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과 육식
리처드 W.불리엣 지음 | 알마
사육과 육식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알마 / 2008년 4월 / 465쪽 / 25,000원
동물과 멀어지다미국 문화에서 섹스와 피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가 강세를 떨치고 있다. 슬라이스 앤드 다이스 필름(Slice and Dice Film, 노골적인 살육을 드러내는 공포영화에 대한 은어)과 같은 잘 팔리는 시리즈물들(<할로윈, 1978>, <나이트메어, 1984>, <캔디맨, 1992>, <스크림, 1996>,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1997>)이 세상에 나와 점점 더 거리낌 없이 피가 뿜어져 나온다.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자면, XXX(treple-X) 등급의 대여 비디오나 호텔 TV에서 보여주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 온갖 종류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수천 개의 웹사이트들이 성행한다.
이렇게 섹스와 피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가 미국 문화에서 강세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제안하려고 하는 답은 이렇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육시대(domesticity)'의 사고방식이 '후기사육시대(postdomesticity)로 이행되면서 우리의 시각과 행동에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그 관련성은 점점 더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육시대'와 '후기사육시대'는 이 책의 핵심개념이다. 두 개념 모두 지금까지 정의되거나 식별된 적이 전혀 없었지만 비교적 간단하다. '사육시대'는 가축(애완동물이 아닌)과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날마다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경제적·지적 공동체를 특징으로 한다.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지나간 세대의 생활양식이지만 대다수 개발도상국들에서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한 농경 생활을 의미한다.
'후기사육시대'는 두 가지를 특징으로 한다. 첫째, 후기사육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존하고 있는 식량, 직물, 가죽을 제공하는 동물과 물리적· 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므로 그런 동물의 출산, 교미, 도살 과정을 본 경험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흔히 애완동물로 불리는 반려동물과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마치 인간인 것처럼)를 유지한다. 둘째, 후기사육시대는 그에 선행했던 사육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사육된 동물이 제품으로 바뀌는 산업적인 과정과 이런 산물이 시장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서(좀처럼 생각하지도 않지만) 죄의식, 수치심, 역겨움을 느낀다.
사육시대에는 사육동물과 야생동물을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죽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물을 도축할 때의 선혈 낭자한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사육사회는 일찌감치 아이들을 섹스와 피에 노출시킴으로써 마음을 단련시키고 섹스와 피를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육욕과 관련해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 상상적인 묘사에 그다지 반응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후기사육시대의 도시 생활에서는 적어도 동물에 관한 한 교미하는 모습과 유혈이 낭자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때문에 후기사육사회는 육욕의 사실성으로부터 멀어져 섹스와 피의 환상으로 나아가는 추세를 되돌려 놓을 수 없게 된다. 즉, 사육시대에서 후기사육시대로 이행함으로써 초래된 변화의 무의식적인 반응 가운데 하나가 섹스와 피의 환상에 매료되어 그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택적 채식주의의 역설: 인간/동물 관계가 엄청나게 변화하면서 섹스와 유혈에 관한 포르노물이 급증한 것은 주로 무의식적인 데 반해, 다른 반응들은 변화된 조건을 보다 의식적으로 반영한다. 의식적인 후기사육시대적 행동 양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선택적 채식주의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자라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에 대한 동정심, 그런 사육 환경으로 인해 초래되는 박테리아, 항생제, 스테로이드제 오염에 대한 공포, 고기를 먹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리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선택적 채식주의자가 되면, 육식을 금하는 가풍이 있는 사람과는 달리 양심에 따라 특정한 고기나 모든 고기를 피한다. 후기사육사회에 들어와서 채식주의는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의 생산량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미국이 육류 생산에 있어서 세계 최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비용 대비 효과를 높이고 20세기 후반 동안 계속해서 육류 가공 산업화 방식을 세련되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고기는 종이에 포장된 햄버거의 형태나 1회용 스티로폼 접시와 폴리에틸렌 랩으로 포장된 익숙한 모습으로 소비자들의 손에 들어왔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동물을 살찌워 도축하고 토막을 낸다는 사실을 가능한 잊어버리려고 했다. '개선'된 동물 사육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육류 소비를 점점 더 증가하도록 부추기게 되었다.
육류 소비 증가와 동시에 선별적인 채식주의의 확산은 후기사육시대라는 하나의 국면, 즉 생산량은 극대화하면서 소비자 비용은 최소화하는 것에서 기인된 역설적인 현상이다.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사육하고 가공 처리하는 데 대해 동물 농사와는 무관한 실재적 잠재적 채식주의자들이 반발하고 있지만 그런 비인간적인 방식을 통해 축산업자들은 오히려 고기 소비를 보다 용이하게 해주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게 된다.
