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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의 철학 여행

샤를 페펭 지음 | 현대문학
7일간의 철학여행

샤를 페펭 지음

현대문학 / 2008년 4월 / 260쪽 / 12,000원

Monday 우리는 사유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1. 사유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생각하거나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행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 행복의 바깥에 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그보다도 더 좋지 않다. 왜냐하면 사유라는 것은 생각하는 대상과 항상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 속에 있지 못한다. 사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행복했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이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사유작용이 없는 즉 생각이 멈춘 상태를 행복이라고 정의 내린다. 이제 사유는 행복의 적이라 할 수 있다. 방학을 즐겁게 보내다가 개학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거나 일요일 저녁의 불안감 등은 행복의 순간에 사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들이다. 행복한 바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래서 행복하다. 행복한 바보는 그렇기 때문에 근심걱정이 없다.

2. 사유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우연의 선물이니 이 우연에 대하여 고민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우연에 대한 정확한 사유를 통해서 행복을 획득하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우연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현재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일어났음을 말한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현재 존재하는 즐거움 속에서 그 우연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현재의 우연성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하면, 우연에 대한 생각들을 통해서 가장 단순한 즐거움만으로도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유는 생각을 통해서 미래를 앞당기거나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 따라서 사유라는 것은 행복의 현재성에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지만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갖는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즉 우리가 행복의 열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사유를 통해서이다. 사유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 행복은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말하기를 '아타락시아'라고 한다. 이 말은 근심걱정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완전한 쾌락이라고 하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으면 행복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사유만이 이것을 깨닫도록 가르친다. 사유 자체가 행복 자체를 이룬다.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관조적 삶'이라고 말하고 스피노자가 '지복'이라고 말한 것이다.



3.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사유를 넘어선 행동이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유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움직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불변의 '이데아계'를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사유하는 대상과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고 사유만을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인정하면서 경험적 감각세계를 부정했다)는 '부동의 일자(一者)'를 말했다. {{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진리를 그런 식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제는 진리를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사유하기는 움직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 행동을 준비하고, 그 효과를 따져보는 것이다. 사유는 아직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 혹은 아직 우리가 되지 않은 것을 그려보는 좋은 도구가 되며,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그것을 향해 우리는 행동으로 뛰어들게 된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행동을 통해 인간의 세계에서 실제 나의 자리를 찾아내면서이다. 사유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우리 행위의 공모자로서 행복을 다시 창조하라고 늘 우리를 행동하도록 자극 한다. 즉 사유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우리 삶에 더 많은 생기를 불어 넣어주며, 더 많은 행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Tuesday 법을 존중해야 하는가?



1.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준수한다

법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윤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더 이롭기 때문이다. 처음 국가가 탄생한 배경은 죽음과 도둑의 공포에 시달리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의하여 자신을 보호해주고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사람들이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자유와 자신들을 보호하는 무기를 한 사람에게 넘겨준다고 했다. 이것이 한 사람에게 주어진 법 집행권이다. 이 사람을 '리바이어던(머리에는 왕관을 썼고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몸은 수많은 개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이라 했는데 그에게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권이 주어졌다.



만약 국가가 나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계약은 파기되는 것이고,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있는 나의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법 준수의 원칙은 따라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무조건 법을 준수하는 것은 최악의 위험을 낳을 수도 있다

초기의 법은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에 법에 의해 자신의 육체를 구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습관 덕분에 이러한 구속이 더 이상 구속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기계적인 법 준수는 현대적인 인간의 실존의 위험한 징후이다. 다시 말해서 비인간적인 법에 대항할 수 없게 되는 경우는 개인의 자격으로 집단의 법에 대항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법을 준수함으로써 스스로를 악으로부터, 폭력적인 삶으로부터,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우리는 최악의 것에, 국가의 대규모적인 야만에 협력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 기계적인 법 준수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한 일에 대해 책임 회피를 위한 가면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법의 필요성이나 윤리적 의무, 혹은 법의 정당성을 들어 기계적인 법 준수를 정당화 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에 대해 사르트르가 고발했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 처벌받을 수 있고 다시 원시적 혼돈이 자리잡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법에서 이미 법에 대한 불복종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복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법에 복종하는 것이 윤리적인 의무일까? 아니다. 윤리적 의무는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 법을 준수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간 내에서 결정되는 상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 체제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동일한 범죄를 놓고 다른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과연 어떤 것이 정당한가? 법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 합법적일 뿐이다. 법은 어쩌면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이 폭력을 제한하기에 우리는 그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법을 거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따를 수도 없는 것이다.

