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한규라 지음 | 책이있는마을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한규라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08년 4월 / 296쪽 / 12,000원
이산 정조(1752~1800) - 미완의 개혁으로 생을 마감한 애민 군주조선 후기 개혁 군주ㆍ애민(愛民) 군주ㆍ현군 등 많은 별칭이 따랐던 이산 정조는 강해지려고 했으나, 사실 누구보다도 외로운 존재였고, 살벌한 정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생을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다. 참고로 그는 백성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어느 한순간도 자기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철저하게 개혁을 준비했지만, 그가 죽자 그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개혁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졌고, 그의 개혁을 믿고 따르던 이들은 희생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한편 정조가 살았던 시대는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로, 왕의 운명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결정되었고, 왕은 백성들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신하들을 더 두려워했는데, 신하들의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마
저 자기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선대왕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신하들에 의해 제거된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강력한 신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개혁을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기존 정치세력을 적절히 조율해 그들의 세력 경쟁을 지혜롭게 이용했으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다.
예로 그가 행한 일들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던 탕평책, 신해통공(辛亥通共)을 통한 경제 활성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통한 인재양성, 서얼허통과 노비제도의 혁파, 암행어사 제도의 확대, 국왕 직속의 정치기구이자 학술기관인 규장각 설치, 친위부대인 장용영 창설 등이었다. 아울러 계획도시 화성의 건설을 들 수 있는데,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화성을 농업도시ㆍ상업도시의 모델로 성장시켜 그 성과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준비 기간 중에 병이 들어 버렸다. 가슴에 쌓인 화기를 억누르며 개혁을 준비했던 왕은 결국 그 화기 때문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개혁의 고지를 눈앞에 둔 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화성 건설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정조 사후의 권력은 선대왕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다시 노론의 손으로 넘어갔고, 세자의 외척인 김조순 일파의 득세를 가져와 조선은 세도정치라는 파행 속으로 치달았다. 왕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간의 개혁이 이리도 무기력하게 무너지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참고로 정조가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은 단 한 마디, '수성전'이었는데, 수성전은 왕대비인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조는 왜 마지막에 수성전이란 말을 하고 죽은 것일까? 그리고 정조와 앙숙이었던 정순왕후가 주위를 물리고 홀로 정조의 임종을 지켰다고 전하는 부분도 뭔가 석연치 않다. 따라서 정조 사후에 경상도에서 장시경이란 사람이 정조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난을 일으켰으며, 정약용 역시 귀양을 가서 쓴 『여유당전서』에 정조 독살설을 언급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정조 독살설을 믿고 있다. 이는 그만큼 정조에 대한 아쉬움과 그의 죽음이 몰고 온 그 이후의 파장이 우리 역사에 끼친 악영향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시민혁명이 일어나 근대사회로 발전한 반면, 우리의 르네상스는 한 왕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그나마 자라나고 있던 시민의식의 싹을 잘라버렸으니 정조의 죽음은 두고두고 우리 후손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균(1540~1597 - 겁쟁이ㆍ비겁자ㆍ모사가로 낙인찍힌 원균을 위한 변명원균은 임진왜란의 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그늘에 가려 극히 부정적이고 야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겁쟁이ㆍ비겁자ㆍ모사가 등을 비롯해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모함하여 그 자리를 차지한, 그래서 결국 조선 수군 대부분을 궤멸시킨 무능한 장군이라는 꼬리표가 4백 년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평생 무장으로 살아온 그가 했던 무수한 일들 가운데 실책이 없을 수 없고, 공적이 없을 리 없다. 참고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곧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 한 가지로만 평가하려는 그 시야를 넓히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가 명장이냐 아니냐를 떠나 진실을 밝히는 작업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기록에 근거하여 충실하게 그의 공과(功過)를 따져보기로 한다.
