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 빠진 세계사
치우커핑 지음 | 두리미디어
치우커핑 지음
두리미디어 / 2008년 2월 / 239쪽 / 12,000원
1부 고대의 비밀을 돌아보다
파라오와 피라미드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으뜸은 피라미드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곡물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든지, 혹은 천문 관측을 위해서라든지 등의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런데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그것이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학설이다. 고대 이집트의 모든 문물은 '죽음'과 관계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세보다 내세야말로 진정한 삶의 목적이라고 여겼는데,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여러 유물이 그것을 입증한다. 피라미드 속에 있는 수많은 배는 파라오들을 내세로 보내는 교통수단을 의미하며, 석관이나 목관 근처에서 발견되는 그림, 즉 여신 하토르가 파라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건네고 있는 그림 역시 파라오들이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주술을 의미한다.
피라미드를 둘러싼 의문 중 가장 큰 호기심은 바로 건축 방식일 것이다. 기원전 260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최고의 규모를 가진 피라미드다. 그것은 높이가 약 146.5미터, 아래 부분의 전체 길이가 약 1킬로미터에 달하는 규모로, 2.5톤짜리 암석 230만 개로 지어졌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암석을 어떻게 옮겨 높이 쌓을 수 있었을까? 학계에서 알려진 피라미드의 건조 방식에 따르면 우선 석공들이 사람이나 소를 동원하여 거대 암석을 캐고 옮기는 데에만 최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암석들을 지상 1층 높이까지 쌓으면 그 옆에 똑같은 높이의 흙더미를 쌓은 뒤, 돌을 그 위로 밀어 올려 2층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피라미드를 다 세우고 난 뒤 흙더미를 치우고 나면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 방식을 보더라도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당한 수준의 물리학과 수학적 지식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위대한 영웅, 스파르타
영어의 'Spartan'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 기원한 말로, '강인함 · 인내 · 용감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던 스파르타는 생존을 위해서 모든 국민에게 거칠고 힘든 삶을 요구했다. 남자아이들은 8살이 되면 집을 떠나 군사 훈련과 국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스파르타 인들은 이렇게 한참 자랄 나이의 아이들을 훈련시키면서도 죽지 않을 정도의 극히 적은 음식만 제공했다. 또한 몰래 음식을 훔치도록 유도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쟁터에서 식량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한 훈련의 일종이었다. 만약 아이들이 음식물을 훔치다가 들킬 경우, 음식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력이 정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한 매질을 받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스파르탄들의 삶 역시 항상 '전시대기' 상태였다. 남자들은 평시에도 항상 사냥과 운동 경기를 통해 체력을 단련하거나 작은 단검만을 가지고 야외로 나가 생존 훈련을 해야 했다. 여자들은 전쟁이나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스파르타의 영웅들을 낳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체력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건강한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능력만 입증되면 엄격한 관리에서 벗어나 당당한 스파르타의 공민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으로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되었으나 기원전 1세기에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 기백만은 결코 굽히지 않아 모든 로마인의 모범이 되었다.
불을 지키는 성녀
고대인들에게 '불'은 얻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 활용이 대단한 것이었기에 거의 성물처럼 동경과 숭배를 받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여신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에 성화를 피워놓고 이를 성녀(聖女)로 하여금 항상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데 신성한 불을 지키는 만큼 성녀로 간택된 여인들은 순결한 처녀들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들은 평생을 신전에 거주하면서 성화를 지키고 제사용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성녀들은 일반 여성들이 누리지 못한 특권과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화려한 가마나 마차를 타고 외출했으며, 길에서 집정관이나 관리의 마차와 마주치면 그들이 먼저 길을 양보해야 했다. 또한 사형수가 그녀들에게 용서를 구하면 죄를 면해줄 수도 있었다.