3. 법을 준수하는 것만큼 법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 탄생 당시는 개인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제도였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아고라에 모여서 손을 들어 투표를 했다. 투표에 앞서 모두에게 유익한 공공선이라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즉 다른 사람을 존중하듯 법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기계적으로 법을 지키는 만큼 본격적인 깊은 생각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거나 국민 투표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회들을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법과 동시에 우리의 복종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법을 준수해야만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법에도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법이 비인간적일 때는 복종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만 기계적으로 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퇴보하지 않을 수 있다. 불완전한 법에 복종하고 비인간적인 법에 복종하지 않으려면 잘 판단해야 한다. 우리는 법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동시에 그 법을 기계적으로 준수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그런 판단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복종에 대해 경계하는 만큼 법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경계심만이 우리가 법에 복종하는 가운데에서도 법에 대해 인간으로서 진정한 윤리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Thursday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1. 학교는 지식 이전에 규율을 가르친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울고 싶은데도 울음을 그쳐야하는 법, 뛰어다니고 싶어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법을 배운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규율이다. 규율이 정당화되는 첫 번째 이유는 '강자의 법'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힘센 자들이 늘 승자가 될 것이다. 또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상급의 권위가 실제적인 평등의 조건이라는 것을 배운다. 만약 우리에게 평등을 강요하기 위한 그 무언가가 우리보다 높은 곳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자연의 불평등이 세상을 휩쓸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아이들에게 이런 지식을 수용하는 태도를 가르치며, 복종의 형식을 가르친다.



이제 학교가 가진 목표들은 우선,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자유인을 양성하는 것이고 그 후 양식 있는 시민으로 키우는 것이다. 학교의 성패는 학교가 규율을 이성적인 논리로 설명하여 아이가 받아들이도록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로 하여금 생각하는 사고 기능을 사용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 자신의 한 부분 -육체- 을 구속함으로써 다른 한 부분 -이성- 이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인간 존재는 육체와 이성이 결합된 존재로 통합적으로 계발된다. 학교가 아이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 바로 규율에 맞게 육체를 구속하고 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식의 통합식 계발이다.

2. 우리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모든 욕망들 가운데서 으뜸이며, 인간 존재의 동력일지도 모르는 뿌리 깊은 욕망 즉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그 필요조건이 바로 반 친구, 타자와의 만남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욕망의 가치를 인정해주기를 요구한다. 학교는 아이에게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학교는 아이들을 교육한다. '교육하다(educate)'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넓은 세계를 향해 가정의 울타리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매개자이다'라고 했다. 타인의 두 눈에서 우리 자신을 찾아보도록 애써야한다. 이렇게 학교에서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타인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으로서 필요하게 된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 교양 -지식의 내용들- 이 자신이 타고난 것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3. 학교는 우리에게 지식을 욕망하는 법을 가르친다

지금 이 시대의 학교 교육이 중시하는 것은 미래의 직업과 직장 생활을 위한 자격을 갖춘 일꾼양성 쪽인 것 같다. 현 시대의 학교는 지나칠 정도로 구직에 치중하여 '자유로운 인간'을 양성할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리고 있다. 지식의 기능은 직장 생활을 준비하게 하는 기능과 우리 내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능이 있다. 학생은 학교에서 지식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고, 삶과 사고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만약 학교가 사고를 통한 앎과 삶의 이러한 공모 관계를 제대로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학교는 가장 소중한 임무를 완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은 앎과 삶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훈육과 지식 전달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훈육(exducere)은 욕망을 최초의 성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목적에서 새로운 목적, 즉 지식으로 이끌고, 지식 전달(instruere)은 인간의 내면을 구축한다. 즉 단순히 욕망을 능가하는 이성의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욕망의 가능성을 내면에 구축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는 것, 사고하기를 배우는 것, 그것은 우리 삶이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갖는다는 것이다. 학교는 우리에게 지식을 욕망하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학교가 학생에게 알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내면을 구축하게 한다면 적합한 직업을 찾아주거나 올바른 시민 양성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학교가 학생에게 내면과 지식을 아우러서 삶과 앎 사이의 공모관계를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Friday 신을 믿어야 하는가?



1. 신앙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 왜 세상이 시작되었을까? 과학은 실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없듯이 이러한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운동에는 늘 원인이 있다. 최초의 날에 세상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움직이게 한 그 자신은 남으로부터 온 동력 없이도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최초의 동인이 있어야 한다.



물리학으로 세상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처음만이 아니라 장래, 죽음 이후의 삶, 무한한 미래를 그려보기 위해서도 신을 필요로 한다.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위협받는 것은 바로 현재 우리의 삶이다. 신을 믿는 것, 그것은 현재의 불행이 유일한 실재는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신자가 이러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에 다가가며, 이곳 속세에서 자신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을 견뎌낼 힘을 발견한다. 자신의 윤리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은 사실 우리 행위를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우리 삶 속에 내재화하는 방식일 수 있다.

반대로 더 이상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의 시선의 내재화도 없고 후회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했다. 신을 믿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인간다움이라는 그 소중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의지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인간답게 사는 것에 머무르기 위함이다.

2. 신앙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신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현실을 선별하여 관계를 맺어나갈 위험이 크다. 신의 모습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악행에 대해 생각을 물으면 신자들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 탓으로 돌린다.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이나 르완다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 질문에 신자들은 신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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