분리와 이행의 단계들동물종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다른 동물종들과 더불어 살아왔고, 그 동물종과 우리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우리를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분리를 합리화하고 강화하고 상징하기 위해 고안해낸 범주와 경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어왔다. 나는 연속적인 역사시대를 4단계의 시기로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그 시대들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후기사육시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이행기이다. 내가 이름 붙인 네 시기 중에서 세 시기는 200년이 채 되지 않은 개념, 즉 사육(domestication)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장은 이렇게 인간/동물의 분리 시기를 구분 지은 데 대한 상세한 견해를 설명한다.
인간이든 인간 이전의 원시 인류인 호미니드든 간에, 우리의 조상이 언제 그리고 왜 스스로를 특정한 종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을 '분리'로 지칭하게 되었는지는 오직 추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그들은 친족관계인 호미니드종과 같은 존재로서 동일한 환경 속에서 집단으로 생활했을까, 아니면 호미니드를 다른 동물로 분류했을까? 그들은 동물을 실질적인 조건(예를 들어, 그들과 섹스하는 존재들, 그들이 잡아먹는 존재들(먹잇감), 그들이 잡아먹힐까봐 두려워 도망쳤던 존재들(포식자), 다가와도 무심했던 존재들)으로 범주화했을까, 아니면 세속적인 용도와는 관련이 없이 범주화했을까? 이러한 추측들로 살펴보건대 분리는 우월감을 함축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동물과 다르다고 파악함으로써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동물보다는 능력이 있고 중요하다고 간주했을 것이다.
분리의 시기로부터 '전기사육시대'로의 이행, 즉 인간/동물 관계의 두 번째 거대한 분수령도 개념화하기는 어렵다. 인간이 자기 종에 대해 최초로 의식하는 범위를 넘어서고 동물을 예술의 대상, 이야기의 주제,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까지, 수만 년 혹은 수백 만 년이 경과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기사육시대적인 사고는 상징적인 힘과 영적인 힘을 가진 동물세계와 대면하면서 틀림없이 겸손이라는 요소를 첨가했을 것이다.
전기사육시대에서 '사육시대'로의 이행도 인간/동물 관계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분수령이다. 사육시대는 인간이 생활공간과 식량을 몇몇 동물, 특히 쉽게 길들일 수 있는 어린 새끼들과 공유하면서 살아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만 년, 수백만 년 동안 전기사육시대적인 형태의 공존 이후에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을 보호하여 야생동물과 짝짓기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같은 종끼리 교배를 시키고 마침내는 특별한 산물이나 용도를 위해 그런 동물들을 이용했다. 사육동물이 바로 그런 결과물이다. 초기에는 신성을 구현하는 존재 또는 조상들로 간주되었을 야생종들이 점차 포식자로 분류되었으며, 사냥을 위한 사냥감이자 공간과 자원을 두고 인간과 경쟁하는 존재, 해로운 짐승, 혹은 생포되어 관찰 대상이나 구경거리로 전락하거나, 무대에 올려진 싸움에 등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육동물들이 점차 유용해짐에 따라 동물에게 부여했던 전기사육시대의 영적인 특질은 증발해버린 것이다. 황소에 멍에를 메워 쟁기를 끌게 하는 판에 황소를 신으로 생각한다면, 신에게 쟁기를 끌도록 하는 행동은 부적절하다고 보지 않겠는가. 사육시대는 동물을 숭배하고 상상 속에서 동물과 함께한다는 생각보다는 동물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점차 압도하게 되었다.
'후기사육시대'라는 마지막 이행기는 인간과 동물이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다.(애완동물을 별도로 한다면) 미국에서 이런 현상은 산업화와 이촌향도의 결과였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이 소비하는 사육동물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졌다. 이와 같은 관계의 변화는 앞장에서 기술했던 후기사육시대의 모든 특이성과 불안(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그 과정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윤리적 불안)을 점차 야기하게 되었다. 후기사육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이로 인한 윤리적인 결과에 대한 광범한 토론의 장을 열게 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사냥꾼과 채집자전기사육시대 수렵과 채집은 오로지 혹은 1차적으로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는 가정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당연시 될 수 있을까? 이 장은 전기사육시대가 동물일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본다.
