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열전 - 후비
샹관핑 지음 | 달과소
중국사 열전 - 후비
샹관핑 지음
달과소 / 2008년 3월 / 463쪽 / 20,000원
제1장 중책을 맡아 나라를 일으킨 여걸들
대의를 세우고 그 이름을 남기다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쥐게 되었으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은 후궁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황후 마(馬)씨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후세들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마씨가 황후로서 공정한 일처리는 물론 태후의 자리에 있을 때 그녀의 세 오빠에게 후작의 작위를 부여하는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유장의 장제(章帝) 유달(劉 )과 벌인 유명한 작위 파동 때문이다.
황후 마씨는 부풍무릉 사람으로 아버지는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복파장군 마원(馬援)이다. 그녀가 10살 때 아버지 마원이 남쪽 지방을 정벌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오빠 마객경과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마씨는 계속되는 집안의 불행으로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짊어지게 되었다.『후한서(後漢書), 10권』마씨는 사촌 오빠였던 마엄의 추천으로 태자 유장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총명한 마씨는 위로는 황후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항상 예로써 대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서기 57년 유수가 병으로 죽자 유장이 보위를 이었고 마씨도 귀인으로 책봉된다. 당시 마씨는 아이가 없었고, 함께 궁에 들어온 고(賈)씨가 장제가 되는 유달을 낳는다. 유장은 마씨에게 유달의 양육을 맡겨 마씨는 고씨가 낳은 황자를 자신이 낳은 아이보다 더 정성스럽게 양육했다. 서기 60년 마씨는 황태후의 추천으로 황후가 된다. 유장은 비교적 덕망 있는 황제로 평가되며 특히 법제를 강화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엄격한 법 집행으로 감옥이 넘쳐나자 마황후는 여러 차례 유장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그 후 유장은 중요한 정책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마황후와 상의했고 때로는 그녀에게 직접 처리하게 했다. 일을 위임받은 마황후는 매우 공정하게 처리해 명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서기 75년 유장이 병으로 죽자 유달이 제위에 오른다. 유장이 법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제한한 것과 달리 유장은 외척이나 환관을 마음대로 중용했다. 76년 유달은 마태후의 오빠 셋을 후작에 봉하고자 했으나 마태후는 강력히 반대했다. 유달은 마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듭 마료 삼형제의 후작 책봉을 강행했다. 그러나 마태후는 황제에게 "후대에 겸손하다는 명성을 떨치기 위함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외척들이 특혜를 입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후작책봉에 반대하며 오히려 가뭄으로 치솟는 곡식가격을 먼저 해결하라고 권했다.
4년 후 태평성대가 되자 유달은 외숙부들을 먼저 후작으로 봉하고 마태후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태후는 유달을 찾아가 크게 화를 내었고 마료 형제들은 작위를 다시 반환했다. 이것이 마태후와 유달 간에 벌어진 유명한 작위 파동이다. 마태후가 친인척을 위해 작은 욕심도 채우지 않은 것과, 특히 형제들에 대한 유달과의 작위 반대일화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여자요순(女中堯舜)으로 불린 송나라 영종의 고(高)황후'여자요순(女中堯舜)'으로 불린 송나라 영종(英宗) 조서(趙曙)의 고(高)황후도 외척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녀는 황후로 있으면서 일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 고사림(高士林)이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오랫동안 역임해 황제가 그의 거처를 궁으로 옮겨주려고 하자 고황후가 "고사림은 조정에 적을 두고 있으며 이미 과분한 은혜를 입었다"며 단호히 반대했다. 고사림 또한 황제인 매형과 누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의를 중시하며 사욕을 채우지 않는 관리가 되었다.
조서가 즉위 4년째인 서기 1067년 사망하자 장자인 조욱이 보위에 오르고 고씨는 황태후에 봉해졌다. 고태후는 지나치게 관직을 차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외척들의 정치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송사(宋史), 464권』 또한 친인척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사가들은 그녀가 정치에 참여한 9년 동안을 '나라가 청명하고 평안하여 안정적이었다. 참으로 여자요순(女中堯舜)이라 할 만하다'고 찬양하였다.
현명하게 군주를 보좌한 당태종 이세민의 장손(長孫)황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당나라를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강성한 왕조로 만들었다. 여기엔 이세민 본인의 뛰어난 통치능력 이외에도 황후 장손씨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서기 613년 당나라가 아직 세워지기 전, 독서를 좋아하고 예절바르던 13살의 장손씨는 15살의 이세민과 결혼한다. 5년 후,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건국하여 이세민이 태왕으로 봉해지자 장손씨도 태왕비에 책봉된다. 이후 장손씨는 이연을 극진하게 모시고 비빈들에게 공손했으며 힘을 다해 내조했다. 『구당서舊唐書, 51권』
이세민은 그의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제거하는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데, 장손씨도 직접 그 현장에 나가 남편을 도왔다. 형제들을 축출한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을 압박하여 황위를 양위받자 장손씨도 황후에 책봉된다. 장손씨는 이후 10년간 황후의 자리에 있으면서 겉치레를 하지 않고 전권을 휘두르지 않아 이세민의 신뢰를 얻는다. 그녀는 친정식구는 물론 자식들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했다.
