와 비슷한 제왕술을 구사한 황제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정도를 들 수 있다. 참고로 제왕술의 핵심은 단연 교활함인데, 표면적으로는 인의와 덕을 내세워 사람의 마음을 얻고,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사람을 갖고 놀면서도 당사자가 이를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유비의 제왕술은 유방을 능가했다. 하지만 사람을 다스리는 교묘한 기술, 심지어 교활함을 인자함으로 덮는 기술까지 무엇 하나 유방에게서 배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
관리 측면을 볼 때 유방과 유비는 각자 노선이 달랐지만 누가 앞서고 누가 뒤처지는지 구별할 수 없다. 참고로 유비는 눈물과 정성으로 세력가와 인재를 불러모아 마침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문제는 많은 인재를 유치하면서 자신의 대권을 신변의 대장들에게 나눠주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유비가 분산형 관리방식을 채택하여 권력을 분산해 마지막에는 자신의 권력마저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유비가 인재를 붙잡아두는 데는 이 방법이 먹혔다. 그를 보좌하던 사람 중 제 발로 다른 사람에게 가는 인재가 없었던 것도 유비가 인재를 아끼고 감정노선을 걸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유방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되, 최종 결정권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제4장 손권 - 적의 적은 나의 편『삼국지』에서 손중모(孫仲謀, 손권의 자)는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별다른 책략이나 재주가 없고 한 집단의 수령이라기보다는 그냥 강동에 편안히 앉아 유비와 동맹을 맺은 인물 정도다. 삼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조차 위나라, 촉나라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오나라는 소홀히 한다. 참고로 원소나 조조, 여포, 손견 같은 군웅이 중원을 누빌 때, 손권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런 그가 삼분천하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손권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유비와 조조는 손권의 아버지 손견과 비슷한 연배였다. 그렇기에 조조가 "아들을 낳으면 손중모처럼 되어야 할 텐데"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손권의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의 인품과 경력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다 큰 포부를 가지고 제왕의 대업을 꿈꿨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무예가 출중해 무슨 일에나 솔선수범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비범함은 뒤로 갈수록 그 빛을 잃더니 결국 비명에 죽는 신세가 되었다. 손책은 임종 때 집안을 누구에게 물려주었을까? 사실 손책에게 아들이 있기는 했으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형제 중에서 계승자를 골라야 했다. 동생 셋도 아직 어린 나이였다. 당시 장소 등은 손책이 자기와 비슷하게 용맹스러운 셋째 손익을 택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손책이 택한 사람은 뜻밖에도 둘째인 손권이었다. 맏형 손책이 손권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아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손책의 예상대로 손권은 인재를 등용해 손씨 세력의 본거지인 강동을 잘 지켜냈다. 그러나 손권은 조조, 유비와는 좀 달랐다. 조조, 유비는 자수성가형으로 남벌과 북벌을 하면서 직접 작전을 지휘한 총사령관이었다. 이에 비하면 손권은 군사 분야에는 별로 밝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는 군사작전이 가장 중요한 일에 속하던 시기였기에 누군가 그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강동의 군사작전을 누가 맡아 했으며 손권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자.
손씨 세력의 오나라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장수가 많아 위, 촉 두 나라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 중 주유, 노숙, 여몽, 육손은 '강동사걸(江東四杰)'로 일컬어졌다. 주유는 손책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노숙은 주유와 친구 사이였다. 여몽은 손책 친구의 조카, 육손은 손책의 사위였다. 이 네 사람은 보기 드문 뛰어난 능력으로 강동을 누볐다. 주유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을 치렀으며, 노숙은 유비와 연합해 조조를 공략하는 책략을 내놓았다. 여몽은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손에 넣었고, 육손은 이능 전투 외에도 조조 공략 후반의 책임을 혼자 도맡았다.
