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이중톈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이중톈 지음
에버리치홀딩스 / 2008년 5월 / 444쪽 / 18,000원
제1장. 천하일통天下一統역사의 발전과정은 때로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원전 221년, 대장군 왕분王賁이 맹호 같은 진秦나라 군대를 이끌고 동해東海 끝까지 진격했을 때, 그 누가 알았겠는가? 70여 개의 성과 사방 천리의 땅을 호령하며 일찍이 '그 서쪽 경계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던' 제齊나라 왕 전건田建이 스스로 문을 열어 도둑에게 절하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할 줄을. 중국 역사상 최후의 방국邦國(고대 제후의 봉토를 가리킴. '邦'이 큰 개념이고 '國'이 작은 개념이다)이 멸망하면서 길고 긴 제국의 전사前史도 그 끝을 고했다. 오랫동안 야심을 키워온 진 왕국이 마침내 천하를 병탄하고, 이로부터 "전국을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법령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중앙집권의 통일 제국이 정식으로 막을 올렸다.
이는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로 갑작스럽게 닥쳤다. 물론 진나라의 군신들이 장기간에 걸쳐 이를 준비했으며, 오랫동안 갈망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빨리 승리를 얻을 줄은 정말 몰랐다. 채 9년도 되지 않아 이른바 육국六國이 모두 진에게 무릎을 꿇었다. 거의 1,2년 사이에 한 나라씩 멸망하였으니, 파죽지세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화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칼과 창에만 의지하던 2천여 년 전에 이런 전과를 냈다는 것은 솔직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 기적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장 주목하는 문제, 즉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논한 바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유명한 문장으로는 가의의 『과진론』외에도 두목杜牧의 『아방궁부阿房宮賦』, 유종원柳宗元의 『봉건론封建論』, 소철蘇轍의 『육국론六國論』등이 있다. 우선 가의는 육국 연합군이 진나라에 승리하지 못한 이유로 객관적인 요인을 들었다. 즉 진나라 지역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매우 견고"하여 사면이 요새와 같은 훌륭한 지리적 여건인 '사색지국四塞之國'으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목의 관점은 이와 다르다. 그는 육국과 진 모두 '인의를 시행하지 않아' 멸망했다고 여겼다. 소철의 주장은 또 다르다. 그는 육국이 망한 이유는 탐람貪 과 단견短見 때문이라고 했다.
소철의 『육국론』은 주로 정책과 책략에 주안점을 둔 것이 분명하다. 비록 핵심을 찔렀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근본을 붙잡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의의 『과진론』은 육국 멸망의 원인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기 어렵다. 육국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형세가 불리'했다면, 진나라가 육국을 멸한 것은 '형세가 이로웠기' 때문일까? 만약 모두가 불리한 상황이었다면 그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니, 서로 다툼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았겠는가? 두목의 『아방궁부』역시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나 동시에 문제도 있다. 진 왕조가 인심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여섯 나라가 백성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증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육국이 망한 것은 백성들 때문이 아니라 진나라 때문이다. 나름대로 가장 안목이 높은 견해는 유종원의 『봉건론』이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은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제도'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종원은 진나라가 멸망한 것은 제도의 문제이지 시정施政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진나라는 어떤 제도를 창립하였으며, 그 안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들어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육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새롭게 진 왕조를 건국한 초기로 되돌아가 과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2장. 중앙집권中央集權제국은 권력 사회의 전형적인 형태이며, 황제는 제국의 핵심이다. 진 제국은 건국 초기 어전회의에서 다음 두 가지를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는 제국의 원수를 향후 '황제'로 칭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제帝란 하늘의 호칭이고, 왕은 사람의 칭호"라고 했으니, 제와 왕을 동일한 뜻으로 볼 수 없다. 왕은 부족 시대의 칭호이다. 좀 더 큰 부족의 수령도 역시 왕이라고 칭했다. 부족의 왕이란 뜻이다. 나중에 비교적 큰 제후국의 임금 역시 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제후왕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초나라 국군은 천자가 자작子爵으로 봉했지만 스스로 왕이라고 칭했다. 이에 비해 '제'는 함부로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칭호가 아니다(전국 말기 진과 제가 '제'를 칭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왕'으로 복귀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더욱이 이전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칭하는 것이 '인칭人稱'(왕)이니 어찌 유일무이한 '천호天號'(제)와 같을 수 있는가?