장손황후의 오빠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이세민과 '포의지교(布衣之交)'이자 현무문의 정변 때에는 이세민의 용장이었다.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장손무기를 요직에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장손황후는 이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세민은 장손황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손무기를 좌무후대장군, 사부상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황후는 오빠를 불러 스스로 사직하도록 했다. 또한 장손황후는 이세민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나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바로 직언을 하여 그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서기 636년, 36세의 장손황후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세민은 장손황후를 양좌(良佐)로 부르며 슬퍼하였고, 다시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나타냈다.
섭정을 잘해 '여정치가'로 칭송받은 동진의 저태후동진(東晋)의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의 황후 저산자는 61세까지 6명의 황제를 돌보며 거의 40년을 섭정하였다. 저태후는 중국 역사상 섭정 후비 중 사리판단이 가장 정확했던 여인으로 꼽힌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거나 왕조에 위기가 닥쳐오면 그녀는 위엄과 명망으로 그 어려움들을 헤쳐 나갔다. 서기 342년, 사마악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녀는 황후로 책봉된다. 사마악이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당시 두 살에 불과했던 큰아들 사마담(司馬聃)이 목제(穆帝)로 즉위한다. 그녀는 섭정을 원치 않았으나 대신들이 저태후에게 섭정을 상주하고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그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저태후는 태극전에 특별히 마련한 흰 비단 휘장 뒤에서 두 살 난 사마담을 가슴에 안고 정사를 돌보았다. 사마담이 15세의 성인이 되자 저태후는 그에게 전권을 돌려주었다.『진서晋書, 32권』
서기 361년, 19세의 사마담이 병으로 죽자 당시 21세이던 사마비(성제 사마연의 아들)에게 황위를 계승시킨다. 그러나 사마비는 도가사상에 빠져 식사도 거른 채 늘 불로장생 선약(仙藥)만을 복용했고, 결국 재위 4년 만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한다. 사마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태후는 그의 동생 사마혁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 그러나 당시 전진(前秦)과 전연(前燕)을 정벌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황제를 세우려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환온을 저지하는 것이 혼란을 초래할 것을 염려한 저태후는 뒤로 한 발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환온은 사마욱을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지만 그는 채 2년도 안돼 죽고 사마욱의 13살 난 아들 사마창명이 효무제로 즉위한다. 다행히 환온도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저태후는 그녀의 마지막 섭정을 하게 된다. 저태후는 2년 후 황제가 다 자랐다는 이유로 사마창명에게 대권을 돌려준다.
저태후의 마지막 섭정 중에 동진은 큰 위기에 봉착한다. 북방의 전진(前秦)왕조가 부견(符堅)의 통치하에 강성해져 줄곧 동진을 노렸던 것이다. 서기 384년, 부견은 보병 60만, 기병 27만을 이끌고 동진을 쳐들어왔다. 이에 저태후는 사안(謝安)을 중용하여 겨우 8만의 병력으로 전진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대로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비수( 水)전투'이다. 비수전투를 승리로 이끈 저태후는 현양전(顯陽殿)에서 숨을 거두었다. 40여 년간을 섭정했던 저태후는 강함과 유연함을 겸비하여 변화에 잘 대처하였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동진의 난관들을 극복했다. 수많은 섭정후비들 중에 저태후의 수완은 남달랐고,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과감하고 생활이 검소하여 후대에 '여정치가'로 칭송되었다.
섭정으로 역사의 죄인이 된 자희태후섭정을 잘해 후대의 칭송을 받는 동진의 저태후와 달리 섭정 후비 중 중국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되는 여인이 있다. 무려 반세기 동안 세 차례의 섭정을 한 청나라 함풍제(咸豊帝) 혁저(奕 )의 황귀비 예허나라씨는 권력을 독점하다 국권을 상실해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자희태후(慈禧太后)라 불리며 흔히 서태후로 알려져 있다.
자희는 보통의 궁녀에 불과했으나 출중한 미모에 노래와 춤에 능해 함풍제 혁저의 총애를 받았고 후에 동치제(同治帝), 광서제(光緖帝) 시절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서기 1851, 혁저가 황제로 즉위해 새 궁녀를 선발할 때 16세의 자희는 원명원을 담당하는 시녀로 뽑힌다.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 1권』 1856년, 자희는 후에 목종(穆宗이 되는 재순(載淳)을 낳아 의귀비(懿貴妃)에 봉해진다. 혁저는 즉위하여 뉴호록(흔히 동태후로 불림)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자희는 비록 일생동안 황후는 못되었지만 계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높고 권력욕이 강해서 결국 청나라를 50년간이나 통치하는 역사적 인물이 된다.
