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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과 포용

하워드 가드너 지음 | 북스넛
통찰과 포용

하워드 가드너 지음

북스넛 / 2007년 1월 / 600쪽 / 28,000원

제1부 리더란 무엇인가



리더십의 인지적 접근


우리는 리더라고 하면 대개 한 시대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거장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리더의 개념은 '말과 개인적인 모범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행동, 사상,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십의 방식은 크게 직접적인 방식과 간접적인 방식으로 구분된다. 조직이나 국가를 선도하는 리더들은 청중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직접적인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리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업적을 통해 간접적인 리더십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청중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역설함으로써 큰 영향을 미쳤던 처칠 같은 인물을 '직접적인 리더(direct leader)'라고 하고, 많은 이론들과 논문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펼쳐내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을 '간접적인 리더(indirect leader)'라고 할 수 있다.

리더들이 갖는 공통점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단순히 tell(입으로 말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relate(사상을 전한다)의 의미이며,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자아에 대한 이야기, 집단에 대한 이야기,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인에게 자아의식이나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은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인들은 소속 집단과 관련해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며, 그러한 가치의 명확한 언명을 갈망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편으로는 개인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개인을 넘어서는 가치의 진정한 종합을 열망한다. 어떤 조직화된 종교나 철학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따라서 비전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파악하여 이야기를 창조해야 한다.



내가 연구한 많은 리더들은 자신이 지닌 메시지의 여러 가지 장점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했고, 청중들이 부당하게 여기는 사안들을 다루었으며, 그들의 생각과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세계관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즉, 리더는 과거의 가치들 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것들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사안들에 비추어 재검토하고, 미래의 사건들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으며, 집단 내에서 개인의 기여를 허용하는 이야기와 실천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인간의 발달주의와 관련되는 까다로운 논점이 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5살이 되면 교육받지 않고도 소위 '이론'이라 칭할 만한 강력한 개념들을 스스로 발달시킨다고 한다. 가령 무거운 물건이 가벼운 물건보다 빨리 떨어진다거나, 움직이는 실체는 살아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어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립된 개념들이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생의 초기에 발달시키는 개념, 즉 '교육받지 않은 마음'이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적 특성은 리더십 적용에 대단히 중요한 요건이 된다.



아이들은 대개 문제를 단순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선과 악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으로 규정되며, 거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을 선의 편으로 규정하고 악을 배척한다. 이러한 아이들과 달리 성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지 생각을 통합한다. 한편으로는 여러 가치들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입장이 더 적절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들 역시 단순한 흑백논리에 기초한 이야기에서 더 안정감을 느끼고 무의식적인 요소에 더 크게 동요된다고 한다. 즉, 합리적인 주장의 장점들보다는 연설자의 명성이나 향수나 불만 등의 감성에 더 자극을 받는데, 대개 교육받지 않은 마음이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따라서 이질적인 공동체를 상대하는 리더는, 대중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동기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교육받지 않는 마음의 영속적인 힘을 다룰 수 있어야만 한다. 즉, 리더십이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인지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리더십에 적용되는 사례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제2부 시대와 사람을 변화시킨 리더들



마거릿 미드 - 원시문화 속에서 미래를 발견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유롭게 성장했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두 번이나 대학을 옮긴 그녀는 최종적으로 선택한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컬럼비아 대학원의 인류학과장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교수는 인종과 문화에 관한 문제에 대해 확고한 의견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 유전적 요인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경험적,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드는 이러한 보아스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함께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23세의 젊은 나이에 남태평양의 사모아로 떠난다.

미드는 사모아인들의 성장과정, 특히 청소년기의 특징을 면밀히 탐사하고 기록했다. 당시 그녀는 보아스 교수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맡고 있었는데, 그것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반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일이었다. 20세기 초반의 학자들은 인간의 청소년기가 '폭풍과 스트레스'의 특징을 불가피하게 갖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아스는 서구 청소년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기질과 성향이 '원시적인' 사회의 청소년들에게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사모아의 젊은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미드는 사모아인의 청소년기가 서구인의 청소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15~20명의 대가족 안에서 성장하는 사모아의 가족구조는 한두 가지의 핵심적인 결합요소나 강한 열정으로 결집되어 있는 서구인들의 관계와는 상이한 것이었다. 사모아인들은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겪지 않았으며, 성적 관계에 있어서도 자유로웠다.



1년 동안의 사모아 탐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미드는 첫 번째 저서 『사모아인의 성년(Coming of Age in Samoa)』을 출간한다.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탐구한 인류학적 결과를 소개하고, 미국인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도 눈길을 돌려봄으로써 자신들의 삶과 교육 문제의 개선방안을 찾아보라고 촉구했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를 겪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미드의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주석이나 난해한 표현 등의 학문적 치장을 완전히 배제한 유려한 문체 덕분에 미드의 책은 소설처럼 읽혔다. 학계에서는 아직 나이도 어린 여성학자가 단 한 차례의 사모아 사례연구를 발표하면서 예리하고 단호한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논쟁중인 과학적 문제들을 연관성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서로 평가했다.



