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 이냐시오 라모네 지음 | 현대문학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
피델 카스트로 · 이냐시오 라모네 지음
현대문학 / 2008년 4월 / 713쪽 / 32,000원
지도자의 어린 시절내 혁명적 삶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은 바로 내가 태어난 시골농장, 비란에서 출발된다. 1926년,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그곳의 지주였다. 아버지는 스페인 갈리시아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1895년, 쿠바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부자를 대신해 징병되어 쿠바에 왔다. 3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1년 만에 다시 쿠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동자생활부터 시작해서 11만 헥타르의 대농장을 소유한 지주가 되었다. 아버지는 관대하고 선량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에게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주었고, 집만 몇 채 있던 비란에 집과 상가, 공공시설 등을 지어 마을을 형성했다. 그러한 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은 존경했으며, 그 봉건 영토 안에서 아버지는 많은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나는 부르주아 문화를 배우지 않았다. 아버지와 가난한 쿠바 출신의 어머니는 사교활동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비란 사람들과의 관계만 가졌다. 사탕수수 농장에 길게 줄을 서 있던 문맹 실직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었고, 나는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자랐다.
내 혁명적 삶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요소는 내가 부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당한 착취와 그로 인한 반항이다. 나는 비란에서 네 살 때부터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여섯 살 때 산티아고로 가게 되었다. 비란의 여선생님이 나를 산티아고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곳에는 나보다 4살 위인 누나 앙헬라가 이미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형 라몬까지 그곳으로 왔다. 우리는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7명이 비좁게 살았다. 당시는 마차도 독재 시절이었다. 학교가 병사들에게 점령당하고, 군인들이 학생들을 개머리판으로 때리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미국은 강제적인 무역협정으로 쿠바를 옥죄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 가족은 우리 부모님이 매달 보내오는 숙식비를 착취했다. 1인당 40페소씩 모두 120페소였는데, 달러와 페소는 동일한 가치였다. 당시 1달러는 지금의 50달러 정도 될 것이니, 오늘날 그 돈의 가치는 수천 달러에 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배가 고파야 했다.
선생님의 집에서 나는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2년 동안 매일 내가 한 일은 공책 표지에 있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표를 보고 혼자 공부하는 것이었다. 7살밖에 안된 나는 신발도 스스로 꿰매야 했는데 하루는 바늘을 부러뜨렸다는 이유로 심하게 맞았다. 그렇게 그들은 가끔 채찍으로 체벌을 가했다. 하지만 일 년쯤 지났을 때 부모님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심하게 홍역을 앓고 있는 나를 아버지가 보러 오셨는데, 그동안 한 번도 머리를 자른 적이 없는데다 형편없이 말랐으니 내 몰골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는 동안에도 선생님은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화려한 가구를 새로 구입했다. 선생님의 이사 소식을 듣고 방문한 어머니는 우리가 배고픔을 참으며 지불한 모든 것들을 보셨다. 그리고 비쩍 마른 우리의 모습도 보셨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비란으로 돌아온 우리는 방학이 지난 후 다시 산티아고로 가게 되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쿠바의 정치적 상황은 내내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도 그랬다. 쿠바에서는 마차도가 실각하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고 바티스타의 군부가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스페인 내전과 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잇달아 발발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는 '라 사예' 학교를 거쳐, 돌로레스, 그리고 벨런을 통해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모두 예수회 학교로 가장 부르주아적인 학교들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몇 번 반항을 하고 잘못도 저질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숙사로 보내졌는데, 언제나 기숙사는 내게 행복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7학년 때에는 1등상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도 내내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학기초만 되면 예수회 신부들은 돈 많은 내 후견인에게 내가 낙제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렇듯 자라면서 겪은 '부정'이나 착취, 그리고 정치적 혼란과 전쟁과 같은 문제를 통해 나는 정의와 존엄성의 개념을 비롯한 몇몇 특정한 가치들을 배웠다.
정치 입문과 최초의 혁명적 봉기 1945년 9월, 나는 아바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학년 대표로 선출되었고, FEU(대학학생연맹)에 참여하여 정부대표 반대운동을 했다. 당시 대학은 정부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거점이었다. 나는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의 정치 이론을 읽거나 사상을 설파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50과목을 신청했고, 밤마다 열심히 공부해서 법학, 외교학, 사회과학 등 세 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 세 과목에서 학위를 따면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 7월부터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을 순회하면서 독재체제와 맞서 싸우는 민중들을 보았다. 특히 1948년 4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한 정치인이 암살되고 그에 분노한 민중들이 무기를 집어든 현장을 보았다. 나 역시 그곳에서 소총을 집어 들었다. 그 일을 겪은 후 나는 에두아르도 치바스가 설립한 '정통당'에 가입했다.