자희의 정치생활은 혁저가 죽은 후 시작되었다. 서기 1861년, 31세의 혁저는 죽기 전에 5살의 재순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재원(載垣) 등 어전대신 8명에게 국정을 도우라고 유언한다. 동치제 재순은 즉위하여 뉴호록씨와 자희를 태후로 존(尊)한다. 그러나 8명의 대신들은 황제의 유언을 받든 고명대신이라는 미명아래 국정을 제멋대로 농단했다. 27세의 자희태후는 혁저의 이복동생인 혁흔에게 비밀서찰을 보내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기상(祺祥)정변'을 일으켜 8명의 고명대신 중 3명을 죽이고 나머지 5명은 파면시켜 노역장으로 보냈다. 자희태후는 그해 말 정식으로 뉴호록씨와 함께 섭정을 선포한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섭정이다.
6살에 즉위하여 13년째를 맞은 1875년, 재순은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매독에 걸리고 천연두 합병증까지 더해 죽는다. 재순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을 놓고 자희태후는 화려한 권모술수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권력을 움켜쥔다. 자희태후는 혁저의 동생 혁현의 4살짜리 아들 재첨을 안고 황제 즉위를 선포하며 두 번째 섭정을 시작한다.
1886년 재첨이 16세의 성인이 되자 스승 옹동화 등은 황제가 친정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첨은 스승 옹동화의 지지 하에 혁명파인 강유위를 등용하여 정치, 문화, 교육, 재정, 경제, 군사 등 다방면에서 철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898년 자희태후는 개혁세력의 주요 인물을 모두 제거하고, 재첨에게 병에 걸렸다는 조서를 강제로 쓰게 해 그를 유폐시키고 다시는 조정 대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세 번째 섭정이다.
자희태후의 섭정기간 동안 대내적으로는 그녀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농민들의 봉기가 계속 되었다. 그녀는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의화단운동 등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대외적으로는 열강들과 전쟁에 잇따라 패하여 끊임없이 화의를 청한다. <시모노세키조약>, <중러밀약>, <신축(辛丑)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맺어 국권을 많이 상실하였다. 이 조약들은 모두 자희태후가 의견을 내고 체결한 것이며, 이로 인해 제국 열강들은 청나라에서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중국 역사상 섭정기간이 가장 길고 권모술수가 능하고 악랄했던 자희태후는 봉건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에 등장하여 수많은 백성들에게 고통과 재난을 안겨주었다.
제2장 절세미인이 한순간에 신분이 바뀌어 야심을 품다
비천한 집안 태생의 후비후궁에서는 궁녀의 지위가 가장 낮다. 신분이 낮고 잡일이나 하는 궁녀들이 후비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 돼지를 도살하던 백정은 가장 비천한 직업 중 하나였지만 역사상 세 명의 후비가 백정의 딸이었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유굉(劉宏)의 황후 하(何)씨, 진(晋)나라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의 부인 사구(謝玖), 그리고 유송(劉宋)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귀비 진묘등(陣妙登)이다.
'백치황제'로 불린 진나라 사마충의 숙원 사구는 비록 출신이 천하였지만 세상 물정에 밝고 성격이 조용하고 우아한 여자였다. 사구가 입궁할 때 사마충은 아직 황태자였다. 당시 그의 부친인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사마충의 지능이 낮아 남녀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사구에게 동궁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서기 276년, 사구는 후에 태자가 되는 사마휼(司馬 )을 낳는다. 서기 290년, 사마염이 병사하자 사마충이 혜제로 즉위한다. 14살의 사마휼은 태자로 책립되었고 사구는 숙원으로 봉해진다. 그리고 왕비 가남풍(賈南風)은 든든한 집안을 배경삼아 황후가 된다.
가남풍은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을 뿐 아니라 그 마음씨도 음험하고 악랄했다. 가남풍은 딸만 얻고 아들을 낳지는 못했는데 이 때문에 사구를 질투하고 미워했다. 사마휼이 후에 황제에 오를 것이 걱정되어 갖은 방법을 동원해 태자에서 폐위시키려고 했다. 서기 299년 가남풍은 사마휼을 속여 후궁으로 불러들인 뒤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사마충아! 사마충아! 너는 일찍 죽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와 후궁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란 글을 베껴 쓰게 한 뒤 바로 황제인 사마충에게 보냈다. 이에 사마충은 사마휼을 태자에서 폐위시킨다.
권력에 눈이 먼 가남풍은 허창에 감금돼 있던 사마휼을 심복 손려를 이용해 살해하고 만다. 사마휼이 23세에 살해당한 지 얼마 후, 그의 모친 사구 역시 가남풍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1년 후, 이 모든 것이 뒤집힌다. 사마륜(司馬倫: 사마휼의 당할아버지)이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가남풍 일당을 모두 주살한 것이다. 사구는 천민출신으로 후궁에 들어와 태자까지 낳으며 출세했지만 궁중의 잔혹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한 제왕을 섬긴 자매들금나라의 완안량(完顔亮)은 역사상 가장 악랄한 폭군이다. 정변을 통해 제위를 찬탈한 그는 13년의 재임기간동안 수많은 여자를 강점했고, 그중에는 외손녀를 비롯한 친족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금사(金史), 5권』에 따르면 그는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고 일단 마음에 드는 여인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차지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부녀자, 고모, 사촌동생 등 수많은 여인들이 후궁으로 입궁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