한편 손권의 재정 관리를 맡아보던 인물 중 여범이라는 자가 있었다. 당시 손권은 젊을 때라 사사로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여범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일이 잦았는데, 여범은 그때마다 손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결코 돈을 내주지 않았다. 아울러 손책은 손권이 양선 현령에 임명되자 그의 사적인 지출 상황을 수시로 감시했다. 그러자 공조 주곡이 재빨리 장부를 위조하여 손권이 문책을 당하지 않도록 했는데, 이 일로 손권은 주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권이 강동의 수령이 된 후 중용한 사람은 뜻밖에도 주곡이 아닌 여범이었다. 여범은 충성심이 강하고 사사로운 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주곡은 장부를 위조하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승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손권의 확고한 인사 스타일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손권은 사람을 대할 때 조조, 유비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조조가 간교한 웃음으로, 유비가 징징 울면서 다가갔다면, 손권은 능숙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녹였다. 예로 손권이 크게 패한 합비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손권을 구한 자가 능통이었는데, 정의감에 불타는 사나이 능통은 아끼는 부하들이 모조리 전사한 것을 알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손권이 다가가 소매로 능통의 눈물을 닦아주며 유명한 한마디를 했다. "공적(公績, 능통의 자), 죽은 사람은 이미 어쩔 수 없소. 하지만 경이 있는데 어찌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소?" 이 한마디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나라에는 너 같은 장군이 있어 걱정이 없다고 하니 능통을 위로하기에 이보다 좋은 말이 있을까? 그 후 능통은 손권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고, 능통이 죽자 손권은 그의 두 아들을 데려다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아무튼 손권은 장수를 잘 부릴 줄 알았는데, 수하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어주면서 그가 끈 수단은 '당근과 채찍'이었다. 그렇다면 '채찍요법'은 무엇일까? 손권은 건안 13년에는 강하로 진격하여 황조를 죽이고 성안의 백성을 철저히 살육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손권이라는 인물의 위력을 보여주고 감히 도발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대단한 협박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고한 사람까지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고, 이는 손권이 역사에 남긴 커다란 오점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삼국의 지도자들 중 조조는 자기중심적으로 수하를 대했으며, 유비는 인자하기만 했지 위엄이 없었다. 하지만 손권은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구사하여 큰 사건을 앞두고 인재를 발탁하곤 했는데, 그는 의심이 가는 사람을 쓰지 않았지만, 일단 기용하면 전적으로 신임했다고 한다.
제5장 사마의 - 인내심의 교과서사마의는 노력과 계략으로 삼국 역사를 종결하는 군대의 리더인데, 그의 책략과 군사적 재능은 신출귀몰한 제갈량마저 두려워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의 참을성은 역사상 손꼽힐 정도이다. 참고로 삼국지에서 사마의는 줄곧 신비스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전반부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삼국이 정식으로 정립되고 양대 산맥인 조조와 유비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다음에서야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데, 위나라의 병권을 손에 쥔 대장군으로 첫 등장부터 거물급 모사 제갈량과 겨루어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토록 비중이 큰 인물이 어떤 이유로 삼국의 후반에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이제 역사의 진실을 파헤쳐보자. 사마의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지만 결코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참고로 사마의는 조조에게 발탁되면서부터 인생의 청사진을 그렸는데, 조비를 섬기면서 조조 앞에서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것이 삼국의 전반부에 사마의가 출현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나중에 조비가 황제가 되어 사마의에게 병권을 주면서부터 비로소 사마의는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사마의는 양수와는 달랐다. 지능지수만 높고 감성지수는 낮은 사람이 아니었던 사마의는 의심 많은 조조 앞에서 어떻게 해야 양수와 같은 처참한 꼴을 당하지 않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비를 열심히 섬김으로써 장차 황제가 될 사람에게 줄을 섰다. 조비는 조조의 큰아들로 정통 후계자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신하가 필요했다. 참고로 사마의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이 늙어서 죽어도 집안을 위해 이 계획을 밀고 나가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비의 권력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두 사람의 협력이 시작된 것이다. 사마의는 이렇게 장기 프로젝트를 세우고 하나씩 실천해 마침내 성공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진나라에 귀속되도록 했다. 여기서 사마의와 제갈량의 대결 중 공성계를 살펴보자, 사마의가 제갈량이 신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공성계에 속아넘어갔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꿍꿍이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사마의가 자신을 정말 죽여 버리면 촉나라는 당장 멸망할 터였다. 그렇다면 위나라의 병권을 잡고 있는 사마의도 더 이상 그 자리에 필요 없게 되어 당장 보따리를 싸야 한다. 따라서 제갈량처럼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해야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생존할 수 있는 빌미가 생기는 셈이었다. 제갈량은 과연 고수 중의 고수였다. 사마의의 속내를 간파한 다음 먼저 패를 띄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