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
이중환 지음 | -
택리지(擇里志)
이중환 지음
「사민총론(四民總論)」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고 모두 민(民)이었다. 그런데 민은 네 가지로 분류된다. 사(士)로서 어질고 덕(德)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주었고, 벼슬을 못한 자는 농(農)·공(工)·상(商)이 되었다. 혹 사대부라는 명호로 농·공·상을 업신여기고 농·공·상의 신분으로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것은 모두 그 근본을 모르는 자이다. 무릇 성인의 법이 어찌 사대부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 농·공·상이 과연 같지 않다는 말인가. 비록 그렇지는 않지만 후세에 와서 인품(人品)이 옛날보다 못하여 기품에 어짐과 어리석음이 있고, 술업(術業)에도 능통하고 막힘이 있다. 그리하여 사대부는 농·공·상의 일을 할 수 있어도 농·공·상을 본업으로 하던 자는 사대부의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득이 사대부를 중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세의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그러므로 귀함도 천함도 뜻대로이고, 높게 됨과 낮게 됨도 마음대로 하여, 침착한 모습으로 세상을 깔본다 할지라도 누가 감히 금단하겠는가. 그런즉 천하에 지극히 좋은 것은 사대부라는 명호이다. 그러나 사대부라는 명호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옛 성인의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농·공·상을 막론하고 사대부의 행실을 한결같이 닦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은 예도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예도는 부(富)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가정을 차리고 직업을 마련하여 사례(四禮)로써,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거느려, 문호(門戶)를 유지할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대부는 살 만한 곳을 만든다. 그러나 시세(時勢)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人事)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팔도총론(八道總論)」
우리나라는 팔도로 나뉘는데, 평안도는 심양(瀋陽)과 이웃하였고, 함경도는 여진(女眞)과 이웃이며, 강원도는 함경도와 이어져 있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이어져 있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이며,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卞韓)·진한(辰韓)지역이고, 경기·충청·전라도는 옛 마한(馬韓)과 백제(百濟)지역이다. 함경·평안·황해도는 고조선(古朝鮮)·고구려(高句麗)지역이었고,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蒔)지역이었다. 이 여러 나라들이 흥하고 망한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나라 말기에 태조 왕건이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웠고, 지금은 우리나라(조선)가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세는 동·남·서는 모두 바다이고, 북쪽 한 길만이 여진과 요동으로 통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백성은 유순하고 공손하나 기개가 옹졸하다. 지역이 길게 3천 리에 걸쳤으나 동서는 천 리도 못 되며, 남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면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오현(吳縣)·회계현(會稽縣)과 맞닿는다. 평안도 북쪽에 있는 의주(義州)는 국경 첫 고을로, 대략 중국 청주(靑州)와 위도가 비슷한데, 우리나라는 대체로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위치하였다.
평안도(平安道)
