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김용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김용찬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3월 / 375쪽 / 14,000원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옛사람들은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흔히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을 일컬어 사대부라 칭하는데, 이들에게 있어 음악은 정신 수양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사대부들은 유학(儒學), 그중에서도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性理學)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대체로 사대부들은 그들의 학문적 지표였던 성리학을 바탕에 둔 예의범절을 생활의 기본으로 하여 스스로를 엄격하게 절제하고, 때로는 국가에서 법률적으로 이들의 몸가짐을 규제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음악을 매우 중시했는데, 윤리와 음악이 결합된 표현인 '예악(禮樂)'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심신(心身)을 수양하는 데 있어 윤리 못지않게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악기 중에서는 특히 거문고를 가장 애지중지했다. 거문고는 그 소리가 깊고 장중해 예로부터 '모든 음악의 으뜸(百樂之丈)'이라 여겼다. 학문과 덕을 숭상하는 선비들은 정신 수양의 한 방법으로 거문고 연주를 택하기도 했다. 아래의 그림은 당시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이다. 그들에게 거문고는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았다. 설령 세상과 절연하며 지낸다 해도 거문고만 곁에 있으면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향유했던 시조에는 거문고를 가까이 하고 있는 모습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초당(草堂)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 하니 / 문전의 수성 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우네.
이 시조는 조선시대 학자이자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유성원(柳誠源,?~ 1456)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사육신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세조의 행위에 죽음으로 맞서 항거한 여섯 명의 충신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단종을 다시 왕위에 세우려는'단종복위운동'의 계획을 세우던 중, 변절한 사람의 밀고로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되어 반역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사육신 중에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은 이를 추궁하던 세조의 국문(鞠問)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했고, 유성원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집에서 자결했다. 비록 단종을 다시 왕위에 세우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죽음에 맞서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이들은 지금도 충신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은 비록 누추한 초당에 거처하며 청빈(淸貧)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늘 거문고를 가까이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런데 그가 잠을 청한 이유를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현실은 태평성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유성원은 잠을 청해 꿈에서라도, 어진 임금이 다스리고 세상의 질서가 잘 갖춰진 태평한 시대를 만나고 싶어 한 것이다. 유성원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득 들었던 잠을 다시 깨운 것은 '문 앞에서 여러 가닥으로 들리는 어부들의 피리소리(數聲漁笛)'이다. 아마도 유성원이 꿈속에서 만나고자 했던 태평성대를 조그마한 어촌 마을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是非)을 따지고 서로의 이익을 다투는 세속적인 모습과는 달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은 세상의 명리(名利)에 얽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이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를 거문고와 어부들의 피리 소리와 같은 음악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거문고는 혼탁한 현실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그에게 위안을 주는 소재라고 볼 수 있다.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성리학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적 수양(修養)을 지극히 강조했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 수양이 전제되어야만 타인을 교화할 수 있는 벼슬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강조했던 정신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표현에서 사대부들이 지니고 있었던 미의식(美意識)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수기(修己)'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질서를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자연에 머물면서 자신의 내면 수양에 힘쓰는 것을 가리킨다. 내면적 수양을 갖춘 이후에 관직에 나아가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치인(治人)'은 언제나 도덕적 수양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빈한(貧寒)한 처지에 놓여있을지라도, 자연에서 지내며 올바른 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흔히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세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의 '도(道,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이정(李楨, 1578~1607)의 '산수도(山水圖, 옆 그림)'처럼 사대부들이 지은 작품들 중에서 강산(江山)·산림(山林)·전원(田園)에서의 맑고 깨끗한 삶을 담아내거나, 그러한 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시가들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강호시가(江湖詩歌)'라고 한다. 여기에서 '강호'라는 말은 관직에서 물러난, 또는 나가지 않은 사람이 머무는 '은일(隱逸, 속세를 피해 숨어 지냄)'의 조건이 되는 물리적인 공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흔히 '강호시가'에서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 지은이의 사상과 감정이 묻어나는 관념적인 공간이 대부분이다. 이런 강호시가에서 그들은 몸은 비록 강호에 있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의 끈을놓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강호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되, 현실 세계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 내 생애(生涯) 어떠한가 /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미칠까 /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나만한 이 하건마는 / 산림(山林)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모를 건가.
이 작품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이 지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인 <상춘곡(賞春曲)>의 시작 부분이다. 이 작품은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거처하면서, 자연에 몰입해 봄을 완상(琓賞,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즐김)하고 인생을 즐긴다는 지극히 낙천적인 내용이다. 홍진은 본래 붉게 일어나는 먼지를 가리키는 말로, 온갖 이해관계에 얽매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세를 지칭한다. 따라서 말을 건네는 대상은 속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는 그들과는 구별되는 산림에 거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즐기는 자신의 풍류가 옛사람들의 그것에 미칠까 그렇지 못할까에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다.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그를 제외하고도 자연 속에서 노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다른 풍류객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의 삶에서 '지락(至樂)'을 체득(體得)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호시가'는 이처럼 공간적으로 자신이 거처하는 '강호자연(江湖自然)'과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덧붙여 강호에서 지내는 삶이 속세와 단절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이 속세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지내는 자신의 생활을 옛사람들의 풍류에 견주어 인정받고자 한다. 흔히 풍류(風流)란 속되지 않고 운치가 있는 일을 찾아 즐기며 멋스럽게 노니는 일을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막걸리에 산나물을 안주 삼아 먹더라도, 자신과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오른 가을밤에 혼자서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 또한 풍류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 자세이다.