성녀들은 로마 정부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았으며, 정치 지도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어 상당한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조약이나 유서 등의 문서와 보물 등을 대신 보관해 주기도 했는데 카이사르의 유서도 6개월 동안이나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녀들이 특권을 지니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저버릴 경우에는 그만큼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만약 성화를 꺼뜨렸다면 끔찍한 매질로 그 죄를 물었으며 혹 부정한 짓을 저지르면 생매장을 당하는 죄를 받아야 했다. 생매장은 무덤의 구덩이에 던져진 채 30일 동안의 식량만을 가지고 배고픔과 추위,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었다. 성녀들에게 이토록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요구되었던 것은 로마의 번영을 상징하는 성화를 수호하는 성녀들은 조금의 티끌도,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로마인들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로마제국, 그 최후의 날
기원전 410년 8월 '영원의 성' 로마가 하루아침에 멸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로마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1969년부터 1976년 사이 영국 남부에서 기원전 5세기 초엽으로 보이는 로마 인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온 450구의 유해 대부분에서 정상인의 80배가 넘는 납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로마가 영국을 통치했던 시절 영국의 주요 도시 대부분에서도 납중독 문제가 똑같이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도시국가 각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통과 전신마비를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만성 납중독의 일반적인 증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 로마인들은 납중독에 걸렸을까?
로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수로 시설을 자랑했는데 대부분 납으로 만든 관을 통해 도시에 물을 공급했다. 그 외에도 주석으로 만든 잔과 구리로 만든 솥을 이용하여 음식을 섭취하고, 심지어 설탕 대신 납 성분이 들어간 탄산수를 술에 섞어 마시기도 했다. 물론 사람은 일정 수준의 납을 섭취해도 괜찮지만 다량의 납을 섭취했을 경우 무력증에 걸리거나, 심할 경우 생식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로마의 출산율이 크게 저하되어 로마 황제들은 여성들에게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아무튼 로마인들의 화려한 생활 속에는 납이라는 무서운 중금속이 수반되었지만 이를 남용하여 로마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2부 비밀스런 중세 이야기
동방에서 일어난 신기, 십자군 전쟁
11세기 초에 일어난 대규모 십자군원정은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박애의 상징인 로마 교황이 숨어 있었다. 예로부터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은 매년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에 7세기 정통 칼리프(caliph, 이슬람교단의 지배자)왕조가 들어섰지만 이들은 그곳을 순례하는 기독교 신도들에게 어떠한 무력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세력을 뻗친 셀주크 투르크족 역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기독교를 신봉하던 비잔틴 제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했고, 교황이 이 손길을 덥석 잡았다.
평소 이슬람 제국의 성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로마 교황에게 비잔틴 제국의 요청은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된 유럽에서 로마 교황은 서유럽에서만 권력을 행사했을 뿐 동로마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은 예루살렘 성지 수호와 동방 정교의 동포들을 구한다는 미명 하에 전쟁론에 불을 붙였다. 이에 이슬람 제국의 재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서유럽의 봉건귀족들과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고자 했던 파산한 농민들, 그리고 지중해 무역 이권을 독점하려는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붉은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받아들고 기독교 수호는 '하늘의 뜻'이라고 외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달려갔다. 이와 같이 서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사실상 돈과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의 추악한 살육전에 불과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의 연인, 더들리
25살의 나이로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눈부신 미모와 뛰어난 지혜, 그리고 여왕이라는 신분 덕분에 유럽 대륙의 왕자와 귀족 자제들에게 늘 '러브 콜'을 받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평생 미혼을 고집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정통성 문제와 영국의 약한 국력 때문이었다. 즉위 초기 프랑스 인들은 누가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후계자인지에 대한 문제를 공공연히 거론하여 엘리자베스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때 엘리자베스가 내민 비장의 카드가 막강한 스페인의 영향력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프러포즈를 거절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으면서 펠리페 2세와의 혼사를 들어 유럽 국가들이 자신을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여왕으로 인정하도록 로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통성이 확고해지자 스페인 사절단에게 양국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혼사를 거절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외교 무기로 삼아 영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갔다. 그녀는 '결혼하고 싶은데 마땅한 짝이 없다'는 의사를 사방에 흘리고 다니며 유럽의 명문 황실 혹은 귀족들에게 희망을 품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핑크빛 로맨스'가 있었으니, 상대는 사교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로버트 더들리라는 젊은 귀족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매우 아껴 백작으로 봉하기도 했으나 그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결혼할 가능성이 생기도 했다. 하지만 더들리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죽인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결국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발렌시아 국왕 앙리 3세의 동생이 청혼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은 채 5년이나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결국 혼인을 거절했는데, 이제 50세가 된 엘리자베스에게 더 이상의 혼담은 들어오지 않았다.