평안도는 압록강(鴨綠江) 남쪽, 패수(浿水)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은나라가 기자를 봉(封)했던 지역이다. 옛 경계는 압록강을 넘어 청석령(靑石嶺)까지로 <당사(唐史)>에서 말한 안시성(安市城)과 백암성(白巖城)이 이 지역 안에 있었다. 그런데 고려 초부터 거란(契丹)에게 차츰 빼앗겨, 압록강이 경계가 되었다. 평양은 감가사 다스리는 곳으로, 패수 위에 있다. 기자가 도읍하였던 곳이며, 기자가 다스렸던 까닭으로 구이(九夷)중에서 풍속이 가장 개명(開明)하였다. 또 강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주몽 시대의 옛 흔적이 매우 많으나, 전해 오는 말에 거짓이 많아 믿을 수 없다. 성(城)은 강가에 있고, 절벽 위에는 연광정(練光亭)이 있다. 강 건너 먼 산은 넓은 들판과 긴 숲 너머로 멀리 둘러서 있어,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으나, 제방과 개울이 적어 밭농사만 일삼는다. 그러나 하류에 있는 벽지도(碧只島)는 강 복판에 위치하여 강물이 줄면 진흙이 드러나서 지방 사람들은 그 안에다 논을 만들어 1묘(畝)에 1종(種)이나 수확한다. 강은 백두산 서남쪽에서 나와 300리를 내려오다 영원군(寧遠郡)에 와서 커져 강이 되고, 강동현(江東縣)에 이르러 양덕(陽德)·맹산(孟山) 물과 합치며, 부벽루 앞에 와서 대동강(大同江)이 된다. 강 남쪽 언덕은 10리나 뻗어 있는 긴 숲이다. 관에서 나무하는 것과 짐승 먹이는 것을 금지하여 기자 때부터 지금까지 무성하며, 해마다 봄여름이면 그늘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청천강(淸川江) 이남은 청남(淸南)이라 하는데 지형이 동서로 좁고, 이북은 청북(淸北)이라 하는데 지형이 동서로 뻗쳐 매우 넓다. 온 도(道)가 동쪽으로는 영(嶺) 등성이와 가까워서 산이 많고 평지가 적으며, 또 관개할 만한 냇물과 못물이 모자란다. 그래서 논이 아주 적고 들은 모두 밭곡식이다. 기씨와 고씨가 한창이었을 때는 땅은 좁고 백성은 많아, 산을 깎아 개간한 곳이 많았다. 그러나 그 후 여러 차례 청병의 분탕질에 땅이 많이 황폐해진 데다 왕씨가 통일한 뒤에는 백성이 삼남(三南) 지방으로 많이 내려가, 지금은 들은 넓으나 사람이 드물어 산에 농사짓는 곳이 적다. 서쪽으로는 바다와 가까운 여러 고을에서 조수를 막아 논을 만든 곳이 많다. 그러나 밭보다는 여전히 적어 온 도의 쌀값이 삼남보다 항상 비싸다. 민간 풍속에서는 뽕과 삼을 심어 베짜기를 일삼고 생선과 소금은 아주 귀하다. 그러므로 비록 바닷가 고을이라도 소금 굽는 곳이 많지 않다. 청북은 지역이 높고 추우며 북쪽 국경과 가까워 꽃과 과실이 없고 물산도 매우 적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몹시 구차하게 산다. 오직 평양과 안주 두 고을만 큰 도회지로 저자에 중국 물품이 풍부하다. 또 청남은 내지와 가까워 지방 풍습이 문학을 숭상하나, 청북은 풍속이 어리석으며 무예를 숭상한다. 오직 정주(定州)에서만 과거에 오른 이가 많이 나왔다.
함경도(咸鏡道)
평안도 동쪽에 있는 백두산의 큰 맥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하늘을 자른 듯이 끊어져서 상등성이가 되었다. 산등성이 동쪽이 바로 함경도로 옛 옥저(沃沮) 지역이다. 남쪽은 철령(鐵嶺)이 한계이고, 동북쪽은 두만강이 한계이다. 남북의 길이는 2천리가 넘으나, 동서로는 바다에 접해 있어 100리도 못 된다. 예전에는 숙신(肅愼)의 영역이었으나 한나라 때 현도(玄 )에 속하였다. 그 후 주몽이 차지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여진(女眞)이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때 함흥(咸興) 남쪽 정평부(定平府)를 경계로 하였다가 중엽에 윤관(尹瓘)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여진을 쫓아 버리고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를 지나, 선춘령(先春嶺)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그 후 금나라에게 땅을 돌려주고 또 함흥을 경계로 삼았다. 우리나라 장헌대왕(莊憲大王) 때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북쪽으로 땅 천여 리를 개척하고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과 병영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여진의 근거지가 모두 우리의 판도에 들어왔다. 숙종 정유(丁酉)년에 강희황제(康熙皇帝)가 목극등(穆克登)을 시켜, 백두산에 올라 두 나라 경계를 살펴 정하게 하였다.
함흥 이북은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사나우며 기후가 춥고 토지도 메말라 곡식은 조(粟)와 보리뿐이며, 벼는 적고 면화도 없다. 지방 사람들이 개가죽을 입고 추위를 막으며 굶주림을 견디는 것이 여진족과 똑같다. 산에는 속(貂皮)과 인삼이 많이 난다. 백성은 잘과 인삼을 남쪽 장사꾼의 무명과 바꿔 바지를 입지만, 이것도 살림이 넉넉한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한다. 바다에는 생선과 소금이 많이 난다. 그러나 바닷물이 맑고 사나우며, 바다 밑에는 바위가 많아 생선과 소금 맛이 서해 것보다 못하다.