흔히 실록이라는 것은 비밀성과 공정성을 으뜸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살필 때 『조선왕조실록』을 가장 신뢰 높은 기록으로 여긴다. 실록 편찬의 기초인 사초(史草)는 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기록의 비밀성과 객관성을 위해 왕이 승하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록청이 열리고, 실록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게 제작된 실록도 그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의 최고 감수자이자 태종의 오른팔인 하륜이 과연 이성계의 즉위 과정이나 1ㆍ2차 왕자의 난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게 했을까? 그들은 아마도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편 『선조수정실록』은 어떠한가? 왜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난 뒤, 덕수 이씨로 이순신과 한집안 사람인 당시 대제학이었던 이식이, 집권 세력의 도움으로 비문ㆍ문집ㆍ행장기 등을 수집하여 선조실록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완성된『선조수정실록』과『선조실록』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이ㆍ이순신ㆍ이완 등 덕수 이씨 집안 인물들의 기록이 많아졌다는 것과 바로 원균에 대한 기록이다. 참고로 이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적이 쳐들어왔는데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친 겁쟁이에다 무능한 장수이며, 이순신을 모함한 주범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아는 마지막 이순신의 죽음, 즉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부분은 『선조수정실록』에만 보이는 대목이다.
원균이 이렇게 이순신의 대척점의 인물로 부각된 이유는, 이순신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투옥된 이후 그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이 투옥된 죄목은 원균과는 무관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이순신이 하옥되고 백의종군하게 되는 과정에서,『선조실록』 어디에도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무튼 원균은 비록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부하들은 이순신을 대신해서 내려온 원균의 말을 듣지 않았고, 이렇듯 지휘 능력을 상실한 지휘관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참고로 원균은 원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국경지역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여진족을 토벌했고, 이후 부령부사로 승진하여 함경병사인 이일과 함께 오랑캐의 본진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공격하는 등 육지에서 명장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다. 이런 장수를 임진왜란 발발 두 달 전에 경상우수영에 수군으로 임명하였으니, 그는 수군에 대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미처 군비를 갖출 겨를도 없이 왜군의 급습을 받은 것이다. 1년 전에 이미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여 차근차근 전쟁에 대비해 수군을 훈련시킨 이순신과는 이런 점에서 시작부터 달랐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끝나고, 엄격한 심사를 거친 공신 책봉 과정에서 이순신ㆍ원균ㆍ권율 세 사람이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봉되었는데, 왕을 모시고 의주로 같이 피난을 가서 일신의 안전을 구하면서도 공신으로 책봉된 86명의 공신들과 비교해볼 때, 비록 칠천량에서 크게 패배했지만, 그간의 공로와 순국의 사실을 따져보면 원균의 일등공신 책봉이 전혀 납득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같은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권율의 경우만 해도 행주대첩 외에 별반 뚜렷한 공적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비록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수많은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적선 100여 척을 무찌른 원균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는 원균의 이미지는 후대의 여러 사람들의 붓끝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북벌을 추진하려 했던 효종에 의해, 이광수에 의해, 박정희에 의해 이순신이 영웅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원균의 공적이 가려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명회(1415~1487) - 5대에 걸친 격동의 시대를 쥐락펴락한 최고의 책사역사에 등장하는 영웅 뒤에는 반드시 그 영웅을 만들고 도와주는 책사(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여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들이 있다. 우리 역사 속 최고의 책사 하면, 일반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의 하륜, 세조의 한명회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한명회는 책사의 이미지보다 모리배, 권모술수의 대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극의 힘이 작용했던 탓도 있다.
참고로 한명회는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지고 세상을 주물렀고,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멀었던 수양대군을 조선 제7대 왕으로 등극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명회는 많은 악업을 쌓아 후대에 두고두고 간신으로 회자되었다. 그는 숙부가 조카를 죽이게 하고, 형이 동생을 죽이게 하고, 죄 없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죽였는데, 그 죽음들 앞에 한명회는 분명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사후에 부관참시를 당한 것에 대해 감히 천벌이라 일컫기도 한다.