실제로 진시황이 명호를 바꾼 것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시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국호인 '진'을 '주'나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왕'을 '황제'나 또 다른 칭호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정권으로 보자면 '진'은 그저 왕국일 뿐이나 지금의 '진'은 제국이다. 만약 '왕'이란 칭호를 계속 쓴다면 이미 멸망한 제국諸國과 구별할 방법이 없으며(육국의 임금은 왕이라고 칭했다), 주 왕실과도 구별될 수 없다(주 천자 역시 왕이라고 칭했다). 주 천자는 명의상 '천하의 주인'이지만 진황제는 실질적인 '천하의 주인'이다. 그러니 어찌 '왕'이란 칭호를 쓸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진이 일으킨 이 '혁명'이 단지 '왕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제국 제도)로 낡은 제도(방국 제도)를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진시황은 이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시황제', 즉 '새로운 제도 하에 첫 번째 인물'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왕 또는 제로 칭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황제'는 '군현'과 함께 논할 수 있으며, '왕제王制'는 '봉건'과 병존한다는 사실이다. 예전처럼 '왕'이라고 칭한다면 이는 계속해서 봉건제를 실행하겠다는 의미이다. 진시황은 이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봉건제는 '천하가 함께 누리는 것'이지만 군현제는 '일인 독재'이기 때문이다.
일인 독재에 관해 말하자면 봉건제와 군현제 두 가지 제도의 우열이 어떠한지는 일목요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손으로 제국의 제도를 창건한 진시황이 어찌 '제'가 아닌 '왕'으로 칭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방국 제도 아래서는 지존인 '왕'뿐만 아니라 지강至强인 '패覇'가 존재한다. 왕은 지극히 존귀하지만 패는 지극히 막강하다. 지존과 지강이 같은 인물이 아닐뿐더러 패권을 다투는 일조차 합법적이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전란이 발생하고 결국 왕까지 위협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지존과 지강을 통일시켜야 하며, 이런 통일체가 바로 황제이다.
사실 진시황도 단지 황제라는 허명에 만족하여 득의 양양 춘풍에 도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와 관련된 일련의 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철저하게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발걸음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정책이나 법령을 엄격하고 신속하게 실행하여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국토를 통일하고 군대를 통일하고 법률을 통일하고 세수稅收를 통일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와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했다. 또한 문자를 통일하는 한편 사람들의 사상과 행위 통일도 시도했다.
진시황의 이러한 개혁은 대부분 '통일대업'으로 간주되어 큰 환영과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을 뒤엎을 만한 위대한 업적을 노래 부르고 찬미할 때, 오히려 그 이면에 숨은 전제와 권력 집중은 그다지 살펴보지 않게 된다. 분명 통일統一과 일통一統은 같은 것이 아니다. 권력 집중 역시 반드시 전제는 아니며 독재도 아니다. 진시황에게 통일과 권력 집중은 같은 문제 안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며, 전제야말로 그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제와 제제帝制는 같을 수 없다. 황제가 아니어도 독재를 할 수 있고(사담 후세인처럼), 황제라고 할지라도 독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입헌군주제일 경우). 그러나 황제가 없는 제국은 제국이라고 할 수 없으며, 황제라는 칭호가 있다면 결국 권력 집중 쪽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원세개袁世凱가 세상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칭제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황제가 곧 정책 결정권과 비준권을 의미하는 것이자 입법권, 사법권, 감독권 및 최고 판결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이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억지일뿐더러 유해하기까지 하다. 사실 황제처럼 그 어떤 감독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은 결국 왕조의 패망을 이끄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제3장. 윤리치국倫理治國제국의 성가신 문제는 권력 집중에 있으며, 권력 집중의 성가신 문제는 황제에게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권력 집중이나 중앙집권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권력을 일개인에게 즉 황제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한대의 삭번에서 명대의 재상제 폐지까지 제국은 부단히 권력을 집중해왔다. 사실 중국 고대 정치가들은 인치에 대해 찬성한 적이 거의 없다. 중국 고대에는 사람을 법보다 중히 여기는 '중인경법重人輕法'의 사상이 존재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사람이 집행하는 것이고 그러나 사람이 시행하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있으되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죽음을 피하지는 못한다. 황제가 죽으면 그의 정치도 함께 끝난다. 이를 간략하게 '인망정식人亡政息'이라고 말한다.