치바스는 과거 마차도에 항거한 학생투사 출신으로 1952년 6월에 치러질 예정이던 대통령 선거의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자살했다. 함께 투쟁했던 동지의 배신과 부정에 심한 충격을 받고 우울증을 앓다가 자신의 복부에 총을 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이제까지 꼭두각시 수장을 내세워온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나는 이때부터 혁명 계획을 수립했다. 그것은 민중봉기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정치적 무지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민중은 도둑질과 횡령, 실업, 권력 남용 등의 사회 문제가 나쁜 정치가들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만일 하늘에서 대천사가 내려와 공화국을 통치하게 하면 그러한 모든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자본주의 법칙은 일반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 위에서 작용한다. 거대한 대농장체계는 그 어느 것도 종지부를 찍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1950년 9월,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아바나의 정통당 사무실에서 매일 소그룹들과 만나 우리의 사상을 전달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또한 변호사로서 우리의 투사들을 변호했다. 동생 라울도 함께 했다. 우리 조직은 1천 200명의 청년으로 구성되었고, 무기와 자금도 마련되었다. 우리는 마침내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기로 했다. 3천정의 무기를 확보해 도시 전역에 배포하고, 방송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총파업 등을 호소할 예정이었다.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의 축제가 절정에 달하는 그날 새벽, 나는 12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병영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병영 입구도 통과하기 전에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축제기간이라 기동순찰대를 배정했다는 사실을 전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곧 총격전이 일어났고 수많은 대원이 붙잡혔다. 전투 중에 5명이 사망했고 붙잡힌 동료들 중 56명이 처형당했다.
나는 19명의 대원들과 함께 산으로 갔다가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몹시 흥분한 병사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병사들의 지휘를 맡은 대위가 "쏘지 마! 사상은 사살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키가 큰 흑인 장교였다. 그는 자신의 사령관이 나를 인도하라고 요구하는데도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면서 나를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비바크(산티아고에 있는 감옥)로 데려갔다. 우리에게 재판을 받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몬카다 부대로 보내졌다면 아마도 잘게 토막 나고 말았을 것이다. 1953년 9월 21일 월요일 첫 재판이 시작되자, 나는 죄수로서, 또한 변호사 자격으로 모든 대원들을 변호했다. 그리고 10월 16일,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라는 변론서를 제출하여, 나의 정치적, 혁명적 강령을 밝혔다. 나는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피노스 섬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나는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비난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은 단식투쟁보다 그 소리를 더욱 걱정했다. 결국 나는 사면을 받아 1955년 5월 15일 석방되었다.
체 게바라와의 만남과 게릴라전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이후, 많은 동료들이 쿠바를 빠져나갔다. 그들 중 일부는 과테말라로 갔고 거기서 체 게바라와 만나게 되었다. 의학공부를 하던 체는 졸업을 앞두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볼리비아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여 일어난 노동자 농민 운동에서 투쟁했으며, 아마존의 나환자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 후에는 과테말라로 갔는데, 하코보 아르벤스 시절이었다.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은 매우 진보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있었다. 특히 훌륭한 농업개혁은 미국의 거대 초국적 기업이 수탈하고 착취한 바나나 농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체는 그곳에서 하코보 아르벤스의 실각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하고 있었다.