3부 진실과 거짓의 근대사
삶을 그린 동화 작가, 안데르센
덴마크의 위대한 동화 작가인 안데르센(1805~1875)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문학창작에 대한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위대한 작가로 거듭났다. 특히 그의 동화책은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담아 어렵고 힘든 성장기를 보내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순수할 것만 같은 안데르센에게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출생에 관한 것이었다. 안데르센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8세와 어느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고 한다. 그런데 안데르센이 태어나자 왕실에서는 그를 오덴세의 구두 수선공에게 맡겨 키우도록 했다고 한다.
안데르센의 출생에 관한 비밀이 밝혀진 것은 1990년 안데르센의 고향 오덴세 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안데르센이 구두수선공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덴마크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칼 스타드가 안데르센의 출생을 파헤쳐보았다. 그는 크리스티안 8세에 관한 거대한 양의 파일과 문서, 그리고 일기와 편지를 죄다 뒤졌다. 그 결과 국왕이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칼 스타드는 크리스티안 국왕이 여성들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몰래 기르도록 명했는데 안데르센도 그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안데르센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번민이 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쓴 『미운 오리 새끼』는 언젠가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의 염원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천재 화가 고흐는 왜 자살해야만 했을까?
1890년 6월 2일, 비운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권총 자살로 서른여섯 해의 생을 마감했다. 당시에 그의 죽음은 세상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으나, 훗날 그가 남긴 작품이 높이 평가됨에 따라 고흐의 자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흐는 당시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도 귀를 자르는 등의 이상 행동을 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러한 그의 불안한 정신세계는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고흐는 어릴 적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간질을 치료하고자 애썼으나 병이 치료되지 않자 그는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신경 계통을 마비시키는 약물을 오랫동안 복용했는데, 그로 인해 건강한 정신 상태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흐의 자살에 대한 또 다른 추정은 사회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건강하지 못한 정신세계를 지닌 그를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의 작품 또한 외면당했다. 이로 인한 좌절감과 실망으로 고통을 겪던 그는 결국 자살을 통해 현실 세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가 현실이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해바라기>이다. 이 작품은 고흐의 끓어오르는 영감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담겨져 있는데, 현실이라는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태양을 향해 활짝 피어오르는 해바라기가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정작 자신의 인생은 꽃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쳤지만 화가의 격정이 섬세하면서도 거친 표현 기법으로 표출된 <해바라기>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의문만 남긴 채 요절한 음악 천재, 모차르트
1791년 12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1756~1791)가 빈민들을 위한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묘비명에는 '류머티즘'으로 죽었다는 글이 새겨졌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죽은 지 일주일 뒤에 그의 시신이 퉁퉁 붓고 있다며 독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 기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 모차르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가 죽기 전에 상당한 현물과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또한 베토벤(1770~1827)의 일기에서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해 모차르트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자 잘츠부르크대학에서 모차르트의 유골을 감식해보았다. 그 결과 모차르트의 유골에서 칼에 찔린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모차르트가 요절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4부 현대를 풍미한 사건들
꿩 먹고 알 먹고, 마셜 플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유럽은 소중한 문화재와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대규모 기근이 휘몰아쳤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해가고 공산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자 유럽의 공산화를 염려한 영국의 지도부는 1947년 2월 21일, 그리스와 터키 지원을 위한 2억 5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