한명회는 과연 조선 최고의 책사인가, 아니면 최대의 간신이자 역적인가? 그의 실체를 재조명해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해보도록 한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한 한명회는 가장 빨리 자신을 높여줄 주인을 찾았고,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정난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자신이 세운 왕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군으로 만드는 것이 킹메이커의 진정한 역할인데, 세조가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승계하고 무고한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오늘날 그를 폭군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를 정당화시켜준 한명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명회는 지략만 뛰어난 참모가 아니라, 재상으로서도 뛰어난 경영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권좌에 오른 세조는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왕권 확립을 가져왔고, 민생 안정을 위해 지방 감찰제도를 강화했다. 또한 실무를 담당하는 6조에게 직접 보고를 받고, 명령을 집행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했다. 아울러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관 감찰제도와 각 지역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제도를 정비했는데, 한명회는 14년 동안 체찰사로 전국에 여러 차례 파견되어 1년에 약 3분의 1 이상을 지방에 머물렀다. 참고로 세조는 한명회에게 체찰사로 파견된 해당 지역의 모든 공사를 위임하여 그의 재량권으로 현안들을 처결하도록 했는데, 체찰사 제도는 이 시기 국정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한명회의 눈부신 활약은 그에 대한 세조의 절대적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흔히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를 조선 제2의 문화 창달 시기라고 일컫는다. 세종 대에 주로 민족문화 중흥과 국방 강화, 과학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면, 세조 대에는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가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명회는 법전을 편찬하기 위해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지속적인 수정작업을 통해 성종 대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결실을 맺도록 이끌었다. 또한 한명회는 특별히 왕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으며,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를 확충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경사(經史) 관계 서적을 많이 비치하도록 하여 학문을 중히 여기는 풍토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책들로 세조 시대의 백성들은 고단함이 덜했고, 조선왕조 창업기가 안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세조가 비록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오늘날까지 일반인들에게 그의 왕위찬탈이 오히려 시대적 요청으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한명회는 일생 동안 모두 네 번의 공신 칭호를 받았고,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의 고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영달과 달리 세조나 한명회의 자식들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하늘이 내리는 큰 벌이라고 할까……. 참고로 한명회는 두 차례나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그의 딸들이 오랫동안 왕비의 자리에 있지 못했고, 그의 손자들이 왕위를 계승하지도 못했다.
한명회의 업보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한명회를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했다. 이렇듯 한명회는 지나친 권력을 누린 죗값으로 죽고 난 뒤에도 편안히 잠들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한명회는 확실한 시대적 비전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당대 최고의 책사였다. 한치 앞을 보기 힘든 혼탁한 시기일수록 그와 같은 책사를 그리워하는 것은 한명회가 지니고 있던 여유로움과 지혜가 부러워서일 것이다.
양녕대군(1394~1462) - 권좌의 환멸에서 벗어나 마침내 자유를 찾은 폐세자독재를 하고 싶다면 확실한 후계자를 키워라. 훗날에 어떤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일단 당대에는 안위를 보장해줄 수 있는 그런 후계자. 이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인물이 있다. 태종 이방원과 충녕대군. 후에 세종으로 등극하는 충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만행과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그런 후계자였다. 그래서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은 14년 동안 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비운의 왕자 양녕. 그의 이름처럼 그는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과연 편안했을까? 그가 세자의 자리를 버린 것인지, 아니면 빼앗긴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한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폐세자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전국 곳곳을 누비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세자였으나 아버지로부터 견제를 받아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 문(文)보다는 무(武)를 더 즐기고 호방한 기개를 지녔던 양녕대군은 태평성대를 이끌어갈 성군이 필요했던 시기에 어울리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1,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로 물든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 이방원은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 4남 4녀를 두었다. 이 중 1394년에 태어난 맏아들 양녕대군 제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참고로 태종은 비록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종법에 따라 적장자 왕위 계승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양녕을 세자로 정해놓고, 왕세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독려했다. 하지만 학문을 연마하는 것보다 사냥과 무예, 풍류생활을 즐겨했던 양녕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데, 양녕을 둘러싼 기록들을 보면, 그가 사냥과 풍류를 즐기고 여인들과 물의를 일으키는 등 왕세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이 과연 양녕의 진면목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만약 양녕이 이런 문제점들만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태종이 14년 동안이나 양녕을 왕세자로 그냥 놔두었을까? 참고로 태종은 사실 양녕대군을 왕재로서 손색이 없다고 신임하고 있었고, 양녕은 문무를 겸한 재사(才士)로서 일찍이 그의 스승이었던 황희로부터 학문적인 식견을 인정받기도 했으며, 15세 되던 해에는 견문을 넓히고 조선의 왕세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직접 명나라의 조공길에 나서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