사실 중국 고대의 법은 역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부합하게 '왕법' 즉 제왕이 전정(독재)을 실시하는 법으로 칭해졌다. 이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 규정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성숙된 국가로서의 제국이 더욱 중시한 것은 권력이지 법률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의 '법률'은 단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도록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는 '왕의 법'이니 당연히 '민중의 법'이 될 수 없었다. 제국의 법치는 법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국의 덕치德治 역시 덕치가 아니다. 법치가 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덕치가 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예치禮治가 오히려 자신과 남을 속이고 인치仁治가 우담바라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리니, 이것이 제국의 실상이다.
윤리도덕이 통치의 도구로 변하면 어쩔 수 없이 투쟁이 무기가 되기 마련이다. 궁정과 관료 사회의 투쟁 속에서 적대적인 쌍방이 모두 학식을 갖춘 독서인들이니 자신들이 배운 시문의 구절을 적절하게 옮겨 상대방의 죄상을 폭로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싸움은 제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제국을 내적으로 소모시키는 원흉이 되었다. 아마도 처음 이를 활용한 이조차 전혀 이런 결과를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윤리치국 또는 독존유술의 원칙으로 제국의 제도를 유지하고 보호하면서 중국은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제일 먼저 언급할 것은 사상의 부재이다. 중국은 일찍이 사상이 상당히 풍부한 민족이었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은 물론이고 그 밖에 여러 학파들도 나름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인도의 불교, 히브리인들의 종교 학설과 더불어 야스퍼가 말한 '축의 시대(Axial Era)'를 구성하는 찬란한 성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선진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제국 시대로 진입하자 중국은 더 이상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사상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학문뿐이다. 그러나 사상이 없는 학문은 학술을 구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중국의 학술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즉 사상은 드물고 학문만 존재했으며, 지혜는 드물고 지식만 난무했다. 또한 쟁명은 사라지고 언쟁만 남았으며, 진정한 연구는 드물고 연구하지 않아도 될 하찮은 문제에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니 단지 파벌만 존재할 뿐 학술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과학정신과 이성 분석, 그리고 자유로운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거대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제국은 사상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 또한 있을 수 없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진정한 도덕이 있을 리 없다. 물론 피상적으로 볼 때 윤리로 나라를 다스리는 윤리치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덕이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예양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폭력을 즐기고 잔혹함을 용인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이는 윤리치국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제국의 윤리치국은 진정으로 도덕을 널리 선양하고 배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등급 질서를 유지하고 권력집중의 집권 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이성(사상)이나 실천이성(법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인군人君'은 쉽게 '폭군'으로 바뀌고, '양민' 역시 쉽게 '폭민'으로 변하고 만다. 평상시에 치안을 유치하고 예교를 널리 시행해온 지방의 전신들도 쉽게 향리를 횡행하며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고 백성을 함부로 유린하는 토호, 열신劣紳으로 변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은 제국이 진심으로 유가 학설을 신봉하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관원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는 높은 자리에서 단지 상징으로 존재할 따름이며, 일반 서민들은 아무런 권리나 세력도 없기 때문에 어떤 역량을 형성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오직 관원만이 진정한 제국의 중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관료집단이 붕괴하여 대열을 이룰 수 없으면 왕조의 멸망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국의 관원과 관료 체제가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관원들과 체제가 어떻게 최종적으로 왕조의 멸망을 이끌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제4장. 관원대리官員代理제국의 가산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것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역사의 하늘은 언제나 의심으로 가득 차고, 여러 가지 문제와 성가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치는 인치도 아니고 법치도 아니며,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의 덕치도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관치官治'일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관료정치라고 말한다. '관치'란 '관리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관료집단에 의한 이러한 정치는 의심할 바 없이 제국의 제도에 가장 부합한다. 이미 제국이 성숙한 국가이므로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어떤 한 개인에게 맡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제국제는 필연적으로 방국제를 대체하고, 군현제는 필연적으로 봉건제를 대체하게 된다. 분권제 역시 집권제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이미 권력이 집중되었으니 천도를 여러 집안이 나누어 대리하지 않고 '독가'가 대리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이 이미 방대해지고 인구 또한 많아졌으니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황제가 직접 나서서 하늘을 대신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또한 가능하지도 않다. 보다 합리적이고 가능한 방법은 관원을 파견하여 대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집권제'와 조합을 이루는 '대리제'이니, 황제는 천도를 대리하고 관원은 황권을 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