황해도(黃海道)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 사이에 위치한다. 대개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맥이 함흥부 서북쪽에서 불쑥 떨어져 검문령(檢門嶺)이 되었고, 또 남쪽으로 내려와 노인치(老人峙)가 되었다. 대체로 이 도는 국도(國都) 서북쪽에 위치하여 지역이 평안도·함경도와 이웃하였으므로 활쏘기·말달리기를 좋아하는 한편 문학을 공부하는 선비는 적다.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납·철·면화·벼·기장·생선·소금 따위가 생산되고 있다. 비교적 부유한 자는 많은 편이나 사대부는 적다. 그러나 평야 지대에 있는 여덟 고을은 땅이 기름지고, 바닷가 열 고을은 경치로 이름난 곳이 많아 역시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지세가 서해로 불쑥 들어가서 삼면은 바다에 임하였고 동쪽 한 면 만이 남북으로 통행하는 한길에 닿아 있다. 북쪽에는 높은 영(嶺)이 있고, 남쪽은 강이 겹으로 막았다. 안팎이 산과 하수이며, 높고 험한 성곽이 많다. 또 넓은 들과 기름진 벌판이 있어 참으로 천부(天府)이며, 전략적으로 이용할 만한 지역이다. 세상에 일이 생기면 반드시 서로 다투게 될 요충일 것이니 이 점이 단점이라 하겠다.
강원도(江原道)
강원도는 함경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다. 서북쪽으로 황해도 곡산·토산 등의 고을과 이웃하였고, 서남쪽으로는 경기도·충청도와 서로 맞닿아 있다. 남북으로는 거리가 거의 천리나 되지만, 동서는 함경도와 같이 100리도 못 된다. 서북쪽은 산등성이에 막혔고 동남쪽은 멀리 바다와 통한다. 태산 밑이어서 지세가 비록 비좁지만 산이 나지막하고 들이 평평하여 명랑 수려하다. 동해는 조수가 없어 물이 탁하지 않아서 벽해(碧海)라 부른다. 항구와 섬 같은 앞을 가리는 것이 없어 큰 못가에 임한 듯 넓고 아득한 기상이 자못 굉장하다. 또한 이 지역에는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 높은 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넓고 멀리 아득하게 보이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 안에서 참으로 제일이다. 누대(樓臺)와 정자(亭子) 등 훌륭한 경치도 많아, 흡곡 시중대(侍中臺)·통천 총석정(叢石亭)·고성 삼일포(三日浦)·간성 청간정(淸澗亭)·양양 청초호(淸草湖)·강릉 경포대(鏡捕臺)·삼척 죽서루(竹西樓)·울진 망양정(望洋亭)을 사람들이 관동팔경(關東八景)이라 부른다.
이 지방 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하여, 노인들이 기악(妓樂)과 술·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 사이에서 흥겹게 놀며, 이를 큰 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제도 노는 것이 버릇이 되어 문학에 힘쓰는 자가 적다. 지역이 또한 두 서울과 멀어 예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 오직 강릉에서만 과거에 오른 사람이 제법 나왔다. 땅은 매우 토박하고 자갈밭으로 논에 1말 종자를 뿌려 겨우 10여 말을 거둔다. 고성과 통천만이 논이 가장 많고 땅도 토박하지 않다고 한다. 대체로 주민들은 고기잡고 미역 따며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그래서 땅은 비록 메말라도 부유한 자가 많다. 다만 서쪽이 고개가 너무 높아 이역과도 같으므로, 한 때 유람하기에는 좋지만 오래 살 곳은 아니다.
