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니시노 히로요시 지음 | 북북서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니시노 히로요시 지음
북북서 / 2007년 11월 / 325쪽 / 13,000원
제1장 작은 말
유럽과는 대조적인 몽골의 말
몽골말, 또는 몽골말 계통의 품종은 모두 몸집이 작다. 우리가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서러브레드종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말이다. 막북 지방에 사는 이민족은 기원전 흉노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런 작은 말을 길러왔고 이것을 타고 생활을 영위했다. 그 무렵 이미 암말에 수탕나귀를 교미시켜 노새를 낳게 하거나, 암컷 노새에 말의 수컷을 교배시켜 변종을 만들어내는 등 가축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배하여 보다 좋은 품종을 만들어내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실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면서도 말을 크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막북 지방의 민족은 말의 대형화를 꾀하지 않았다. 아는 바와 같이,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에는 서방 원정을 떠나 정복을 계속해나갔고, 유럽까지 진군하여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에 따라 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집도 크고 균형 잡힌 다리를 가진 빠른 말을 쉽게 손에 넣을 기회를 얻었지만, 근본적으로 말을 바꾼다든가 몽골말의 혈통을 개량한다든가 하는 것은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히타이트나 아시리아 시대부터 말의 대형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유사 이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용은 물론 운반, 승용, 경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의 대형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했을 때에는 유럽 사람들 눈에는 '쥐 같은 말을 탄 미개인'의 무리로 비쳐졌다. '쥐 같은 말'이란 통상 말을 깎아내릴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왜 막북 지방의 민족은 굳이 작은 말을 고집했을까? 물론 진화나 진보에 무관심했기 때문은 아니다. 또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여긴다든가, 신앙적이라든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유목민의 입장에서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몸집이 작은 몽골말이 우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풀과 물을 찾아서
막북 지역에서는 우선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작은 말이 생존에 유리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 펼쳐진 스텝 대초원은 기후나 토질 때문에 수목이나 풀이 크게 자라지 못한다. 풀이나 관목이 자라는 것은 비가 많이 내리는 봄에서 여름 사이다. 이른바 '하우형(夏雨形)' 토지다. 그 외에는 건기라고 하여 건조지대로 바뀌며 풀이 부족해진다. 외몽골의 목초가 가장 풍부할 때는 여름인데, 일 년 중 평균 한 달 남짓한 기간이다. 겨울이 가장 길어서 일 년 중 절반은 겨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여름에 풀을 많이 베어 두었다가 겨울에 가축에게 먹이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착민적인 발상이다. 유목민에게 물으면 그런 방법은 게으른 자의 사고방식이고, 그런 방법으로는 가축 수가 금세 줄어든다고 반박한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풀은 짧은 것뿐이어서 베는 것조차 어렵다. 조금씩 풀을 베어 말려두기도 하지만, 이것은 병들거나 어린 가축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여름에도 외몽골의 하루 평균 기온은 섭씨 10도로 높은 편이 아니라 풀이 별로 자라지 않는다. 연간 평균 기온은 영하 1도이다. 따라서 여름에 초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한 면 가득히 풀이 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 끊임없이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해야 한다.
이것이 '유목'인 것이다. 유목민에게는 사막을 걸어야 하는 날이 많다. 모래사막뿐 아니라 돌사막이라고 불리는, 전혀 풀이 나지 않는 사막도 있다. '고비'라 불리는 흙바닥에 콩 크기만 한 작은 돌을 뿌린 것 같은 불모의 지대도 있는데 이 역시 사막이다. 사막을 지나는 동안은 성글게 난 낙타풀이나 관목 따위의 보잘것없는 먹이로 배를 채우며 다음 목초지대를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의 유목민에게 있어서 풀과 물을 찾기 위한 싸움과 전쟁은 불가피했다. 싸우는 것이 살아남는 수단이었고, 유목민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전쟁을 위한 훈련을 쌓았으며 수렵으로 단련되었다. 스텝지대라 해도 어디에나 풀이 나는 것은 아니고, 풀이 없는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삼림지대도 있다. 겨울이 오면 몽골말은 발로 눈을 파고 마른 풀을 뜯어먹는다. 양이나 염소는 그럴 힘이 없기 때문에 말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은 풀을 먹는다. 북방의 말은 일 년 내내 방목을 하는데 겨울 동안 체중이 20~30퍼센트나 줄어든다. 몽골말은 밤낮을 바깥에서, 그것도 영하 50도의 혹한도 견뎌내고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몸집이 작은 몽골말이 환경적으로 추운 지방의 유목생활에 적합했던 것이다.