미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탐사활동과 집필활동을 계속했으며, 이를 통해 인류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았다. 하지만 10년 동안 지속되던 그녀의 탐사 작업은 일련의 사건들로 중단된다. 1939년 딸을 출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워싱턴 행정부에서 근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공직에서 나오면서 결혼생활도 끝냈다. 사실 미드의 삶에는 여러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세 번 결혼을 했으며 인류학자였던 두 번째 남편과 세 번째 남편이 그녀의 탐사에 대동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녀에게는 많은 남성과 여성 연인들이 있었으며 종교생활도 약간 불투명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 성공회 신자로 예배에 참석했으나, 암 진단을 받은 후에는 전통치료사를 찾아다녔다. 이러한 성향은 처음에 통념에 도전하고자 시작한 것이 점차 강박적 경향을 띤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생활도 끝낸 미드의 리더십은 이제까지의 간접적인 리더십에서 직접적인 리더십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녀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의 인류학계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제들인 유년기, 가정생활, 성 등의 문제를 다룬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점차 인류학과 관련된 전문 서적보다는 대중적인 사회학 쪽의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쇄매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하여 그동안 축적해온 '마음속 서류함'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여 미국사회를 진단하고 다른 문화권의 진실성과 타당성을 미국인들에게 인식시켰다. 특히 인간 발달이라는 분야에서 많은 협력을 이끌어내었으며, 인공두뇌학이나 의사소통론처럼 약간 동떨어진 분야에까지 손을 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교육받지 않은 일반 청중을 위해 학문적 이론을 단순화시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미드의 사례에서 보건데 리더가 자신의 뿌리가 된 기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거나 그 분야의 중심적인 가치관을 위협하면 동료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드는 내가 이 책에서 밝힌 리더의 의미, 즉 '개인들의 사상, 행동, 감정에 영향을 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분명히 리더라고 볼 수 있다. 마거릿 미드는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보다 폭넓은 공동체를 상대로 그리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간접적인 리더십과 직접적인 리더십을 모두 발휘했다. 그녀의 메시지가 서구문화 전반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녀의 지적인 힘과 의사소통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가를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리더십의 영향력으로 마거릿 미드는 35세의 나이에 선구적인 인류학자가 되었고, 1978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를 잃지 않았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 사려 깊은 리더십을 발휘한 물리학자

1904년, 뉴욕의 독일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 역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총명하고 조숙했으며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하버드에서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으며, 특히 언어를 굉장히 쉽게 습득했다. 그는 산스크리스트어 원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어를 6주만에 배워 본토어로 물리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긴장과 갈등을 안고 살았던 부모들로 인해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이었는지 고등학교 때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친구를 목 졸라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상황을 충동적으로 제어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관심사에 대해서는 거의 초인적인 집중력과 능력을 발휘했고 물리학에 심취하면서 마침내 우울한 개인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소장학자 시절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여 양자역학의 관점을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버클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는 내내 훌륭한 이론물리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위대한 과학자에게 필요한 중요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좀 아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고 총명한 학생에게는 어려운 물리학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흥미를 유발시켜 창의적인 연구 활동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명석함과 이해력 면에서는 동료들 가운데 단연 뛰어났지만, 과감한 모험을 걸지 않았고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또한 자신만의 이론적 영역을 더욱 확장해 나가기보다는 번역이나 강의를 하고 다른 이들의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일에 만족했다.



1930년대 말부터 오펜하이머는 점차 좌파적 인물이 되어갔다. 마르크스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사회주의 이상을 숭배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역량을 발휘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943년 초, 그는 채 40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핵폭탄 제조를 위한 고속 중성자 반응 연구팀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물리학자들은 핵에너지를 방출시켜 강력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그 가능성을 일깨워주었고 그로 인해 맨해튼 프로젝트 팀이 결성된 것이다. 이제까지 간접적인 리더십만을 발휘했던 오펜하이머는 과학팀 책임자로서 직접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핵폭탄을 제조하려면 4,5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필요했고 그들의 관심, 협력, 사기를 지속시켜야 했으며,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도 오펜하이머는 전국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데려와 그들의 복지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기적인 토론을 장려하면서 탁월한 팀워크를 조성했다. 그는 논쟁에도 참가했는데 이제껏 거침없이 드러냈던 오만하고 독단적인 기질을 놀라울 정도로 억제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보다 큰 그림'을 보게 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폭발의 도덕적인 면에 의구심을 나타냈는데,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이 합리적인 세계 건설을 위한 기반으로 어떻게 관련되는지 인식하게 해주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지나친 과로와 흡연, 그리고 좌파로 지목되어 보안부대에서 녹초가 되도록 취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계속 사령탑을 맡았고 1945년 여름, 마침내 그 과업을 극적으로 완수했다.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치명타를 가하고 전쟁이 끝이 나자 대부분의 동료 과학자들은 대학이나 연구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맛을 체험한 오펜하이머는 여러 정치적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보수주의와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격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인사들은 이 현대판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었다. 오펜하이머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반대파들에 의해 계속 반역자로 비판을 받게 되자 그는 청문회를 자청했다. 하지만 본래 내향적인 성격의 그는 쏟아지는 인신공격에 적절하게 변호하지 못했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다시는 공직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연구소 소장직은 계속해서 수행했으며 학술적 활동도 다양하게 펼쳤다. 그리고 몇 년 후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하면서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오늘날 리더들이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과제가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비전문적인 많은 개인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오펜하이머의 사례는 큰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나 청중 속으로 뛰어드는 직접적인 리더십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가 보여준 대인지능은 완전히 몸에 밴 제2의 천성이라고 볼 수 없다. 오펜하이머는 기질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좁은 집단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얻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차별성과 우월감 그로인한 부적응 같은 것 때문일 수도 있다. 학계 동료들은 역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깊은 지식에 매료되었으나 이런 매력은 정치가들이나 군부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따라서 오펜하이머는 권력가들 앞에서 노예처럼 아첨을 떨었고 가정생활도 문제가 많았다. 그의 아내는 지독한 술꾼이었고 딸은 자살했으며, 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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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루스벨트는 뉴욕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잃는다. 그래서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지만 영국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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