경상도(慶尙道)
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경상도는 강원도 남쪽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충청도·전라도와 경계가 맞닿았다. 북쪽에는 태백산이 있는데 감여가(堪輿家)의 말로는 하늘에 치솟은 수성(水星) 형국이라 한다. 낙동강(洛東江)이 온 도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서 강 동쪽은 좌도(左道)라 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아 한다. 좌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우도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에 힘쓰지 않아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은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그러나 땅의 기름지고 메마름이 혹 섞여 있고 인재 또한 좌도, 우도에 섞여 나왔다. 예안·안동·순흥(順興)·영천(榮川)·예천(醴泉) 등의 고을은 이백(二白)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여기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 도 안에서 장상(將相)·공경(公卿)과 문장과 덕행이 있는 선비와 공을 세웠거나 절의를 세운 사람, 선도(仙道)·불도(佛道)·도교(道敎)에 통한 사람 등이 많아 나와서, 이 도를 인재의 광이라 한다. 조선에 와서도 선조(宣祖) 이전에는 국정을 잡은 자들이 모두 이 도 사람이고, 문묘에 종사된 사현(四賢) 또한 이 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門人) 자제들과 어지러운 정국을 진정시킨 후부터는 경성(京城)에 여러 대를 살고 있는 집사람들만 치우치게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100년 동안에 영남 사람으로서 정경(正卿)이 된 자가 두 사람, 아경(亞卿)이 네다섯 사람이고, 정승된 사람은 없어, 관직이 높다 하여도 3품이고 아래로는 고을 수령 정도였다. 그러나 옛날 선배가 남긴 풍습과 혜택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아, 풍속이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며 지금도 과거에 많이 합격하는 것은 여러 지방에서 으뜸이다.
전라도(全羅道)
전라도는 동쪽은 경상도,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가 맞닿았는데 본래 백제 지역이다. 전라도는 땅이 기름지고 서남쪽은 바다에 임해 있어 생선·소금·벼·깁(絲)·솜(絮)·모시·닥(楮)·대나무·귤·유자 등이 생산된다. 풍속이 노래와 계집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며, 사람이 경박하고 간사하여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그러므로 과거에 올라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한 것은 대개 문학에 힘써 자신을 이름나게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땅의 영기로 태어나므로 전라도에는 인걸 또한 적지 않다. 전라 온 도가 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지방 물산이 풍부하며, 산골 고을이라도 냇물로 관개하는 까닭에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다. 바닷가 고을은 제방을 막아 관개하는데,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큰 제방을 우리나라에 와서 그냥 버려 둔 까닭으로 자주 가물고 수확이 적다. 어진 사람이 그 지역에 살면서 부유한 업을 밑받침으로 예의와 문행(文行)을 가르친다면 살지 못할 지역은 아니다. 또한 산천이 기이하고 훌륭한 곳이 많은데,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도록 크게 드러난 적이 없었으니, 한 번쯤은 모였던 정기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충청도(忠淸道)
충청도는 전라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다.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가 맞닿았다. 그리고 동북편 모퉁이가 되는 충주(忠州) 등은 강원도의 남쪽으로 불쑥 들어가 있다. 남쪽의 반은 차령(車嶺)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살면서 이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伽倻山)이 있는데, 이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이 곳은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과 병자년 두 차례의 난리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까운 곳은 학질과 염병이 많으며,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구릉(丘陵)과 원습(原 )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천석이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오직 보령(保寧)의 산천이 가장 훌륭한데, 고을 서편에 수군절도사의 군영이 있고 영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부른다.
경기(京畿)
강화부(江華府)는 남쪽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로는 50리다. 부(府)에는 유수관을 두어 다스린다. 북쪽으로는 풍덕(豊德)의 승천포(昇天浦)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고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이다. 부 좌우에는 성을 쌓지 않고 좌우편 산 밑, 강가에다 성 위의 작은 담처럼 돈대(墩臺)만을 쌓았다. 그곳에 병기를 간직하고 군사를 두어 외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고려 때 원나라 군사를 피해 10년 동안이나 여기로 도읍을 옮겨, 육지는 비록 낭패를 당했으나 섬은 끝내 침범하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에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병자년 후에 조정에서는 지난 일을 징계(懲戒)로 삼아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말먹이와 양식을 저축하여 비상시에 대비하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