기마 군단은 최소설이 합리적이다
서방 원정에 나선 몽골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만 안팎이라는 설과 50만이나 70만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숫자는 확실치 않다. 20만으로 보는 해석이 많은데, 만약 20만이라고 한다면 병사 한 명당 평균 다섯 필의 말을 끌고 갔다고 쳤을 때 무려 100만 필이나 된다. 스텝지대를 지나 호라즘에 이르러 병사를 나눠 호라즘의 여러 도시를 공략할 때까지 그 많은 말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원정길에 풀이 많았을까? 오토랄을 비롯한 오아시스 도시를 공략한 뒤에는 인마용 식량을 약탈할 수 있었겠지만, 그 전까지의 원정길은 몹시 험난했을 것이다. 유목을 하러 나온 게 아니라 '원정'이다보니 휴식을 취할 때마다 말에게 풀을 먹일 수도 없었을 테고, 풀의 양은 일상적인 유목 때보다 두세 배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부근의 스텝지대의 풀은 동아시아 쪽의 그것보다 조금 긴 것도 같지만, 스텝지대 전체를 통틀어도 군마 100만 필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옛날부터 물과 풀을 찾아 피나는 싸움을 해온 유목민의 경험에 비춰 봐도,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말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병사의 숫자도 몽골 천호제(千戶制)라는 십진법 군조직의 형태로 봤을 때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천호제는 몽골의 유명한 군조직 구성법으로 칭기즈칸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병사 10명을 최소 단위로 그 장을 10호장이라 불렀고, 이것을 또 10호 모아서 그 장을 100호장, 또 이것이 10호 모이면 천호장이 되는 것이다. 몽골제국은 이 천호장이 100호 가량 있었다. 그 가운데 에는 제국이 생기기 전에 몽골부족에게 맞서다 정복당해서 나중에 조직에 편입된 타타르 부족, 케레이트 부족, 나아만 부족 등도 포함된다. 하지만 1만 명쯤 되는 친위대 '케식'은 포함되지 않는 숫자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서방 원정에 나선 몽골군의 숫자는 10만 명 안팎으로 짐작된다. 거의 모든 군사가 원정에 나선다고 해도 일부는 동생의 지휘 하에 본국에 남겨두었을 테고, 금나라나 서하에 대한 경계병도 배치했으니 10만 명이 채 안 되는 군사로 서방원정에 나섰을 것이다. 또 원정군의 규모를 파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변수가 있다. 하나는 몽골군 이외에 속국의 병사를 얼마나 편입시켰는지, 그리고 정복한 곳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이고 보면, 얼마나 많은 포로가 전쟁에 동원되었느냐에 따라 전체 원정군의 규모는 큰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만약 원정군 규모가 20만에 이르고, 말의 숫자가 스텝지대에서 구할 수 있는 풀의 양을 웃돌았다면 이광리의 원정 때와 같이 굶어죽는 말이 속출했을 것이다.