우리 대원들과 체는 함께 멕시코로 갔다. 그중에는 라울도 있었다. 감옥에서 출감한 나는 다시 혁명조직(7월 26일 운동)을 구축했으나 군부와의 전면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그때 체는 사회보장연구소에서 심장 아니면 알레르기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그는 우리의 군의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단체행동을 의심한 멕시코 경찰에 체포되어 두 달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956년 12월 2일, 우리는 쿠바에 상륙했다. 그러나 상륙한 지 사흘만에 공격을 받았다. 우리 병력은 30명 정도였고, 적은 약 60명 정도 되었다. 양쪽 모두 부상자가 많았다. 체는 적군의 군의관과 부상자들을 먼저 치료하고 나서 우리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체는 진정한 의사였고, 지도자의 본보기였다. 천식이 그의 활동을 방해했으나 그는 항상 솔선수범했고 도덕적이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비정규전이 유리했다. 내가 비정규 전투의 개념을 갖게 된 데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게릴라의 존재 의미와 전술 그리고 윤리적 영감을 받았다. 나는 적의 부대와 협상을 하면서도 군 장교들에게 그대로 무기를 소지하게 놔두었다.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세 번이나 항복한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러면 세 번 다 풀어주었다. 이런 우리를 농민들은 지지하고 무기를 제공해주었다. 반면 바티스타 정권의 경찰과 군인들은 농가를 약탈하고 집을 태웠으며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는 농가에서 암탉이나 돼지를 구할 때 집에 아무도 없으면 돈을 어딘가에 두고 쪽지를 남겼다. 그러나 만약 가축을 훔친 대원이 있으면 총살을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배신행위였다. 우리에게 배신은 윤리적 원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한 원칙으로 우리는 혁명정신을 고착시켜왔다.
1958년 4월,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적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 병력은 30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70일간 싸우고 났을 때, 우리 병력은 900명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휘그룹을 나누어 전국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동부 지방에서는 1만 7천 명의 병사들, 아니 더 많은 군인들을 포위했다. 그때 적군의 대장은 칸티요 장군이었다. 그는 혼자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일종의 반란을 제안했다. 칸티요 장군은 우리 의견에 동의했고 먼저 아바나로 갔다. 그런데 그가 우리를 배신했다. 그는 바티스타와 많은 장군들을 비행기에 태워 도망치게 도와주었고 쿠데타를 일으켜 대법원의 제일 늙은 법관인 카를로스 피에드라를 정부 대표로 임명했다. 그리고 미국 대사관과 접촉했다.
1959년 1월 1일, 우리는 급히 우리의 단파방송인 '반란군 라디오'를 통해 부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모든 국민들이 심지어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의 근로자들까지도 우리의 단파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그리고 전국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행동을 마치자, 나는 '엘 카네이' 병영으로 향했다. 그곳은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한 후 공격하고자 한 곳이었다. 그런데 주둔군이 나를 영접했다. 나는 300명의 장교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칸티요 장군의 배신을 설명했다. 장교들은 우리를 지지했고 각자 부대를 이끌고 아바나에 도착했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고, 총을 한 방도 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바나에 있는 우리 동료들이 거의 모든 것을 점령한 상태였다.
혁명 초기의 변화와 문제들1959년 2월, 우리는 하루아침에 혁명적 변화체제를 설립하는 대신 일종의 전환기 정부를 수립했다. 나는 이미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고 공표한 상태였다. 우리('7월 26일 운동')는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한 대법원 판사(마누엘 우루티아)를 대통령으로 임명하고, 나는 수상 직책을 맡았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병력 충원이었다. 우리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미국이 공격할 가능성도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교육 문제였다.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지대공 미사일포를 작동하려면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그런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또한 종교를 내세워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적절하지 못한 육체적 조건을 내세우는 사람들, 소위 게이들도 있었다. 이 세 가지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소집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러한 특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우리는 이들도 징집해야 했다. 하지만 강제로 소집하거나 탄압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부대를 창설하고 노동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했다. 그것은 주로 농사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혁명정부가 싸워야 했던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바로 흑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우리는 그저 법 앞에서 평등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법을 적용했다. 그런데 사회적 · 경제적 차이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원인은 바로 교육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과 범죄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쿠바의 소외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감옥에 있는지를 분석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쿠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2퍼센트만이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자녀이다. 그 나머지는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모여 사는 그런 가족의 자녀이다. 그래서 우리는 몇몇 소외된 지역을 없애고, 그들에게 새로운 집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다시 주변성의 문화가 생겨났다. 이전에 있었던 현상이 연장되는 것이다. 주변성의 문화와 그것의 결과는 재생되는 성향이 있다. 가끔 텔레비전에는 흑인들의 범죄 사건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범죄를 특정한 사회 그룹과 연결시키는 영향을 끼친다.
도둑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을 분노로 들끓게 하는 일반 도둑질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관리를 하면서 횡령하는 도둑질이 있다. 사회를 도둑질하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물건을 훔치거나 무언가를 부수는 범죄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교육을 채택했다. 당시 국민 병역은 3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