동물은 전기사육시대 인간들의 정신적 풍경에서 자연의 어떤 측면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반영한다. 예술(동굴 벽화)은 동물에 관한 전기사육시대 사람들의 태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다. 거의 모든 유럽의 구석기시대 동굴 그림에는 동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인 설명은 수렵에 초점을 맞췄다. 초기 인류들은 그들이 잡아먹었던 동물을 그려놓고 주술적인 힘을 빌려서 더 많은 동물을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 이미지들 중에서 명백하게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예술품이 먹는 음식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앙드레 그루아 구랑(Andre Leroi Gourhan)은 70개의 동굴 벽화를 조사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구석기 시대 동물 그림은 먹을 수 있는 종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기보다는 동물우화집을 구성한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동굴 벽화에는 말, 소, 수사슴과 암사슴, 매머드, 순록, 곰 등으로 동물들이 대단히 편중되어 있는데, 집단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면 물고기, 새, 돼지는 왜 없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훗날 유럽인들의 식단에 등장하게 되는 이런 동물들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제기될 만한 수수께끼이다. 묘사된 동물종과 그것을 그린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에서 출현했던 사육종의 형태사이에서도 상호 연관이 있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개는 가장 초기부터 흔한 사육 형태였지만 선사시대 예술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를 식용으로 삼았던 지역에서도 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전기사육시대의 사람들이 수렵으로 고기를, 채집으로 야채를 얻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굴 벽화에서처럼 동물에 관한 그들의 사고는 단지 위(胃)를 만족시키는 것 이상이다. 식량으로서의 필요성이 예술적인 선호를 반드시 지배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이는 전기사육시대의 인간/동물의 관계가 식량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시대라는 점을 입증한다. 따라서 동물을 사육한 이유가 오로지 혹은 1차적으로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서라는 '수렵과 채집'이 함축하는 가정은 당연시될 수 없다.
선사시대의 모든 인류 집단은 동물에 관한 생각을 점차 섬세하고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가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동물 그림을 그린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관해서는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데 제례의식을 표현한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이것은 수렵, 소비, 신성함 사이의 연결고리를 암시한다.
의도인가 우연인가이 장은 '사육동물=유용한 동물'이라든 등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육동물의 물질적 용도와 정서적 용도를 구분한 뒤, 사육동물의 기원이 대부분 물질적 용도에 맞추어져 있음을 살피고, 우유와 유제품의 사례로 사육동물의 기원에 대한 시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한다.
동물이 '유용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재능, 즉 사냥, 목축, 해충 박멸, 폭발물과 마약 탐지, 송로버섯 발견에 이용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실행하거나 사람들을 운반하는 일 등에 그들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보다 쉽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우유, 달걀, 깃털, 모피, 양모, 가죽, 고기, 뼈, 뿔과 발굽 등과 같은 동물의 몸과 관련된 제품들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즉 의심의 여지없이 사용되는 동물과 동물이 생산한 제품들을 '물질적 용도(material use)'라고 부를 것이다.
애완동물이 제공해주는 동반자 역할 또한 동물의 용도가 아닌가? 새장에 갇힌 새의 아름다운 소리, 황금잉어의 매력적인 몸짓, 그리고 공작새가 꼬리를 부채처럼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어떤가? 나는, 이 모든 동물의 용도를 '정서적인 용도(affective use)'라고 부르고자 한다. 정서적 용도는 인간의 생활을 물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애정, 미적인 감상, 영적인 고양 등과 같은 감수성과 관련되어 있다.
사육화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는 물질적인 용도에 초점을 맞춘다.(여기서 사육화는 인간의 의도적인 활동이라는 관습적인 의미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용하는 발명과 발견의 궁극적인 용도는 반드시 그런 발명과 발견을 실제로 목표했거나 현실화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불을 길들이면서 인간들이 찰흙을 구워서 도자기를 굽거나 용광로에서 철을 정련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증류하는 법을 발명하면서 언젠가 이것을 이용해 보드카를 만들고 끈적끈적한 원유로부터 가솔린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우유와 유제품 역시 그러하다.
우유와 유제품: 동물의 젖을 얻으려는 동기로 인해 양, 염소, 암소 그리고 아마도 낙타와 말 등의 사육화가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대다수가 믿고 있는 주장이다. 동물의 젖을 선호하여 동물을 가축화했다는 이론적 근거는 전형적으로 유제품(버터, 물소의 젖, 요구르트, 치즈 등)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하지만 인간은 젖이 무엇으로 변할지 전혀 모르는 사회에서 왜 용기에 연유(liquid milk)를 모으려고 했던 것일까? 어떤 과정으로 동물의 젖을 소비하게 되었는지 심각한 질문이 제기된다.
서구 유라시아와 북부 아프리카의 광대한 대륙에서 보면 인간 집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미 가축이 되었던 암소, 암양, 암염소 같은 동물로부터 젖을 짜서 용기에 모을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분명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