제2장 얼어붙은 황하를 말이 건너다 대원정의 빌미
칭기즈칸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강을 어떻게 건너고, 또 어떻게 이용했을까? 칭기즈칸의 시대, 서방의 중앙아시아는 호라즘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몽골제국과 호라즘 왕국사이에는 거란족이 세운 서요(西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기 전에 장군 제베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이 서요를 멸망시켰다. 칭기즈칸 자신은 십수만 명의 본대를 이끌고 천산산맥 북쪽의 스텝지대를 서진하여 이르티시 강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가 1219년 여름의 일이다. 칭기즈칸은 이곳에서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 부근은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 중에서 풀이 비교적 많아 말을 쉬게 하기에 적합했다. 이르티시 강은 알타이 산맥에서 시작되어 북으로 흐르다 오비강과 합류된다. 그리고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동결된다. 이 강도 혹한지대에서 북류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을 때는 남쪽의 상류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 중국식으로 말하면 무개천(武開川)이 된다. 단, 이 부근의 강은 사막으로 물이 스며들어 수량은 많지 않고, 계절이나 기후에 따라 물이 바짝 말라붙는 일도 있다. 따라서 말이 힘들지 않게 건널 수 있는 강이다. 호라즘 왕국은 사막 안에 산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를 지배하에 둔 제국이었다. 왕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가 오토랄이다. 바로 이곳에서 '오토랄 사건'이 일어나서, 칭기즈칸에게 서역정벌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찍이 한나라 무제가 대완국 원정에 나선 것과 그 경위가 비슷하다. 한 무제의 원정은 무제가 한혈마를 얻기 위해 파견한 통상 사절이 죽임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218년, 칭기즈칸은 호라즘에서 온 세 명의 상인을 사절로 삼아 호라즘의 왕 무함마드(재위 1200~1220년, 정식 이름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에게 보냈다. 통상을 위한 사절이었지만, 선물과 함께 '귀왕을 내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자 한다'는 칭기즈칸의 친서가 전해졌다. 이 친서가 무함마드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자신을 신하 취급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대체 칭기즈칸의 군대는 얼마나 강한가?" 무함마드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사절단은 금세 영합하여 대답했다. "호라즘 왕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상황에서 칭기즈칸은 이번에는 450명의 이슬람 상인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호라즘 왕에게 보냈다. 통상을 위한 상품도 잔뜩 짊어지고 가서 힘을 과시할 작정이었다. 사절단이 처음 방문한 오토랄에서 교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절단 쪽에서 보면 오토랄은 호라즘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실다리아 강의 중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지점의 동쪽 강변이다. 호라즘 왕 무함마드의 의향이었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토랄의 장관 이날추크가 450명의 사절단을 모두 죽여 버렸고, 말과 낙타를 비롯한 상품도 빼앗아 버렸다. 눈에는 눈, 힘에는 힘이라는 식이었을까? 사절단의 낙타 몰이꾼이 가까스로 도망쳐서 칭기즈칸 앞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일부러 도망가게 한 것이리라.
세심한 도하 작전
예를 들어 은천(銀釧)에는 1527년 음력 8월 경술(庚戌)에 소왕자(素王子)가 이끄는 수만의 기마군이 습격해왔다. 명나라 측은 '얼음이 단단해졌으니 적이 올 것이다' 하고 단단히 방비했지만 돌파당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몽골 측은 황하가 얼기만을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적의 삼엄한 경계태세를 각오하고 쳐들어왔다. 그런 이유로 얼음이 약해지면 재빨리 물러갔다. 예부터 변방의 민족은 황하의 동결에 관한 꽤 자세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루만 오차가 나도 생사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자로 기록된 자료가 없는 탓에 우리는 모든 것을 중국 측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움직임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극히 용맹 과감하고 습격하는 과정에서는 잔인했지만, 도하 작전에 임해서는 늘 세심했다. 어떤 정보든 간에 다 모으고 나서 실행에 옮기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서방 원정이 성공한 것은 이 습관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반년 가까이는 말이 황하의 얼음을 밟고 오르도스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황하의 동결은 오래 전부터 오르도스가 이민족과의 치열한 싸움터가 된 이유 중의 하나다.