한몸 둘로 나눠 부부를 삼기실사
전통시대에는 부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흔히 전통 시대의 윤리를 대표하는 오륜(五倫)의 한 덕목이다. 부부유별은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본분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본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각자 이를 잘 헤아려서 서로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고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옆의 그림은 김홍도의 '자리짜기'로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는 한 가족의 한때 모습이다.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訓民歌)> 가운데 한 수에서도 부부유별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한몸 둘로 나눠 부부(夫婦)를 삼기실사 / 있을 제 함께 늙고 죽으면 한데 간다 / 어디서 망녕엣 것이 눈 흘기려 하는고.
전체 16수로 이루어진 정철의 <훈민가>에는 각 작품마다 주제를 나타내는 별도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데, 위의 작품은 '부부유은(夫婦有恩)'이다. '부부유은'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은혜를 잘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부부유별'의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사대부들이 유교적인 이념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백성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지은 시조들을 '훈민시조(訓民時調)'라 부른다. 따라서 훈민시조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체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청자(聽者)를 염두에 두고 말을 건네는 어법을 주로 구사한다.
이 작품의 묘미는 바로 종장에 있다. 초·중장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부부란 천생배필이니 일평생을 함께 살다가, 죽으면 한 무덤에 묻히는 사이'라는 통념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종장에서 "망녕엣 것"이란 제3자를 등장시켜, 사이좋은 부부 사이에 '눈 흘기지 마라'고 언급하면서 작품을 종결짓는다. 이는 부부 사이의 화합이 깨지는 것이 바로 부부사이를 훼방 놓는 "망녕엣 것"과 같은 존재들에 있다는 인식이다. 또한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특정 윤리의 문제를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목소리를 지닌 화자를 등장시켜 표현하는 것이 정철의 작품이 지닌 특징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새 왕조의 주체 세력들은 언제나 건국의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대체로 자신들이 축출한 전 왕조를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조선의 건국 세력들도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좌측 그림)와 그의 추종 세력들은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무엇보다도 500여 년이나 지속된 고려 왕조를 지지해 온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부패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행위의 본질은 왕위를 찬탈(簒奪)하는 것에 다름없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격변기를 거치면서, 왕조의 흥망을 겪었던 당시의 지식인들의 심정이 매우 복잡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옛 왕조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더욱이 역사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존재가 되었을 때의 비감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을 터이다. 이색이나 정몽주 등과 같은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들의 행동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자신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택하게 된다.
다음의 작품은 야은(冶隱)이란 호로 알려진 길재(吉再, 1353~1419)가 지은 것이다.
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는 고려 왕조와의 의리를 내세워 조선 건국 이후에도 관직에 참여하지 않고 은거하며 지냈다. 특히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1400년에 그를 태상박사(太常博士)란 직위에 임명했으나,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세종이 즉위한 뒤에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자손을 등용하려 하자, 그는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이러한 일화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이 섬겼던 옛 왕조와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또한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명분이 있다면 기꺼이 인정하는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작품은 <회고가(懷古歌)>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진 이후, 옛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을 둘러보고 느끼는 감회를 적은 것이다. 개성에는 황진이·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히는 박연폭포(정선의 '박연폭(朴淵瀑)', 우측 그림)가 있으며,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가반대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선죽교(善竹橋)를 비롯해 태조 왕건의 왕릉 등 다수의 유적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둘러본 옛 수도의 자연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한결같은 모습이지만, 대궐을 비롯한 저잣거리는 과거의 호화로움을 뒤로한 채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과 더불어 고려 왕조를 떠받들던 인재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주변의 산천은 예전에 보던 그대로였다. 변함없는 자연과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인걸들이 대조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 종장의 '어즈버'라는 감탄사는, 그러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나왔다. 아마도 망해버린 옛 왕조를 생각하며, 쓸쓸하고 허전함을 깊이 느낀 상태에서 토해낸 탄식이었을 것이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이로다
흔히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일컫는 말로 '지음(知音)'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음이란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자신을 알아주는 절친한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 악사인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古事)에서 유래했다. 종자기는 언제나 백아가 연주하는 음악을 잘 이해해 주었고, 그래서 둘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상대방의 음악을 잘 알아준다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읽어낸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절친했던 친구인 종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거문고의 줄을 끊고 이후로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지음'이라는 고사에 얽힌 사연은, 자신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서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가장 친한 벗과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즐긴 조선 전기 사대부 문인들의 시조작품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때로는 자신들의 가슴 속에 맺힌 고민이나 번민을 해소하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처럼 술이란 벗과 풍류를 즐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가슴속에 맺힌 시름을 풀어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는 여유야말로 삶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요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淸酒)와 탁주(濁酒)이로다 / 먹고 취(醉)할지언정 청탁(淸濁)이 관계하랴 /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거니 아니 깬들 어떠리.
이 작품은 조선 전기의 문인인 신흠이 지은 것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한가롭게 술을 즐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태도를 통해, 신흠이 느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