해마다 날씨도 다르다. 북방에서 말을 타고 황하를 건넌 이민족에게 동결기는 유격전과 기동전을 전개하기에 유리하지만, 전투에 지거나 습격에 실패하여 철수할 때 만약 해빙기보다 늦어지면 얼음 위로 건널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오르도스를 점거하지 않는 한, 독 안에 든 쥐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동력이 있고 마상 활쏘기에 능하다고는 해도 그들은 늘 소수의 침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만리장성도 마찬가지였다. 후세 사람들은 변방의 이민족이 일단 장성을 넘는 데 성공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장성을 넘은 뒤에 예상 밖의 반격을 당해 후퇴하려할 때, 만약 장성이 버티고 있으면 역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된다. 이를 위해 장성의 70퍼센트는, 특히 오르도스 동쪽 지역은 중요한 장성만이라도 외장성(外庄城)과 내장성(內粧城) 두 겹으로 만들었으며 지금도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이중으로 된 장성일수록 독 안에 든 쥐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실제로는 두 겹 이상으로 겹겹이 쌓은 곳도 있고, 중요한 지점에는 어김없이 말의 진로를 방해하는 벽이나 도랑을 설치해두었다. 설령 독 안에 든 쥐가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럴 위험이 크기 때문에 변방의 이민족들이 쉽사리 장성을 넘을 수 없는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방인은 수전에 약하다
낙양(洛陽), 정주(鄭州) 등 북쪽의 주요 도시는 양자강이 거느리는 여러 도시와 달리 황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개봉(開封), 제남(濟南) 등의 도시는 황하가 대운하와 이어진 후에야 항구로서 번창했기 때문에 황하 자체의 운항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황하에는 고저의 차이가 있어 수군(水軍)도 발달하지 못했다. 수군이란, 말 그대로 '물 위의 군대'라는 뜻으로 해군(海軍)과 같은 말이지만, 여기서는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수군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 수상전(水上戰)은 대부분 남쪽에서 벌어졌다. 그런 이유로 수상전에 약한 것은 이민족뿐만이 아니었다. 그 밖의 북쪽 사람들도 수상전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저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좋은 예이다. 위, 촉, 오 세 나라 중에서 북쪽의 황하 중류에 가까운 업( ) 지방을 근거지로 했던 위나라는 208년 남정(南征)에 나서 강남에서 세력을 넓히던 오나라를 단숨에 치려고 했다. 무려 80만 대군이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숫자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위나라 군대는 호북성(湖北省)의 양자강 북쪽, 적벽의 맞은편 강기슭의 오림(烏林)이라는 곳에 진을 쳤다. 강가에 군선을 염주 꿰듯 묶어놓고 정박한 채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오나라는 촉나라와 연합하여 싸우게 되는데, 가장 세력이 강한 위나라에 대항하여 오와 촉이 연합작전을 편 것이다.
양자강에 익숙한 오나라가 계략을 세웠다. 오나라 수군의 지휘관 황개(黃蓋)는 항복할 것이라고 속인 후 오나라 선단을 이끌고 위나라 선단 가까이로 갔다. 오나라 군의 배에는 기름을 먹인 나무 다발을 쌓고 그 위에 천을 덮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위나라의 조조는 기뻐하며 오나라의 선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나라의 선단이 갑자기 덮고 있던 천을 벗겨내는가 싶더니 나무 다발에 불을 붙여 위나라 선단 쪽으로 밀어붙였다. 미리 풍향이 위나라 쪽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던 오나라의 계략이 맞아 떨어졌다. 위나라 선단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게다가 강기슭의 위군 진영에도 옮겨 붙어 큰 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위나라는 완패했다. 이로 인해 위나라가 천하를 차지하는 일이 크게 늦어졌고, 천하삼분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오나라가 양자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바람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 오나라는 강남의 대부분을 확보했고